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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무덤(허광)’ 장기풍은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으로 15년 간 재직 후 은퇴하여 지금은 방랑여행과 글쓰기로 소일하고 있다. 미국 46개주와 캐나다 10개주 멕시코 쿠바 에콰도르 및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배낭여행했다. 특히 원주민지역 문화와 생활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14년 봄에 70일간 조국을 배낭여행했고 2017년 가을엔 45일간 울릉도와 남해안 도서를 배낭여행했다.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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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라워호의 진실

뉴잉글랜드의 가을(5)
글쓴이 : 장기풍 날짜 : 2020-11-21 (토) 21:25:49

뉴잉글랜드의 가을(5)

"WELCOME ENGLISHMAN"

 

 

메이플라워호는 유럽 여러 나라와 영국 사이에 주로 포도주를 운반했던 무게 180톤의 전형적인 무역선이었다. 선장이며 공동선주인 크리스토머 존스의 지휘로 16209월 영국 플리머스를 출발한 메이플라워호에는 102명의 승객과 25명에서 30명 사이의 선원들이 승선했다. 이 가운데 네덜란드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청교도는 성인남자만 28명이었다. 이는 전체 성인남자 41명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숫자로 메이플라워호의 주도권을 잡는데 충분했다. 당시 관습으로 여자와 어린이는 의사결정에서 제외되었다. 승무원의 이름은 다섯 명만 알려지고 있는데 이 중 청교도인 존 알덴은 미국도착 후 귀환하지 않고 정착민들과 합류해 결혼했다. 청교도 승객들은 신앙으로 단단히 뭉쳐 있을 뿐 아니라 윌리암 브레드포드 등 학식과 지도력이 뛰어난 핵심구성원들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일반승객들까지도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 있었다. 사실 승객들 중 절반 이상은 영국 하류민 출신으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신대륙에서 새로운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과, 부랑자, 범죄로 쫓기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이들은 항해도중 청교도들의 요란한 예배와 찬송 그리고 배타적인 태도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했다. 따라서 청교도 엘리트들의 탁월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모진 항해와 굶주림 속에서 자칫 내분과 선상반란도 일어날 수 있던 상황이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공공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자치공동체를 구성하고 필요한 법률과 공직을 제정하기 위해 신대륙에 도착하기 전 성인남자들을 모아놓고 서약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현대 민주정치의 원형으로 평가되는 유명한 메이플라워 서약은 다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정부 설립이 핵심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대영제국, 프랑스, 아일랜드의 왕이 된 신앙의 옹호자 제임스 폐하의 충성된 국민인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과 기독교신앙의 진흥, 우리의 왕과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 북부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창설하고자 항해를 시도했다. 여기 본 증서에 의하여 엄숙하게 상호 계약하므로 하느님과 각 개인 앞에서 계약에 의한 정치단체를 만들어 이것으로서 공동 질서와 안전을 촉진하고 상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령의 제정과 제도 조직을 구성한다. 동등한 법률, 법령, 조례, 헌법과 행정부를 구성한다. 이는 식민지의 일반적 안전을 위한 간편하고 적합한 생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대해 당연한 복종을 바칠 것을 서약한다. 이에 우리의 이름으로 서명한다. 16201111일 케이프 가드만에서 41명이 서명하다.” 이 서약에 따라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상륙하여 합법적인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자신들의 주도하에 통치할 수 있게 된다. 서약에 따라 승객들은 청교도 지도자 존 카버(1584-1621)를 지사로 선출했다.

 

이들이 피난처였던 네덜란드를 떠나 신대륙에 오게 된 것은 당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환경 때문이었다. 영국교회는 1527년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일으켜 1531년 영국 성직자들이 헨리 8세를 영국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인정하는 결의를 함으로써 가톨릭과 결별수순을 밟는다.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파문에 처하자 1533년 앤 볼린과 재혼하면서 1534년 왕위지상령을 공포해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해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는 프로테스탄과 달리 신앙과 형식에 있어서는 가톨릭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교황 수위권만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다만 여전히 교황청을 따르는 가톨릭 신자들은 반국가사범으로 탄압했다.

