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의 여정(旅程)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날씨마저 고온다습이어서 쉽게 지치게 만들다보니 계획된대로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아서 여정이 끝날 무렵 즈음엔 이왕지사 관타나모 해군기지가 있는 동쪽을 좀 둘러보고 왔으면 하는 미련이 짙게 남는 상황이 되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쿠바의 교통체계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기차가 주요 도시를 연결하긴 했으나 들쭉날쭉인데다가 정기적이지 않아 그때마다 역 창구의 거대한 칠판에 쓰여진 출도착 일정과 탑승 가능한 인원수를 매번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혹자는 컴퓨터나 전화로 예약하면 되지 않느냐 반문하겠지만 그건 쿠바의 시스템상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기차 말고 버스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외국 관광객용 전용 버스라 지선(支線)을 연결하지는 못했으며 빈번하지 않아서 일정을 잡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처럼 열악한 교통상황을 일찌감치 간파한 이들은 아예 현지 단체 관광버스만을 이용한다거나 3-4명이 모여 택시를 대절해서 다니거나 차량을 임대했다. 나처럼 관광버스도 싫고 단체로 움직이는 것도 싫은 사람은 현지인들 하는대로 해야 했다. 다만, 사람이 채워져야 떠날 수 있는 '시간표 없는 트럭'을 이용하는 일은 엄청난 체력을 요구했으며 무엇보다도 시간적인 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쿠바의 세 중요 인물
'피델 카스트로의 명언'
'생각과 행동을 겸비한 사람' 이라는 이 표현은 아바나의 베다도 라는 지역의 한 공원안에 있는 문구로 피델 카스트로가 '사상가이자 활동가' 였던 '체 게바라' 찬양할 때 쓴 표현이라고 쿠바 친구가 설명해주었다. 우연하게도 오늘 8월 13일인은 그의 89세 생일이라고 한다.
담벼락에서 자주 보이던 그림이다
체류 연장에 대해 '힘들게 간만큼 힘들지 않다면 2주 정도 더 하면 어떻겠냐'고 남편이 추임새를 넣어주니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바나 어디를 들쑤시고 다녀도 여정을 조정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최종적으로 들은 답변은 쿠바내에서는 불가 하고 미국내 발권한 여행사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고 했으며 어차피 예술가 비자는 한 달이 최대라 엎치나 메치나 불가능한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다만, 지리도 어두운 여행자를 이리저리 훈련시키듯 돌린 그들이 야속해지면서 시간을 허비한것만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쿠바인들과 부딪히면서 느낀것은 여행업이 발달되지 않아서 그런지 여러곳에서 유연함의 한계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개중에는 '모르쇠'로 일관해 버리는 이들도 많았고 실무에 있어서는 상당히 융통성이 떨어지는 모양새를 유감없이 연출하기도 하였다. 겉모습은 서구 여느나라나 다름없이 보였으나 서비스 업무에 있어서는 진부하고 고루했으며 딱 꼬집어서 말할수는 없지만 어떤 오지(奧地)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문명과 단절된 고립감 같은것이 사회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여겨졌다.
집 찾아갈 때 꼭 필요한 번지수.손으로 쓰여진 개성있는 곳이 많다.
푸줏간 사인이 동화처럼 감성적이다.
여행에 대한 갈급(渴急)은 오래전부터 키웠지만 막상 닥쳐서 한 준비과정은 턱없이 부족해서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장님 문고리 잡기'나 매한가지로 이어졌다. 언어나 현지사정에 어둡고 잘 대처하지 못하는 여행자들을 일러 '멀쩡하게 생긴 장애인' 이라고 놀리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봉'이 되었고 '만만한 호구'로도 보여서 소소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곤 했다. 더더욱 이곳처럼 두 종류의 화폐가 동시에 사용하는 곳에서는 셈도 복잡하기 그지 없었고 심지어는 화폐 구분조차도 쉽지 않아서 소액일지언정 거스름돈을 떼는 상황도 심심챦게 연출되었으며 친절함 뒤에 댓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계산에 맞닥뜨리면 이따금 뜨악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건 절대 아니었다. 여행자들을 직접 상대로 하는 업종에 있는 돈 맛에 휘둘린 몇몇 이들의 행태였으니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는 경계해야 하지만 더러 백주에 뺨맞은 것 같은 황당한 기분이 되곤 했다. 사기치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해외여행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경우 '그나라 사람들은 이렇다'라는 공식과 낙인(烙印)이 찍혀버리면서 종내엔 그나라를 평생 외면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하는데 제 주머니 불릴 생각에 꿈에서 조차 알지 못하는것 같다.
