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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무덤(허광)’ 장기풍은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으로 15년 간 재직 후 은퇴하여 지금은 방랑여행과 글쓰기로 소일하고 있다. 미국 46개주와 캐나다 10개주 멕시코 쿠바 에콰도르 및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배낭여행했다. 특히 원주민지역 문화와 생활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14년 봄에 70일간 조국을 배낭여행했고 2017년 가을엔 45일간 울릉도와 남해안 도서를 배낭여행했다.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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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의 가을(2)

아카디아 국립공원 단상
글쓴이 : 장기풍 날짜 : 2020-10-29 (목) 20:26:35

아카디아 국립공원 단상

록펠러, 악명높은 사업가에서 자선사업가로 

 

 

어느 새 가을이 무르익었다. 10월 첫째 주말 롱아일랜드 베다 씨 부부와 함께 메인주 아카디아 국립공원을 다녀왔다. 단풍이 절정인 아카디아 공원 캐디락 마운틴 정상에서 맞이한 일출은 장엄했다. 한국의 다도해(多島海)와 같이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바다 수평선에서 시뻘건 불덩어리가 치솟는 태양에서 사람들은 경건함마저 느낀다. 미국 본토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본다는 이곳의 장엄한 광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몰려들어 분주했다. 23일 동안 우리는 고깃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랍스터를 잡는 것을 보고 고래들이 뛰노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 하얀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뉴욕, 뉴저지 등 동해안과 달리 이곳 아카디아 해변은 층암단애로 이루어진 거친 바위 해변으로 한국의 제주도, 추자도 또는 거제도 해금강 해변을 연상케 한다. 모래해변이 드물다보니 손바닥만 한 모래사장이 있는 샌드비치가 공원 내 관광명소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이다.

 

6천 여 개에 달하는 수많은 호수와 섬 그리고 방대한 면적의 구릉이 어울려진 이곳은 원래 프랑스 사람들이 개척한 곳으로 1763년까지는 캐나다 퀘백 등과 함께 프랑스 영토였다. 1600년 대 초 프랑스 탐험가 사무엘 샴플래인이 이곳을 발견한 후 프랑스 사람들이 이주하여 아카디아라는 이름으로 살기 시작했다. 1763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북아메리카에 대한 패권을 놓고 벌어진 7년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파리 강화조약에 의해 프랑스는 캐나다와 미 동부의 영유권을 영국에 양도한다. 그 후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영국에 승리하면서 메인 지역은 비로소 미국의 일부가 되고 1820년 미국의 23번 째 주가 되었다. 아카디아 국립공원 안내서에 따르면 이 지역은 5백 만 년 전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대륙의 충돌로 융기된 애팔라치안 산맥이 생겼고 아카디아 해안지역은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시대 때 덮고 있던 두터운 얼음층이 녹아내리면서 수많은 협곡과 호수 그리고 거칠고 복잡한 해안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19세기 말까지 단순히 어업과 벌목의 중심지였던 메인주는 지금은 미국 전체 불루베리 생산량의 99%를 차지하고 있으며 역시 미국 전체 생산량의 90%에 달하는 4천 만 파운드의 랍스타를 어획한다. 또한 미국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의 목재와 낙농업 그리고 사과, 감자, 옥수수, 메플시럽 등 다양한 농산품으로 인구 133만 메인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Pine Tree State’라는 별명을 가진 메인주는 자동차 번호판도 다양해 'Vocation Land', ‘Lobster' 또는 ‘Pine tree' 등 관광과 산림, 휴가, 랍스타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다. 겨울철 혹한만 없다면 우리 같은 늙은이도 살만할 것 같은데 마땅한 직업이 없으면 한국 사람들은 꽤 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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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디아 국립공원 www.en.wikipedia.org

  

 

