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과 굴종에 너무도 익숙한 사람들

6월24일 1977년
꼭두새벽, 깨우는 소리에 잠을 깨다. 노야를 만나는 행복한 꿈이었는데. 갑자기 현실이 차겁게 나를 짓누른다. 이것이 꿈이었다면, 그 꿈이 도리어 현실이라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새벽부터 땀을 흘린다. 나는 지금 정오의 한낮에 보초를 서고 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 박격포 부대원들. 처음으로 얼굴을 대하는 그들.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할 동료들이다. 새벽에 땀으로 불어터진 그들의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집단이었기에 행복해 보였다. 이긴 자의 기쁨이 그들의 얼굴엔 있었다. 나를 처음 대하는 그들의 얼굴이 다리의 힘을 상실케한다.
선생일이 힘겹다던 나의 사랑. 노야 우리 이겨냅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떠한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너만을 위한 일이라면… 나는 방학을 노야와 있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6월25일 1977년
지금 변소에서 쓰고 있다. 새벽에 (4시경) 잠이 깬둥 만둥 잠을 설치다. 온 몸에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 노야도 이런 새벽을 얼마나 가졌으랴! 그러나 그녀는 강했다. 노얀 강해진 것이다. 벼개 섶을 못난 情人이 그리워 얼마나 적셨을까? 가슴이 미어진다.
노야 달려가고 싶구나 너에게로! 이런 새벽은 그대로 죽고만 싶다. 나도 강해야 한다. 노야처럼, 노야처럼. 속으로 너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사역을 하다. 오후에 종기 엄마가 면회를 와서 외출하다. 돌아오는 들길에 달이 밝았다. 그리고 맘 속의 노얄 생각하다.
6월26일 1977년
마치 논산 훈련소에 새로이 입소한 것 같다. 그동안 잊어버렸던 것 오늘부터 새로이 배워야 한다. 폭서, 폭서. 하늘엔 구름 한점 없고 땅에는 물기 한방울 없다. 논밭은 이미 갈라 터진지 오래다. 한발이 너무 심하다. 종일 맨발로 땅위를 걷다보니 발이 발갛게 익었고, 물은 마셔도 마셔도 갈증을 가셔주지 못한다.
언제나 고단한 병사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저녁놀을 바라보며 세수를 할 때이다. 그때는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의 운명, 나의 미래. 이 파란만장한 나의 시절, 이십 대에 너무나 많은 것을 겪은 듯 하다. 아니 이 5년간의 세월은 50년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재미있기조차하다. 나의 앞날을 흥미를 가지고 잠시 생각해 보다.
매일매일 같은 일의 연속. 변화없는 생활. 훈련 훈련 또 훈련, 작업, 작업 또 작업 이런 것의 반복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이건 나의 커다란 산 경험이다. 오늘은 종일 태권도, 조총 훈련으로 보내다.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이곳에도 노동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있다.
인간은 이렇게 연속적 반복의 생활과 타성을 견딜 수 있는 耐性을 군에서 배우나 보다. 이곳에선 권태를 오직 반복하는 일로 해결한다. 군은 지성과 사색을 요청치 않는다. 오직 팔과 다리의 힘만을 요한다. 나의 남은 생활 오직 노야를 위하여 팔 다리를 강하게 만드리라. 이것만이 나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노얄 힘껏 안아 주리라. 노야 그립다.
6월27일 1977년
온몸은 땀과 소금으로 성에가 낀다. 염천의 폭서에 온몸과 입술이 말라 터진다. 열기에 달아 이곳 저곳에 균열이 갔다. 농부의 한숨과 비명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벌써 한달 이상 한발이 계속된다. 하늘은 얌통머리 없이 푸르기만 하다. 고달픈 자와 대지는 모유와 같은 비를 갈증 속에서 기다린다. 지리함. 먼지, 먼지. 타박타박한 황토 먼지가 몸의 소금과 범벅이 되어 온몸을 아리게 한다. 들엔 모든 작물이 축 늘어져 있다.
작업은 하루에 12시간. 모든 성과는 소외된 자들의 노동착취에 의해서만 성립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눈알이 팽팽 도는 하루 일과. 졸병들은 소금을 씻을 시간조차 없다. 그들의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다. 높은자들, 상급자들의 요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다. 한국민은 복종과 굴종에 너무도 익숙되어 있다. 그들은 죽음의 대열처럼 움직여 줄 뿐이다.
마셔도 마셔도 물이 나의 갈증을 해갈해주지 못한다. 모두 동전을 모아 대포를 한잔씩 하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나는 고생과 고난을 조금은 사랑하며 예찬하는 사람 축에 끼인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겐 고난이 그렇게 괴로운 것이 아니다. 등은 벗어졌고 수포가 덮고 있다.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오전, 오후를 땅을 파고 돌아오고, 주어지는 2시간의 자유시간. 손발을 씻기, 편지쓰기, 기타 잡일, 이것이 고달픈 자들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나 이것이 박탈되는 날이 7일중 5일은 된다. 오늘도 밤 10시까지 훈련을 계속한다. 소금조차 씻지 못하고 모포 속에 들어 갔다.
옆에 누운 동료의 땀냄새, 악취가 내무반을 진동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디의 불평조차 박탈되어 있다. 아니, 그 마음상처를 느끼는 것이 박탈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말단 대대의 생활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순진하고 천진난만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 천국이 너희 것이다”는 언제나 진리다. 그들은 모든 것이 박탈되어 있으나 너무도 작은 일에 웃고 즐거워한다. 가엾은 자여 , 피곤한 자여 마음의 평안을…. 꿈속에서나 쉬어라! 꿈속에서 밤새껏 노얄 포옹하다. 차라리 깨지나 말 것을………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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