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형형색색의 요트들과 함께 하룻밤 정박했다. 초고층 아파트 아래 요트들은 먼동이 터오자 자태가 빛났지만 내 텐트는 초라해보였다. 남들이 볼세라 얼른 텐트를 접었다. 안전한 항구에 정박(碇泊)해 있는 요트는 제아무리 초고가의 화려하다할지라도 승객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내 강건한 다리는 나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출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바다하프마라톤이 열리는 벡스코 행사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활기에 넘쳐있었다. 가다가 연세는 좀 있는데 피부에 기름기가 흐르며 활력이 있어 보이는 분을 만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고 물어보니 75살이신데 마라톤 200여 회를 완주하셨다고 한다. 나는 바로 경의를 표했다. 세상에 대단한 사람들은 많다.
마라톤이 그에게 젊음을 선사했다. 마라톤은 아주 평범하게 느껴지던 일상을 아주 소중하게 바꾸어놓는다. 하찮게 여겨지던 일상이 밝게 빛나고 주위의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서 무기력하던 삶이 역동적으로 바뀌게 된다. 육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을 되돌려준다. 세상과 삶을 뜨겁게 사랑하고픈 마음이 생겨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마술을 부린다.
대회장에는 해군군악대가 연주를 하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고 분주스러운 가운데 런너스클럽 회원들과 만났다. 부산일보 기자와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수만 명의 주자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인파에 밀려 달리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산을 가장 멋지게 바라다볼 수 있는 광안대교(廣安大橋)에서 내려다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다와 도심의 고층빌딩과 병풍처럼 펼쳐진 산을 구경을 하면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광안대교를 달리며 부산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데 한 청년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대륙횡단 시작할 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24 살의 어린나이에 벌써 100 km 울트라마라톤을 여러 번 완주하였다고 한다. 사실 젊은 사람들이 근육의 질이 훨씬 좋고 피로회복이 빠르긴 해도 끈기가 없고 지구력이 없다. 그래서 울트라 런너들 대부분은 중장년층이다. 그도 광안대교 끝까지 우리와 함께 동반주를 하여주었다.
오늘의 부산 런너스클럽 회원들과의 광안대교 동반주는 부산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담아서 우정으로 포장하여 마음에 간직하는 멋진 시간들이 되었다. 이제 김진웅 회장을 비롯해 김명곤, 장호동씨가 어제에 이어 함께 해주었고 오늘은 문정화씨가 함께 하여 주었다. 부일대 앞에서 간단한 음료를 나눠 마시고 아쉬운 작별을 했고 박승렬씨가 오늘 김해공항까지 길 안내를 해주었다.
원래 계획은 자갈치시장을 거쳐 꼼장어 구이를 먹고 한때 아시아 최고의 철새 도래지였다는 을숙도(乙淑島)를 거쳐 김해공항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길이 너무 복잡하고 한참 돌아간다는 말에 중간에 돼지국밥 한 그릇씩 먹고 그냥 낙동강을 건너면서 다리 위에서 낙동강 하구의 새들의 낙원을 멀찌감치 구경하였다. 강물의 흐름이 다하여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엔 삼각주가 잘 발달하여 생태계에 보고가 된다. 다리를 건너 이제 고즈넉한 낙동강 둑을 달리기 시작한다.
박승렬씨는 역시 우리나라 울트라마라톤 최고기록보유자답게 장거리 주자가 준비해야할 기본적인 일들과 경험이 풍부했다. 나는 사실 미대륙횡단을 얼떨결에 하고 다시 국토순례일주 마라톤을 하고 있지만 경험으로나 기록으로나 일천하기 짝이 없다. 맑은 가을하늘 낙동강 뚝방길로 쏟아지는 햇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우리들은 마라톤 이야기를 나누며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박승렬씨가 김해공항의 공군부대에 근무하는 친구한테 부탁을 해서 공군 관사 안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게 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사실 길 떠나 먹고 자고 입는 것 신경 안 쓰고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늘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勞心焦思) 한다. 신용진씨는 방을 마련하고 막걸리를 한잔 같이 하자고 사다놓고는 부대 일 때문에 나가더니 밤샘작업을 했다고 한다. 결국 막걸리는 박승렬씨와 둘이서 사람 사는 정과 고된 울트라마라톤을 뛰는 동료애를 실어 마시고 공군관사에서 하늘을 마음껏 나는 꿈을 꾸며 곤한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