1929년 미 동북부 유일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아카디아는 메인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대부분 찾는 곳이다. 아카디아 국립공원은 메인주 대서양 연안에서는 가장 큰 섬으로 교량으로 본토와 연결된 길이 15마일 폭 8마일 정도에 1만여 주민이 살고 있는 마운트 데저트 아일랜드에 자리 잡고 있다. 공원 내에는 해발 466미터(1530피트)의 최고봉 캐디락 마운틴과 2백에서 4백 미터에 이르는 여러 산봉우리와 많은 호수들이 섬 가운데를 깊숙이 가로지른 솜스해협과 어울려 호수와 바다를 구별하기조차 어렵다. 상수도 수원지(水源池)로 이용되는 이곳 호수들은 물이 무척 깨끗하고 맑다. 따라서 아카디아 국립공원은 햇빛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빽빽이 들어선 침엽수의 밀림과 호수, 바다 그리고 랍스타 등 풍부한 해산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미 동부지역 최대의 명소이다. 주정부는 이곳 연안에서 아직까지 질병에 걸린 고기를 발견한 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우리는 국립공원 레인저의 안내로 골햄 마운틴 해안 2마일을 걸었는데 레인저는 바위에 붙여놓은 록펠러 주니어에 대한 감사 동판을 가리키며 그가 1917년 사재를 털어 산과 해안과 숲 속을 사방팔방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58마일에 달하는 트레일 코스를 건설하여 기증했기 때문에 지금 공해에 찌든 도시민들에게 환상적인 삼림욕 장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보와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트레일 코스는 여러 개의 무지개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나는 6킬로에 달하는 졸단 호수 둘레를 걸으면서 지금까지도 악덕기업가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이미지가 함께 내려오고 있는 록펠러 가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곳에 아름답고 쾌적한 트레일 코스를 건설한 존 D. 록펠러 주니어(1874-1960)는 스탠더드 오일의 설립자 존 D. 록펠러(1839-1837)의 다섯 번째 자녀로 외아들이다. 록펠러는 지금까지도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인류역사 이래 최대 부호이다. 뉴욕 태생인 록펠러 주니어는 로드아일랜드의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투자자로 이름을 떨치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록펠러 가문을 이끌었다. 그는 생전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공익을 위한 기부와 자선사업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록펠러 1세도 1890년 명문 시카고 대학을 설립하는 등 재산의 사회 환원을 위해 나름대로 힘써 왔다. 록펠러 주니어는 아버지와 함께 1901년 록펠러 의학연구소(훗날 대학교), 1902년 일반 교육원을 세웠으며 1913년에는 록펠러 재단을 설립했다. 특히 그는 1926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6800만 달러를 기부해 버지니아 주 식민지 수도였던 윌리엄스버그를 완전 복원(復元)했다.

 

식민지 시대 청사와 공공건물 등 88개 건물과 500개의 구조물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정원과 공원을 조성해 지금까지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역사교육의 명소가 되고 있다. 또한 그는 뉴욕시 빈민들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을 건설하고 리버사이드 교회와 현대미술박물관을 기증했다. 그는 1930년대 맨해튼에 록펠러 센터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인과 가족을 돕는 연방봉사단을 창설하는데 크게 기부했다. 지금의 U.N본부 대지도 그가 기증한 것이다. 또한 록펠러는 1958년 뉴욕 링컨센터 건설에도 5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록펠러 가문의 공익과 자선사업은 5대 째 내려오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방글라데시에서 그라민 재단을 세워 자립의지가 강하면서도 종자돈이 없어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빈민들에게 소액의 신용대출을 통해 노점상이라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미소금융(Micro Credit)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해 적자가 나면 록펠러 가문에서 채워 넣지만 가난한 이들이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신용도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두움이 있게 마련이다. 음양의 원리다. 인물도 마찬가지다. 이같이 공익과 자선사업에 많은 공헌을 한 록펠러 가문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업인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한국의 많은 개신교에서는 그를 십일조를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훌륭한 신앙인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가난한 변두리 출신의 록펠러가 경건한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철저하게 주일과 십일조를 지키고 담임목사에게 충성을 다한 결과 하느님의 축복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목사와 부흥사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십일조의 축복을 강조하면 할수록 이른바 교회의 부흥도 앞당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를 악덕기업인의 표본이자 현대에 만연하는 천민자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범죄자라고 평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20세기 미국의 가장 중요한 기자로 선정된 여류 언론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설립 이래로 공정하게 경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썼다.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도 록펠러의 재단설립에 대해 아무리 재산을 많이 기부한다 할지라도 그의 악행을 덮을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시 야비한 수법으로 미국 석유산업의 95%를 독점해 시장 질서를 교란하며 돈을 벌었다. 또한 그는 폭력배를 동원해 노조를 탄압하고 잔인하게 상대 회사를 파괴했다. 록펠러는 뇌물과 사보타주로 다른 기업들을 사정없이 공격해 무너뜨리는가 하면 오직 상대 정유기업을 망하게 하기 위해 석유를 원가 이하에 판매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가 기업을 운영하면서 학살자(虐殺者)’라는 오명을 쓰게 된 계기는 1914420일 발생한 콜로라도주 루드로 학살사건 때문이다. 당시 록펠러 소유인 광산회사에서 하루 1달러 69센트의 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이 쟁의를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어린이 11명과 여자 2명을 포함한 노동자 50여 명이 죽은 사건이다. 당시 록펠러 회사 측은 매년 2만 달러를 들여 탐정, 프락치를 고용해 한사코 노조설립을 막았다. 노조를 설립한다는 이유로 해고되어 사택에서 쫓겨난 전체의 70%에 달하는 1200명의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은 한겨울에 루드로 마을에 텐트를 치고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이 6개월간 이어가자 록펠러측은 조직 폭력배들을 구사대로 고용해 주방위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이들에게 기관총을 쏘아 학살한 것이다. 이들 노동자들의 요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다.