 

한편 유럽대륙에 번지기 시작한 종교개혁 물결은 영국으로 건너와 성공회 분리로 탄력을 받기 시작해 성상파괴, 순례 폐지, 성인공경 폐지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영국의회는 1559년 엘리자베스 여왕을 신앙의 옹호자로 선포하고 왕위지상령을 채택하는 한편 개신교적인 운동도 배척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63년 성직자 회의에서 성공회 신앙고백 39개조를 제정하여 성공회를 국교화하는 한편 영국 내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중도’(Via Media)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급진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칼뱅노선을 따르는 청교도들은 가톨릭 색채가 배제되지 않은 이러한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교회에서 가톨릭적 요소를 정화(purify)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淸敎徒 : puritan)의 어원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1558동일법’(Act of Uniformity)이 제정되어 주일과 주요 축일에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해 1실링의 무거운 벌금을 물도록 했을 뿐 아니라 성공회 외 불법적인 예배를 하는 경우 벌금과 함께 금고형에 처해지도록 했다. 또한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즉위한 제임스 1(1566-1625)는 왕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퓨리탄을 탄압했다. 개신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성공회에서 완전분리를 주장하는 로버트 브라운 등 많은 칼뱅주의 청교도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청교도 지도자들이 하나 둘 씩 영국을 탈출하여 네덜란드에 피신하게 된다. 대부분 스크루비라는 마을에 모여 살던 이들은 영국을 탈출하기 위해 뇌물로 통행증을 얻거나 배를 전세 내어 밀항을 도모했다. 따라서 1608년부터 청교도의 핵심적인 지도자들 대부분이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또한 같은 해 150명의 일반신자들이 네덜란드 상인을 고용해 탈출에 성공하여 지도자들과 합류해 암스테르담에서 영국인 청교도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 공동체에는 다수의 침례교파와 다른 교파 신자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다수의 청교도들은 암스테르담에서 지방도시 레이던으로 옮기게 된다. 레이던에서 이들은 교인들을 재조직했다. 이들은 레이던에서 대학교수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섬유, 인쇄, 주조, 무역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대부분 절망적일 만큼 가난한 생계와 언어장벽과 환경에 시달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적잖게 나타났다. 특히 청교도 지도자들은 젊은 세대가 네덜란드에 쉽게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걱정했다. 청교도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청교도 공동체가 신앙의 자유와 안전을 찾았지만 네덜란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용사정이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여러 종파의 개신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곳에서는 새로운 전교의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유롭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신자들을 이끌고 신대륙으로 이주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다른 청교도 지도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당시 신대륙에서 식민지 개척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원주민들이 포악할 뿐 아니라 음식도, 물도 없고 질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신대륙 이주를 망설이게 했다. 그런데 1607년에서 1609년까지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영국의 첫 번째 식민지 정착촌을 건설하고 돌아온 존 스미스(1580-1631) 대위는 1616년 자신이 건설한 정착촌을 이상향으로 묘사하면서 신대륙의 지도까지 곁들인 소책자를 출간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탐사한 지역을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고 불렀다. 이 책자는 신대륙 이주를 망설이던 청교도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특히 청교도들의 관심을 끈 건 대구’(cod)라는 물고기였다. 스미스는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되었으므로 청교도들도 기대감에 들떴다. 메이플라워호 이전인 1618년 가을 2백 명에 달하는 성급한 청교도들이 현지와의 협상도 끝나기도 전에 지도자들과 충분한 상의도 없이 무턱대고 아메리카로 떠났다. 이들이 6개월 만에 간신히 버지니아 해안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50여 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제임스타운 정착촌에 흡수되어 청교도 공동체의 정체성을 살리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편 청교도 지도자들은 본격적으로 신대륙 여러 곳을 대상으로 이주지를 물색했다. 그들은 여러 해 전 개척을 시작한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가장 매력 있는 곳으로 보았으나 너무 성공회 중심인 영국본토의 복제판이라는 인식 때문에 제외했고 이미 런던 회사가 상당한 토지를 확보하고 있던 뉴욕 허드슨 강 어귀를 목표로 삼았다. 이곳은 제임스타운 버지니아 식민지와도 가까웠을 뿐 아니라 군사적, 경제적 이익도 극대화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와중에 레이던에서 인쇄업을 하던 윌리암 브루스터(1566-1644)가 성공회를 비난하는 인쇄물을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제임스 1세가 격노(激怒)하는 일이 발생했다. 영국정부는 네덜란드에 브루스터를 송환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재정담당자 토마스 브루어가 체포되어 영국에 송환되고 재판에 넘겨지자 청교도들은 미국으로의 출발을 서둘게 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을 위한 스페인과의 80년 전쟁도 청교도들의 이주를 서두르게 하는 요인이었다.

