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내면서

백제는 고구려처럼 도읍지가 한 지역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멀리 옮겨다녀 백제의 강역을 밝히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황하에 인접한 산서성 남부 마한 지역에서 십제란 국호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의 팽창으로 요동에서 밀려 황하를 건너 섬서성 동부 요서 지역에 하남위례성에 도읍하면서 국호를 백제라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관미성을 잃고 다시 산동성 제령인 한성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고구려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자 호북성 웅진인 무한으로 옮기는 등 먼 거리로 도읍지를 옮겼던 나라이다.
설상가상으로 백제와 관련된 지리지명들이 지워지고 없어 정확한 백제의 지명들을 추적하는 일 역시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예리한 통찰력과 백제를 기록하고 있는 여러 문헌사료들을 비교, 분석, 교차확인하면 단서를 얻을 수 있고 따라서 많은 지명들을 되찾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 여긴다.
한국의 제도권 식민 반도사학계의 통설은 백제가 한반도 한강유역에서 시작하여 충남 공주와 부여로 옮겼으며 신라가 당나라를 한반도에 끌어들여 당나라가 부여까지 와서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주장하고 이 같은 엉터리를 역사라고 가르치고 신봉하고 있다.
이 같은 한국역사학계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망한지 1,36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백제의 강역을 밝히지 못하고 백제가 한반도에 갇혀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이 같은 왜곡된 백제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제관련 1차사료와 문헌자료 약 240종 총 680권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들을 읽고 조사, 검토, 그리고 교차확인을 통하여 사료비판과 함께 <百濟의 領土 硏究>라는 제목의 학술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선행연구자들의 오류투성인 논문이나 단행본에 근거하여 작성된 한국 역사학계의 학위논문들과는 달리 필자의 논문은 오직 문헌사료를 근거로 고증하여 백제영토의 진실을 밝힌 최초의 학술논문이라는 점에서 독창성을 찾고자 한다.
한국의 재야사학을 한다는 몇몇 사람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은 하고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백제가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했었는지는 문헌사료의 전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근거없는 잡설들로 일관해 오고 있다.
본 논문을 작성하면서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애가 남달라 해동의 증자라는 호칭을 얻은 왕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사치와 방탕한 사람으로 기록되었고 세간에서는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데리고 살았던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상한 점은 <삼국사기>를 제외한 240종의 문헌사료 어디에도 의자왕이 사치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삼천궁녀를 데리고 살았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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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2부
충남 공주에서 무령왕릉의 지석이 발견되었다고 야단법석을 한 적이 있다. 31명의 백제왕들 중 무령왕 한 사람의 이름, 출생, 사망 년 월일, 행적, 무덤의 좌향 등을 기록한 지석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한반도가 백제는 아닌 것이다.
역사는 문헌자료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문헌 기록으로 끝맺는다. 고고학이란 유물과 유적 즉 깨진 기왓장, 벽돌 조각, 지석,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을 발굴하고 분석하여 인간의 체질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류학의 한 구성 분야이다.
고고학은 역사학이 아닌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필자는 고고학을 민족의 이동사라고 주장해왔다. 대륙에서 패망한 백제 유민들 일부가 한반도에 오면서 가지고 온 유물들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뒤늦게 발굴된 것뿐이다.
2세기와 3세기의 로마 동전이 캄보디아 앙코 보레이(Ankor Borei)에서 발굴되었으며 같은 시기의 도장(봉인)들, 보석들, 그리고 몇몇 인디언 유물들이 함께 발굴되었다. 캄보디아가 로마의 영토였는가? 대한민국 대학에 몸담고 있는 역사학자들에게 정중히 묻는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차이점도 모르는 무식한 친구들이 대학교수라고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 같은 어리석은 교수들 밑에서 학위논문을 작성한 자들 역시 분구묘, 백제 유물, 고분과 토기, 금동관과 금동신발, 유적,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자기 등을 근거로 하여 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했다는 엉터리 학위논문을 작성 제출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얻은 관행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현실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제는 BC213년에 산서성 남부인 마한 땅에서 개국하여 고구려의 팽창에 밀려 산동성과 남쪽 한(변한)땅인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광동성, 광서성, 운남성, 대만, 해남 등을 영토로 경영했던 대제국이었다.