 

이들은 1. 노조를 협상 당사자로 인정할 것. 2. 임금 10% 인상에 해당하는 채탄 가격 인상. 3. 하루 8시간 노동법 준수. 4. 철로부설, 침목작업, 잡석제거 등에 들어간 노동도 임금에 포함시킬 것. 5. 채탄된 석탄무게를 측정할 때 노동자도 입회시킬 것. 6. 회사 매점 외 다른 상점도 이용할 수 있게 할 것. 7. 콜로라도 주법을 지킬 것.(광산 안전규칙 엄수, 회사 내에서만 통용되는 전표 폐지)와 구사대 폐지 등이다. 당시 하루 8시간 노동 요구는 이미 1898년 노동법으로 제정되었으나 록펠러 광산에서는 그때까지도 이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구사대(구사대) 폐지 요구를 보면 최근까지도 한국의 노동쟁의 현장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구사대의 역사가 미국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록펠러 회사에서는 아예 제도적으로 폭력배를 동원해 노동자들의 쟁의(爭議)를 짓밟았던 것이다. 이들의 요구사항을 보면 한마디로 당시 노동법을 제대로 지키라는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회사 측의 무력진압으로 여자와 어린이들이 희생되자 그들도 무기를 들어 대항했다. 이들의 투쟁은 열흘이나 지속되었다. 또한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 벌어졌다. 한편 당시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단순한 노동쟁의 하나가 갑자기 대규모 유혈사태로 변모하자 즉각 연방정부군을 급파하여 양쪽 모두 무장해제 시키고 대통령에게 직접 사태를 보고하도록 했다. 대통령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을 투명하게 조사하는 한편 록펠러를 청문회에 세웠다. 그 때만해도 록펠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치지 못하고 이건 학살이 아니다. 파업 노동자들의 위협에 겁먹은 두 개의 작은 무장단체의 절망적인 전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살된 여자와 어린이들은 없었다. 희생자가 발생한 점은 유감이지만 법과 재산을 지키려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강변했다. 조사위원회는 2년 후 120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채택하고 당시 노동자들이 주장했던 요구사항들에 손을 들어주었다. 대기업가에서 학살 책임자로 몰린 록펠러도 비로소 자신의 경영가치관을 바꾸게 된다. 물론 그가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언론의 집중적인 몰매를 맞고 정신을 차린 것인지는 모른다. 그는 19159월 노동자들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동반자입니다. 자본은 여러분들 없이 살아나갈 수 없고 여러분 역시 자본 없이 살아나갈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자본과 노동이 함께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여러분의 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광산에서 우호적으로 함께 해 나가고 있습니다.” 라고 연설했다. 록펠러는 비로소 노동자들을 사업의 동반자로 인식한 것이다. 많은 록펠러의 평전 작가들은 루드로 학살사건이 그를 이익만 추구하는 사업가에서 자선사업가로 탈바꿈하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870년대부터 그때까지 록펠러 가문의 기업운영 방식은 정부관료 매수, 기업매수, 리베이트, 독점, 상대 회사에 대한 영업방해, 구사대를 동원한 노동운동 탄압, 온갖 방법을 동원한 문어발식 인수합병 등으로 몸체를 불려나갔다. 당시 그는 지금의 한국 재벌들처럼 40여 개 회사를 거느리고 트러스트를 형성해 미국 석유생산량의 95%를 독점하여 돈을 긁어모았다. 록펠러는 1911년 반독과점법에 의해 자신의 트러스트가 몇 십 개 정유회사로 강제 분할된 후에도 여전히 보유주식을 통해 석유산업을 장악해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창업자 록펠러 1세가 1937년 죽을 때 재산은 지금의 빌 게이츠보다 3배 이상 많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계산하기를 좋아하던 어떤 목사는 그의 재산에 대해 아담이 낙원에서 추방된 후부터 매일 500달러씩 저축해도 록펠러의 재산만큼은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분할된 엑손모빌 같은 정유회사는 지금도 전 세계 석유산업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긴 당시 철광왕으로 록펠러 다음의 부를 이룩한 카네기도 기업운영 방식이 록펠러와 별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불법을 동원한 기업 인수합병과 노조탄압 등으로 악명을 날렸다. 이것이 당시 미국의 자본주의 성장기 행태였다.

