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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미국에 도미, 현재까지 뉴욕에서 살고있다. 그동안 여타 이민자들처럼 자영업, 회사생활 등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한편 94년부터 커뮤니티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민권운동 활동가의 시각으로 본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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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시절에 두 명의 거인을 추억한다(上)

글쓴이 : 차주범 날짜 : 2011-02-18 (금) 23:02:27

무심한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2011년의 첫 번째 달이 훌쩍 지나고 있다. 미래를 향한 숨가쁜 속도전이 현실살이의 최고 가치로 자리잡은 지금, 2010년은 지나온 과거로 점차 잊혀질 것이다. 그래서 기록을 동반한 역사의 서술은 중요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2010년의 기록에서, 특히 한국과 미국을 배경으로 역사를 서술할 때 등장할 만한 핵심어들은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안함, 연평도, 4대강, 구제역, 월드컵, 자유무역협정(FTA), 멕시코만 원유유출, 미국 중간선거 등을 떠 올리지 싶다. 이들 핵심어들은 연일 미디어에 등장하며 작년 한 해 동안에 벌어진 중요한 사건들을 대표한다.

그런데 내가 만약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라면 위에 열거한 사건들보단 두 명의 인물을 집중 조명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겠다. 여기서 두 명의 인물은 바로 한국의 리영희 선생과 미국의 하워드 진(Howard Zinn) 교수다. 하워드 진 교수는 작년 1월에, 리영희 선생은 12월에 각각 속세를 등지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러니까 2010년은 하워드 진 교수의 죽음으로 시작해 리영희 선생의 영면으로 마감한 셈이다.

 

리영희 선생과 하워드 진 교수는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관계다. 한 사람은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에서 언론인이자 학자로 또 한 사람은 초강대국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산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놀랍도록 유사한 삶의 궤적(軌跡)으로 점철된 일생을 보냈다. 리영희 선생과 하워드 진 교수는 ‘진실의 탐구’와 ‘불의에의 항변’에 평생을 바친, 각각의 조국을 대표하는 지성사의 거목들이다.

 

www.wikipedia.com

리영희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통역장교로 육군에 입대해 7년간 군 생활을 한 뒤 소령으로 예편했다.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했으며 1972년부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95년에 정년퇴임했다. 여기까지는 이력서 스타일로 살펴 본 선생의 삶의 내력이다.

리영희 선생의 일생엔 경력사항이 미처 설명하지 못한 치열한 내용이 담겨있다. 동서냉전과 군사독재 시절에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으로서,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했던 선생은 4번의 해직과 5번의 구속이란 고난를 겪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1964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추진’기사로 처음 구속됐다. 그후 합동통신 외신부장이던 1971년엔 위수령에 항의하는 ‘64인 지식인 성명’에 참여해 해직됐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중일 때는 교수재임용법으로 1976년에 해직됐다가 1980년에 복직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 다시 ‘광주소요 배후조종자’로 구속, 해직돼 4년을 보냈다.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 당시 비상근 이사 및 논설고문을 지냈으며 1989년에 ‘방북취재 기사 기획사건’으로 또 다시 구속됐다. 선생은 반공시대의 모순을 파헤친 일련의 저작들로 계속된 필화사건도 겪어야 했다. 1977년엔 선생의 저작들을 문제삼은 독재정권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보통의 범인(凡人)들이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고통을 반복해서 감내해야 했던 이유는, 리영희 선생이 상아탑에 머문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라 현실에 뛰어들어 행동한 실천가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 언제나 발언하고 행동했다.

리영희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선생을 ‘사상의 은사(恩師)’, ‘불멸의 기자(記者)’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선생은 유신정권이 절정을 달하던 시기에 반공‧냉전‧극우 논리를 해부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을 펴내 한미관계, 한일관계의 실체를 밝혀냈고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뒤흔들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77년에는 사실에 기초한 중국을 다룬 <8억인과의 대화>와 한국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우상과 이성>을 집필해 한국 지성계에 지적 충격을 안겼다. 1980년대에도 선생은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 전쟁: 30년 베트남 전쟁의 전개와 종결>을 펴냈으며 이후에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비롯한 왕성한 저작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2000년에 뇌졸중(腦卒中)으로 쓰러진 뒤 2005년에 구술 자서전 <대화>를 끝으로 집필활동은 마감했으나 사회참여의 발언은 멈추지 않았다.

 

리영희 선생은 집요한 자료 추적과 사실관계에 기초한 집필활동을 통해 허위(虛威)와 왜곡(歪曲)으로 가득찬 냉전사고에서 비롯된 정세인식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남북문제 등에 대한 우편향 시각의 교정을 이끌었다. 선생의 영향을 받은 후학들과 사회활동가들은 당신이 쓰신 책들을 ‘지적 해방’으로 받아들였고 진보운동의 교과서로 삼았다. 선생의 저작들은 한 개인의 연구 결과물의 의미를 훨씬 초월해 학술적 가치를 지닌 노작(勞作)이자 사회운동을 이끄는 선동문(煽動文)이며 어둠의 시대를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담당했다.

선생은 평생에 걸친 이러한 노력을 생전에 지식인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 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대화>, 2005년)

리영희 선생를 불순분자로 몰아붙인 허위의 ‘우상’들은 끊임없이 선생의 ‘이성’을 탄압하고 억압했다. 거기에 대해서도 선생은 필화(筆禍)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결기어린 본인의 신념을 표현했다. “나라의 어려움이, 과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의 욕구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그 욕구를 억제하는 것으로 이익을 삼는 사람들의 권력욕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장기적 안목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오늘에 앞서는 30년간의 억압적 언론, 출판 정책의 ‘역사적 결과’입니다.” (1978년 11월 26일, 상고이유서)

리영희 선생은 또한 ‘성찰의 대부’로서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고 발언하는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1991년 선생은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에 좌파진영 일부에선 리영희 선생이 변절했다고 공격하기도 했으나 오늘날 좌, 우를 막론한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선생이 90년초에 이미 고민했던 내용이 현실로 재현되고 있다.

반이명박 촛불집회 현장에 참여한 이른바 진보적인 시민이 집회도중 집에 전화를 걸어 자기 자식이 학원에 제대로 갔는지 확인하는 풍경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맨 얼굴이다. 리영희 선생에게서 지적 해방의 세례를 받고 진보운동에 뛰어들었던 사람들마저 무한경쟁 자본주의 사회에 투항한 채 제 자식의 ‘스펙’을 챙기는 안쓰러운 광경이다. 반면에 선생은 본인의 신념대로 소박하고 검소하게 삶을 가꾸며 언행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았다.

21세기가 개막하고 1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의 화약고로서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리영희 선생은 그의 노작들과 사회적 발언들을 통해 극심한 남북 대립관계의 청산을 위한 해법을 이미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은 선생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확인된 냉정한 사실은 남북이 대결을 청산하고 평화정착으로 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선 서해안에서 발생한 일련의 군사충돌을 계기로 전쟁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여당은 무모한 군사도발을 감행한 북한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이용해 극우논리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형편이다. 정작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안전한 대피소로 피신할 작자들이 너무 쉽게 전쟁을 입에 담으며 광분하는 모습은 가히 꼴불견이다. 리영희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그들에게 준엄한 말씀을 분명 내리셨으리라 믿는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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