 

1620년 청교도들은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버지니아에 정착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고 제임스 1세 왕으로부터 조용히 떠나만 준다면 괴롭히지 않겠다는 언질도 받았다.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집단이주를 결정했지만 한 번에 모두 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각자 네덜란드에서 해 오던 생업을 정리해야 하고 개인마다 여행경비 마련 등 경제사정도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우선 이주준비가 끝난 신자들 중 젊고 건강한 세대를 위주로 선발대를 구성하고 윌리암 브루스터와 윌리암 브래드포드의 인솔로 출발하기로 했다. 영국에 송환을 요구당한 윌리암 브루스터는 우체국장 출신이었으며 젊은 윌리암 브래드포드는 브루스터로부터 청교도 신앙을 배운 사람으로 네덜란드 레이던 청교도 공동체에서 강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선발대에서 제외된 다른 레이던 청교도들은 로빈슨이 이끌도록 했다.

 

 

 

Mayflower_replica.jpg

메이플라워호를 재현한 복제 선박 www.en.wikipedia.org

 

선발 이주자들은 각자 개인적인 정리와 출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본격적으로 물자와 두 척의 선박을 마련했다. 이들이 준비한 약 80톤 규모의 작은 배 스피드웰 호은 이들과의 연간 계약에 따라 네덜란드에서 잉글랜드로 승객을 데리고 와서는 첫 해 동안 고용된 선원과 함께 지원업무를 담당하고 그 후에는 미국에서 고기잡이를 할 예정이었다. 이보다 큰 180톤 급의 메이플라워 호는 신대륙에서의 탐험과 생산품 수출을 위해 임대되었다. 1620722일 스피드웰호는 30여 명의 레이던 청교도들을 태우고 영국 사우스 햄턴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합류한 메이플라워호와 투자자들에 의해 모집된 또 다른 식민지 정착민들을 만났다. 이들 간의 최종합의가 이루어져 이민단은 85일 출발했다. 그러나 출발직후 스피드웰호가 물이 샌다고 하여 두 배는 데이븐의 다트머스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곳에서 배를 수리하고 출발했지만 선주는 배의 상태가 불안하다고 판단해 데이븐의 플리머스까지만 그들을 데려다주고 배를 매각했다. 이후 선원들이 고의로 누수(漏水)시켜서 연간계약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탔다. 또한 스피드웰호가 항해를 포기하는 바람에 그 배에 실렸던 승객과 물자가 모두 메이플라워호에 합쳐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121명의 승객 중 102명만 타게 되었다. 이 중 청교도들이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해 전체의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따라서 청교도들이 배의 주도권을 잡고 상륙에서 정착까지 차질 없이 통솔하여 청교도 공동체를 신대륙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청교도들이 아닌 사람들도 신대륙 생존을 위해서는 청교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162096일 영국 플리머스항을 출발했다. 배는 한동안 순항했으나 대서양 한복판에서 폭풍을 만나 선체에 금이 생겨 간신히 목재를 덧붙여 수리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66일 간 항해 중 선원 한 명과 승객 한 명이 사망하고 한 아이가 태어나 이름을 대서양을 뜻하는 오셔너스(Oceanus)라고 지었다. 드디어 119일 육지가 보이고 청교도들은 일제히 윌리엄 브루스터의 인도로 감사기도와 찬송가를 부르며 기뻐했다. 그들은 이후 13일 간 당초 계획했던 허드슨 강 하구로 가려고 시도했으나 모래톱과 거센 해류를 만나 1121일 현재의 프로빈스항에 닻을 내렸다. 메이플라워호는 폭풍과 항로이탈 등으로 지연 도착한데다 계절이 겨울로 바뀌었기 때문에 케이프코드에 머물면서 배 안에서 월동하게 되었다. 이들은 겨울동안 탐사대를 구성하고 뗏목을 만들어 해안지역을 정찰했다. 탐사대는 육지에서 원주민과 유럽인들이 지어놓은 오래된 건물 몇 채와 최근 경작한 밭을 발견했다. 또한 원주민들이 숨겨놓은 옥수수와 콩 등 식량을 배에 가져 왔고 다음해 파종할 옥수수 알갱이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해 숨겨두기도 했다.