 

나는 당시 록펠러나 카네기 등 미국 자본주의 성장기 기업들의 행태를 보면서 지금 한국의 삼성, 현대, LG 등 재벌들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을 느낀다. 미국보다 1세기 이상 뒤떨어진 한국 자본주의 역사는 지금 백 년 전 미국의 행태를 그대로 닮아가는 것 같다. 문어발식 기업 확장은 물론이고 주요 상품의 독과점도 모자라 재벌들이 이제는 골목 상권까지 진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의 쏠림 현상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즉 부익부빈익빈 현상이다. 며칠 전 한국 뉴스를 보니 최근 국세청이 국정감사 자료로 제출한 통계는 상위 1%가 대한민국 전체 배당소득의 72%, 이자소득의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상위 10%로 확대해보면 배당소득의 93.5% 이자소득의 90.6%를 가져간다고 밝히고 있다. 이쯤 되면 가히 싹쓸이 수준이다.

 

또한 자본소득은 근로소득에 비해 규모도 크거니와 세금혜택도 많다고 하니 대한민국 자본주의는 부자들만의 잔치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한쪽에서는 삼성공화국이니 재벌공화국이니 하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몇 개 재벌이 대한민국 GDP의 몇 년 치를 유동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최근 현대자동차가 강남 한전부지를 매입했는데 땅값만 10조 원이라고 한다. 달러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100억 불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전력을 독점하는 한전의 총자산이 22조 원이라고 하니 도대체 재벌들이 가진 돈이 얼마나 많기에 몇 조 원이 쉽게 오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부의 쏠림 현상을 방치한다면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기에 더욱 걱정이 된다. 세계 최고 부자 87명 소득이 전세계 저소득층 35억 명의 소득과 같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가들은 먼 옛날 로마제국 때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전통이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어 자본주의의 병폐를 어느 정도 걸러주고 있다. 지금도 미국의 박물관, 음악당, 도서관 등 웬만한 공공시설에는 이들 대자본가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미국의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도 자기 재산을 자녀들에게 남기지 않고 몽땅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전통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 엄밀히 말해 부자들의 재산은 사회에서 나오는 것이고 서민대중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마음껏 즐기되 결국에는 사회에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맞다. 재산을 대물림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행복한 일이 아니다. 삼성을 보라, 현대를 보라, 부자들 집안은 형제간 재산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는 것이다.

생전의 록펠러는 기업인으로서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서슴지 않았다. 그는 술도 여자도 별다른 취미생활도 없이 종일 집무실에 앉아 돈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부를 안겨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98세까지 장수한 록펠러는 그를 증오하던 세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자 독실한 신앙인이자 건실한 사업가라는 이미지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로 거듭났다. 어쨌든 나는 록펠러가 건설하여 기증한 아카디아 숲속 길을 활보하면서 행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약 신명기 구절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창녀로서 몸을 팔아 번 돈이나, 수캐짓을 하여 번 돈을 어떤 서원제로든지 너희 하느님 야훼의 전에 가져 올 수 없다. 이 두 가지 모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이다.”(신명기 23:19) 그러나 어찌하랴. 이것이 우리네 인간역사인 것을. 우리는 다음날 아침 매사추세츠 세일럼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차로 4시간 거리다.

 

(2014.10.18 뉴욕 虛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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