원숭이와 술병
쿠바인의 표정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며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온 쿠바 여행은 부족했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무탈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에너지까지 재충전해서 입성한 아내를 통해 남편은 그간의 정체모를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을 걷고 오히려 신선한 시각마저 갖게 되었다면서 가고 싶다면 언제든 후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니 신바람이 났다. 쿠바의 여행담에 호기심 가득한 분위기를 읽자니 민간외교를 하고 돌아온 특사라도 된 양 여간 보람있고 뿌듯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음에도 여행이 주는 여운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여행이란 본디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여운이 가실 때 비로소 여행이 끝난다'고 믿었기에 비록 몸은 뉴욕에 도착했지만 쿠바여행은 계속되고 있다고 여겨져서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그 여운(餘韻)을 즐기고 싶었다.

남편이 다시 사무실로 나가자마자 다급하게 책상 앞으로 간 나는 출국 날 아침 두고간 한 무더기의 서류더미 뭉치를 꺼내와 미친듯이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종이 한장씩 들춰가며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찾는 '흰 봉투'는 집 안 어디에도 없었다. 절대적으로 깨고 싶지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최면(催眠)
은 잔인하게 박살이 났다. 그러니까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만 여행에 취해있었고 뒷맛을 음미했을뿐 앞 뒤 상황파악이 되고 설마가 역시로 뒤바뀌는 순간 쿠바의 몽롱한 취기(醉氣)에서 깨어나면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는지 아, 내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왜 그렇게 목을 메었었는지, 거길 못가서 그토록 안달을 냈는지..... 분노와 허탈함 그리고 자책감이 뒤섞이면서 급기야는 여행 자체를 후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만난 숱한 쿠바인과 여행객들 모두가 환한 웃음 가득했는데....도대체 누가 그런짓을 했을까 여겨지니 그들 모두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헛똑똑이 자체였던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담벼락에 힘주어 파서 쓴 '떼 아모'. 연모하는 상대의 이름이 없어 안타깝게도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바나시 벽돌담 낙서
쿠바로 출국하던 날 아침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짧지 않은 기간 나가있을 생각에 할 일이 태산 같았다보니 출발 당일 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짐을 싸야만 했다
. 한참 부산한 상황인데 남편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시간 날 때 읽어보라는 손편지와 적지않은 액수의 현금이 손이 벨 정도로 빳빳한 신권으로 꽤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사서 고생은 금물'이라는 당부와 함께 이따금 특급 호텔에서도 간간이 묵으라고 했다. 이미 곳곳에 현금을 분산해서 넣어둔 상태라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여분의 현금을 가져갈 필요가 있겠나 싶었지만 마음과 성의를 기쁘게 받아주는 것도 좋겠다 싶어 얼결에 받아 깊숙히 챙겨 넣었다.
결코 적지않은 액수의 현금을 들고 다니다 보니 마치 걸어다니는 자동 현금인출기가 된 기분마저 들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처럼 현지인들이나 동료 여행자들에게 쓰는 밥 인심도 후해졌으며 그 정도의 충분한 여력이 있음에 마냥 뿌듯하기도 하였다.
두둑하게 챙겨넣은 현금은 든든함도 주었지만 비례해서 지갑에 쓰잘데 없이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하여, 늘 몸에 부착하다시피 다녔으며 잠잘 때와 샤워할 때 외엔 거의 내려놓지 않았었다.
쿠바에는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든 재미난 모양들이 있다. 비록 녹슬고 훼손되었지만 나름 멋이랄지 정취도 있어 보인다.
학교앞 표지판 웬지 허겁지겁 뛰어야 할 것 같다
본래 습관대로 여러명이 묵는 '도미트리'에 주로 묵었다. 그 중 한곳은 운이 좋아 혼자 욕실이 든 방을 쓰게 되었는데 경비도 절약되고 우리식대로 하면 '까사'(Casa)라는 숙박업소는 민박 개념이어서 호텔과는 다른 맛이 있어 좋았다. 고급호텔에서 묵으며 오픈카를 전세내어 호화롭게 다니는것도 방법이겠지만 배낭을 메고 종일 걸어가며 품을 팔면서 하는 것만큼 생생한 체험은 없다 싶으니 그또한 편안했다. 그렇다보니 기본경비외엔 쓸 일이 없었는데 시쳇말로 '돈질'을 하고 싶어도 쓸 곳도 없었고 사고 싶어도 살 게 없어 보였다.