백제와 당나라가 일대일로, 백제와 신라가 일대일로 싸웠다면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을 강국이었다. 문제는 한인, 한웅, 왕검에 뿌리를 둔 한 겨레가 서로 싸우고 이간질한 결과 고구려도 망했고, 백제도 망했고 결국 신라도 패망하고 말았다.
21세기인 오늘날도 1,300년 전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남북으로 갈려 싸우다 보니 양쪽의 국력은 쇠진해졌으며 미제국주의자의 식민지가 되었는데도 이 같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보수란 폐쇄적인 틀에 갇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가며 선제공격을 운운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볼 때 역사학자로서 심한 자괴감까지 들기도 한다.
자신들의 뿌리인 족보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위인들이 어찌 수천년의 민족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마는 우리 모두 민족사에 관심을 갖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하루빨리 민족통일을 실현하고 동이배달한민족의 영광을 되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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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3부
百濟의 領土 硏究
金泰瑛
<목차>
I. 머리말
II. 요동과 요서의 위치
1. 황하 동쪽은 요동 서쪽은 요서
2. 요동에서는 천연소금이 산출
III. 삼한이 위치한 산서성
1. 마한은 서쪽에 위치
2.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
IV. 백제의 도읍지 위치
1. 하남위례성
2. 관미성의 함락과 한성으로 천도
3. 한성의 함락과 웅진으로 천도
V. 사비로 도읍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1. 백제의 8대 성씨의 분포
2. 망국의 비운을 맞은 의자왕
VI. 백제는 대륙에서 개국·패망
1. 백제부흥운동의 임존성 위치
2. 백제가 한반도에 있지 않은 이유
가. 백제의 지명들은 모두 대륙에
나. 진평이군은 충청도에 없고,
다. 서울 북쪽 근교에서 말갈과 싸울 수 없으며,
라.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은 안휘성에,
마. 공주의 무령왕릉은 일제의 조작,
바. 백제는 한때 백만대군을 가졌고,
사. 기병 수십만이 황해를 건너올 수 없으며,
<국문초록>

백제가 한반도 한강유역에서 개국하여 충청도 웅진으로 그리고 부여로 천도하였으며 신라가 당나라를 한반도에 끌어들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학계의 주장은 문헌사료에 전혀 근거가 없는 허구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정확한 백제의 강역을 고증하려는 것이다.
백제의 강역을 추적할 수 있는 1차사료는 <송서>로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리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가 요동땅을 빼앗아 경영하자 백제는 요서를 빼앗아 경영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과 진평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은 경도 110도로 갈리는 황하를 기준으로 하여 황하 서쪽과 산서성 남서부를 요서라 하고 황하 동쪽인 산서성을 요동이라 한 사실을 <한서/지리지>, <양서>, <남사>, <신당서>, <수경주>, <원화군현도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등을 통하여 고증하였다.
요동에서 천연소금이 산출된다는 <관자>의 기록이 사실임을, 산서성 남부에 있는 운성염지를 일컫는 말임을 확인하였다. <사기/조선열전>과 <한서/지리지>를 통하여 요동에 패수가 있고 요동을 유주라고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들 문헌사료들의 기록을 근거로 요동이 산서성이고 요서는 산서성 남서부임을 고증하였다.
산서성 남서부로부터 섬서성과 감숙성에 있던 마한 54국의 하나인 백제는 십제란 국호로 처음 시작하여 고구려와 함께 요동인 산서성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세력을 팽창하여 요동을 빼앗아 통치하자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 황하를 건너 요서를 빼앗아 경영하였다.
백제가 빼앗은 요서는 섬서성 동부에 있는 유성과 산서성 남부에 있는 대방 사이로 진평이군이라 하는 곳이며 이곳에 하남위례성을 세우고 백제라는 국호의 첫 도읍지로 삼았다. 백제는 다시 고구려에게 황하 가운데 위치한 관미성이 함락되자 산동성 제령으로 천도하여 제2차 도읍지인 한성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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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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