 

청교도 지도자 윌리암 브레드포드는 당시 상황을 탐사대는 인디언 집 두채를 발견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를 발견했지만 사람들은 도망가서 보이지 않았다. 탐사대는 더 많은 옥수수와 도토리, 다양한 색깔의 콩을 찾아냈다. 이것은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와 위대한 자비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년에 파종할 옥수수씨를 얻게 되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굶어죽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다음 파종기까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12월경에는 선원과 승무원 모두 병이 들어 심하게 기침했다. 많은 이들이 괴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렇게 첫 겨울에 그들 중 절반이 사망을 했다.”고 기록했다. 탐사대는 여러 차례 정찰 끝에 원주민들이 보관한 약간의 식량과 씨앗을 구했으며 플리머스 해안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항구를 찾아 밤에 상륙했다. 그들은 클락스 아일랜드에서 휴식과 탐사선 수리를 위해 이틀을 머물렀다.

 

16201221일 탐사대는 육지를 가로질러 정착지가 될 곳을 조사했다. 매사추세츠 주는 이날을 플리머스 바위에 청교도들이 첫 발을 내디딘 선조의 날’(Forefathers' Day)로 기념하고 있다. 이 땅은 이미 원주민들에 의해 정돈되어 있었고, 높은 언덕이 방어에 적합하고 날씨가 모질지 않아 겨울철 건축도 가능했다. 왐파노아그 부족에게 파투세트로 알려진 이곳은 3년 전 전염병으로 주민들이 몰사한 곳이다. 전염병은 유럽 중개업자들에 의해 퍼진 천연두로 추정되고 있다. 청교도들은 이곳에서 버려진 원두민 가옥에서 묻히지도 않은 채 뒹구는 해골을 목격했다. 따라서 정착민들은 아무 저항 없이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탐사대가 배에 돌아온 후 그때까지 생존한 승객들은 물자를 해안으로 운반하는 등 정착촌 건설을 준비했다. 특히 독신 남자들은 남은 여자들과 가족을 만들 것을 명령받았다. 세대별로 땅 필지가 할당되었고 각자 자신들의 주거지를 지었다. 기본적인 정착은 2월초 거의 끝났다.

 

그러나 메이플라워호 승객들은 당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들이 배에서 걸렸던 병으로 상륙 당시에는 53명만 생존했다. 선원들도 절반이 죽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갔을 때는 불과 몇 명만 스스로 식사하고 다른 것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초대지사 존 카버도 배안에서 죽었다. 생존자들은 후임으로 윌리암 브래드포드를 선출했다. 이들은 원주민들에게 약점을 감추기 위해 죽은 사람 무덤을 표시가 나지 않도록 현재 플리머스 교회(First Parish Church) 뒷산에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초기 정착민들의 생사를 뛰어넘는 고통은 그들을 더욱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켰으며 이곳에 올 때까지 청교도들의 유별난 신앙생활을 못마땅해 하던 일반 정착민들도 자연스럽게 청교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이 간신히 정착촌을 만들었을 때인 1621316일 한 명의 원주민이 나타났다. 원주민은 경계심을 품고 지켜보는 백인들 앞에서 유창하지는 않으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Welcom Englishman"하고 인사했다. 과거 이곳을 타마했던 영국 탐험대와 대구잡이 어부들에세 틈틈이 영어를 익힌 사모세트(1590-1653)였다.

 

이날 일단 인사만 하고 돌아간 그는 이틀 후 스콴토(1585-1622)라는 영어가 유창한 다른 원주민을 데리고 나타났다. 스콴토는 백인 노예상인이었던 토마스 헌터에게 납치되어 스페인에 노예로 팔렸다가 가톨릭 신부의 도움으로 해방되어 런던에서 몇 년 간 살다 탐험대 안내자로 아메리카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청교도들은 322일 이들 덕분으로 왐파노아그(Wampanoags)족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원주민들은 이미 영국인들에 익숙했으며 오래 전부터 백인들과 교역해 왔다. 다만 또 다른 원주민 피쿼트족은 몇 년 전 노예상인 토마스 헌트 일당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백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정착민들을 싣고 왔던 메이플라워호는 배 수리를 마치고 생존 선원들과 함께 그해 415일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원주민 대추장 마사소이트는 청교도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굳게 지켰다. 그때부터 청교도들은 이들의 도움으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원주민들이 백인들에게 물고기를 잡고 옥수수와 다른 농작물 재배법을 가르쳐 주어 백인들은 연명할 수 있었다. 10월 첫 번째 추수 후 정착민들은 파티를 열고 원주민들을 초대했다. 참석자는 정착민 53, 원주민 90명이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원주민들의 추수감사제 전통에 따라 사흘간이나 축제를 벌였다. 원주민들은 이들 축제에 야생 칠면조와 옥수수, 감자 등을 가져 왔고 이는 미국 추수감사절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윌리엄 브래드퍼드 지사는 이날을 감사의 날(thanksgivisng day)’로 선포했다. 추수감사절 기원인 셈이다.

