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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밭에서 이삭줍기 ‘토공이삭’

지피지기 백전백승?
글쓴이 : 김태충 날짜 : 2020-03-24 (화) 0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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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

No!

진짜 원 문: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출처: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편(謀攻篇)

 

==>적 또한, 우리 전력을 파악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기 때문에, 적군도 백전백승한다는 얘기가 되므로, 손자가 자신의 병법서에서 이런 모순을 언급했을 리 만무. 적군의 전력을 파악하고 우리 전력을 제대로 평가한 뒤 전쟁에 나서면, 위태로운 일은 피할 수 있다는 뜻인데,원문과 다르게, 그냥 말하기 편하게 백전백승으로 둔갑한 것.

 

참고 : 리순신 장군이 왜놈들과 맞짱 뜰 때 기록한 <란중일기亂中日記>가 그 둔갑의 발생지라는 일부 주장. 숫자가 적은 우리 해병으로 겁나 많은 왜놈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서, ‘백전백승의 각오를 강조했다는 설명. 난중일기엔, “지기지피 백전백승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손자 원문과 다르죠?

 

*손자 : 지피지기 백전불태

*충무공 : 지기지피 백전백승

 

충무공이, 손자병법의 원문을 모를 리 없기에 막강화력의 왜놈들과 맞서 병사들의 사기진작-임전불퇴-사생결단-필승의지를, “백전백승이란 네 글자에 담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더군요.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공자: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No!

진짜 뜻:지나침과 모자람은 똑같다.

<출처: 논어論語, 선진 편 先進扁>

 

오히려 모자란 것이, 지나침보다 아주 쬐애~끔 낫다는 식의 해석도 있을 만큼, 의외로 그 원뜻이 구부러진 대표적 사자성어로 보이는군요. “중용中庸을 강조한 말씀이라는 해석이 있더군요.

 

예수: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No!

진짜 뜻: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말씀이라고 합니다.(Not difficult but impossible)

출처: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 =>신약 마태복음 1924(New Testament, Matthew 19-24)'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죠? 부자의 천국행은, 그 가능하지 않은 낙타바늘귀통과보다 더욱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좇는 그리스도교 사람들은, 부자되는 것을 호환마마보다 더 두려워하여, 부자 소리 듣지 않도록 돈이 많이 모이기라도 하면, 앗 뜨거!!! 하면서, 못 먹고 못 배우고 병들어 신음하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재빨리 써 버려야 천국행 입장권을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삼십여년 평생을, 부자동네 부자집엔 발길도 들이지 않은 채, 가난하고 헐벗고 못 배우고 병들고 귀신들려 고통으로 신음하고 통곡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생생한 말씀입니다.

 

근데 왜 기독교인 가운데 이 말씀을 충격과 공포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일까요? 받아들이기 곤란한 말씀은 비유의 말씀이라고 피해가면서 말이죠.

 

왜 예수는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부처와 공자가 그랬듯이, 생업을 하지 않고 자신이 깨우친 진리 설파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예수도 그의 설법 여행과 생활을 위해 부자 제자들에게 의존했지요.)

 

제 짧은 소견으로, 예수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부자/권력자들은 권력을 믿습니다. 돈 없고 힘 없고 빽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현실의 막막함과 답답함과 곤란함 때문에 , 주여!”를 신음처럼 내뱉으며 절대자에 의지한다는 점을, 예수님은 이미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겁니다. (but, 그 곤란함이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듯,하나님과 또다시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얕은 심리라는 점 또한 너무 잘 알고 계셨지요. 부처 공자 그리고 예수, 인간심리학의 대가 및 지존이십니다.)

 

 

글 김태충 | 재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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