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터오고 어둠이 걷히자 사찰을 에워싼 가을이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를 감싼 자색의 비단치마처럼 신비롭게 펼쳐져 보인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울을 출발하여 남으로 내려갔던 여행이라 아직 가을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는데 금오산의 가을이 종소리의 여운처럼 오래도록 울린다. 자색(紫色)의 치마 위에 금빛으로 수놓은 비단치마를 입은 여인의 자태 같은 향천사의 새벽공기가 여인의 체취처럼 몽롱하다. 지난밤 따끈한 구들장에 잘 데워진 몸에 활력이 돈다.
나는 아직도 예쁜 여자들 앞에 서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니 내 행동이 조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여자가 있다면 자신은 상당히 미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침공양(供養)을 하러 가는 내 발걸음이 조신하다. 떨어진 낙엽도 피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특별한 양념이 더해진 것 없이도 정갈하고 담백한 아침공양을 충분히 하고야 극락전에서 부처님께 3배를 했다.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지스님이신 효성스님이 내방을 하셔서 함께 차 공양을 하면서 훈훈한 격려의 말씀도 듣고 향천사가 백제의 의자왕 때 창건된 천오백 년의 유서 깊은 역사도 알게 되었다. 조상들의 얼이 숨쉬는 고찰(古刹)의 고즈넉한 가을 아침 향기를 마음에 담아본다.
다시 어제 마무리를 하였던 아산시청으로 와서 진오스님과 함께 발안을 향해 달려간다. 아산방조제를 달리면서 흘러나오는 스님의 염불소리가 평화스럽고 경쾌하다. 동자스님의 목소리처럼 낭랑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가을바람에 흩날린다. 봉사하는 삶이 이렇게 생을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모양이다. 잠시 나쁜 생각이 든다. 저 기쁨을 훔칠 수는 없을까? 저 보석 같이 빛나는 기쁨을! 영롱한 사랑을!

모든 것은 흐를 곳을 찾는 법이다. 금오산 기슭의 가을도 어느새 흘러내려와 가로수 위로 흐르고, 내 발길도 흘러흘러 간다. 흐르면서 순환한다. 흐르면서 스스로 정화된다. 아산방조제 한쪽으로 물도 흐르고 바람도 흐르고 구름도 흐른다. 기운도 물처럼 흐를 곳을 찾는다. 가슴을 활짝 펴고 스님과 함께 방조제를 달리는 동안 스님의 좋은 기가 흘러들어온다. 빛나는 기쁨이, 영롱한 사랑이! 연꽃보다 아름다운 스님과 함께 달리니 이 가을 나도 연꽃으로 피어날 것 같다.
방조제를 다 건널 즈음에 주영환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점심을 같이했으면 하니 어디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스님 오늘 점심 탁발(托鉢)은 해결되었습니다.” 점심을 함께하고 진오스님은 주영환선배가 다시 차가 주차되어 있는 아산시청에 모셔드리고 나는 다시 홀로 되어 발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작은 발걸음을 하나씩 이어나가던 긴 여행도 어느덧 종착지를 향해서 가고 있다. 여행이란 언제나 떠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

발안 조금 못미처에서 주영환선배가 다시 왔고 서울에서 사진작가 한재훈씨가 사진을 찍어주려 내려왔고 조석현씨 김호성씨가 지난번에 이어 또 내려와서 조금이지만 같이 뛰어주었다. 세상은 아름답다. 자연의 경관(景觀)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도 홀로가 아니어서 아름답다. 홀로 떠난 여행 홀로이지 않게 내버려두지 않아서 눈물나게 아름답다.
주영환선배가 숙소를 정해주시고, 한우고기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겨 나중에 합류한 임성하 김대섭씨와 즐겁고 가을 벌판처럼 풍성한 만찬을 즐겼다. 꽃살등심이 입안에서 과일즙이 터지듯이 터져서 입안에 가득 찬다. 행복한 느낌이 확 몰려온다. 이 저녁 이빨 사이에 낀 한우 살점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물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