 

청교도 정착민들과 현지 원주민들의 평화는 식민지 영토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백인들에 의해 몇 년 후 깨어지고 만다. 청교도들은 왐파노아그족과 맺은 평화우호조약을 원주민 땅을 자신들이 얼마든지 소유하고 정착해도 좋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사유 개념이 없던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자신이 세운 정착촌에서 얼마든지 평화스럽게 경작하고 교역하자는 것이지 자신의 마을까지 침범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백인들은 계속 영국에서 이민단이 도착하고 인구가 불어나자 1630년 인근 매사추세츠족 마을에 진출했다. 백인들이 가져 온 천연두에 면역능력이 없던 매사추세츠족은 거의 전멸했다. 또한 백인들은 1636년 백인 한 명이 살해된 것을 빌미로 피쿼트족 마을을 습격하어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이미 이때 청교도들은 대포와 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거침없이 공격을 자행했다.

 

한편 이들과 평화협정을 맺은 왐파노아그족은 백인들이 다른 원주민 부족과 충돌할 때도 끝까지 중립을 지켜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대추장 마사소이트가 죽고 아들 메타코벳이 뒤를 잇자 그는 백인들의 원주민 부락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을 조약에 대한 심각한 위반으로 단정하고 이를 불평등조약으로 규정한 후 인근 다른 부족들과 연합하여 1675년 플리머스 정착촌을 공격했다. ‘필립왕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2년동안 계속되어 양측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최신무기로 무장한 백인들의 식민지 확장은 거침이 없어졌다. 뉴잉글랜드 원주민들은 계속 백인들의 인종학살 정책에 밀려 이제는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 등 정체성을 거의 상실하고 몇 군데 보호구역에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박물관을 나와 초창기 정착민들의 무덤이 있는 플리머스교회 뒷산을 찾았다. 공동묘지에는 몇 백 년 간 묻힌 많은 사람들의 묘지가 비석과 함께 있는데 초대지사 존 카버와 윌리암 브레드포드를 비롯한 초창기 청교도들의 무덤은 비문의 글이 닳아 해독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단지 간단한 표지판과 작은 철책을 두른 것이 일반 묘지와의 차이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성역화한다고 크게 단장해 놓았으리라 생각된다. 유적지 고분(古墳)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과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이들의 철학은 본받을 만하다. 나는 묘지에서 나와 부둣가에 있는 플리머스 바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미니어처 세트처럼 만들어진 건물 안에 보존된 바위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청교도들이 첫발을 내디뎠다는 이 바위에는 ‘1620’이라는 글씨만 새겨져 있었는데 4백 년 가까이 바위도 많은 수난을 겪었다. 독립전쟁 중 이 바위를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이곳으로 옮겼는데 바위가 두동강 났다. 사람들은 이것이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셈이다.

 

또한 지난 2000년에는 매사추세츠 원주민 후손들이 백인들의 원주민학살에 항의하는 의미로 이곳에 세 트럭분의 흙을 쏟아 바위를 묻어버리기도 했다. 당시 실제로 이 바위가 청교도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청교도 정착민 상륙지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른바 청교도정신이라는 것을 미국의 건국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으로 보인다.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들로 미국을 건국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전설이다. 이들보다 수 십 년 먼저 아메리카에 발을 내디딘 무명의 개척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파이오니어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닿았을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이나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상륙지점에는 무슨 상징적 표시가 세워져 있을지 궁금하다. 이밖에도 플리머스에는 당시 청교도 정착마을과 원주민 왐파노아그 마을을 재현해 놓은 민속촌이 건립되어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고 있다. 다음 번 글에서는 청교도들과 관련된 추수감사절의 바른 역사에 대해 좀 더 알아 볼 것이다.

(2014.11.6 뉴욕 虛壙)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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