쿠바의 대중적인 숙소 Casa
침대에서 눈을 떠서 잘 때 까지 오라는 곳도 없고 딱히 가야할 곳도 없었으며 시간을 다퉈가며 만날 사람도 없었지만 늘 바빴다. 일기도 매일 쓰고 사진도 그때마다 저장하는 부지런을 떨면서도 한번도 지갑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미세했지만 메고 다니는 가방의 무게가 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돈이 비는 것을 알았지만 실수로 잘못 계산 했나보다 라고 넘겨버렸다. 그런데 응당 있어야 할 가방안 지퍼 안에 꼭꼭 숨겨둔 현금봉투가 안보였을때는 하늘이 노래졌다. 그때조차도 '아닐거야, 절대 그럴리 없어. 항상 나와 함께 몸에 부착시키고 있었는데 누가 훔쳐 갔을 시간이나 상황이 없쟎아. 집에 두고 안가져 온 것이 틀림없어' 이렇게 되뇌면서 의구심이 치솟을 때 마다 '분명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스페인어로 쓴 2015년 신년하례
쿠바의 아이들 이라고 써있는것을 보니 권투를 가르치는 체육관인듯 보인다
하지만 내 스스로 걸었던 최면에서 여지없이 박살이 났을때 기분은 한마디로 엿같 았으며 말할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만난 사람들 하나하나 의심의 잣대가 드리워지니 쿠바 여행 자체가 허당이었으며 허탈하기 까지 했다. 쿠바라는 나라 그리고 사람들 모두 다 기억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미안하게도 남편에겐 내색조차 할 수 없었는데 어떤 돈인지 잘 알았기에 실망을 시킬 수도 없었고 어렵사리 쿠바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뀐 그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훗날 언젠가 쿠바를 겪어본 다음 중립적인 시각이 생길즈음 말해도 늦지 않을것 같다 여겨졌다. 그때가 되면 웃어가면서 왜 평소와 달리 안하던 짓(!)을 해서 '감동은 순간, 걱정은 영원'을 만들어 줬는지나 따져볼 일이고 이왕 주려거든 여행 당일 정신없고 복잡할 때 주지말고 미리미리 챙겨주는게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말아야 겠다는 뻔뻔한 생각마저 들었다.

사람관계나 일이나 여행이나 마찬가지로 끝이 좋아야 좋다고 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엄밀하게 따져보니 쿠바 여행의 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최면을 걸어가며 미뤘을 뿐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앓이가 사그라지지 않은것은 사람에 대한 배반감 때문이었다.
속앓이를 하는 내게 친구가 다그쳐 물었을때야 그제서야 속내를 드러내었다. '세상에! 하지만 꼭 쿠바에서만 당하는 일은 아니쟎아. 불행중 다행으로 강도만난것은 아니었으니 누군가에게 좋게 쓰였겠지 라고 생각해. 그러니 좋았던 일과 좋은 사람 만난것만 생각하고 퉁 쳐 버리면 어때' 라고 까지 말해주었으나 아는 누군가에게 당했다 생각하니 솔직히 부아가 좀체로 다스려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쿠바 여행은 그 도난사건만 없었더라면 다 좋았다.
돈은 아깝긴 하지만 솔직히 여권만큼 중요하진 않았으며 쿠바처럼 항공 스케쥴 바꾸기 힘든 곳에서 비행기표를 훔쳐가지 않은것만으로도 어쩌면 감사할 일 투성이였다. 그저 오래도록 벼르고 별러서 간 한 여행자에게 부과된 '특별 여행세' 징수방법이 치졸하고 금액이 좀 과했을 뿐이다.

쿠바에서 만난 어린왕자
아무쪼록, 그 돈이 누군가에게 보람있게 값지게 쓰였길 바란다. 대신 쿠바 당국에 건의하고 싶은게 있다. 제발 화폐를 하나로 통일시켜 나같은 '멀쩡한 장애인들'을 양산시키지 말것 그리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해서 '본의아닌 도둑님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뿐이다.
▲ View of Capitol Bldg from Old Habana. 2015. March. 쿠바의 상징을 사진으로 담자니 한계가 있었다. 사진속에는 미처 담을 수 없는 54년의 세월을 첫 스케치로 빠르게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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