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에서 마지막 8일간의 일기

6월 20일 1977년
무어라고 또 말을 시작해야 할까? 이 글들은 노야와의, 나의 생명과의 대화의 시작이다. 그동안 책을 쓰느라 노야와의 대화는 1년여 중단 되었었다. 역시 내가 곤경과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숙명적으로 노야와의 맺어짐 대화는 깊어가고 새로운 생각이 중첩되는 것 같다.
노야! 나는 고통의 실에 의해 당신과의 만남의 추를 형성하고, 눈물의 내에 의해서 당신 위로 흘러 가는가 보구려.
이제 1시간만 있으면 나는 새로운 생활 어렵고 고된 새 장소로 떠나야 한다. 오늘 오전에 보통리에서 아버님, 누나, 노야에게 편질 써서 보냈다.
나의 이 고통, 아승지겁 전에도 내가 느꼈고 겪었다고 지금 느끼는 것은 이러한 고통이야말로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느끼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도 헤어짐, 떠남, 고해 그리고 안타까움에 떨며 지내지 않는가?
그들의 고뇌와 고통의 눈물이 지금도 저 하늘을 붉게 물들이지 않는가? 불교의 윤회설이 가르치는 것은 불이, 평등의 경지다. 모두가 느끼는 고통, 모두가 안고 있는 슬픔과 아픔의 편린들을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이 느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윤회를 아는 자는 不二의 자, 평등의 인간이다. 나는 이것을 알기에 지금 느끼는 슬픔과 고통은 내가 이미 수없이 가지고 왔던 하나에 불과할 진대 나는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도, 두렵지도 않다.
나는 오히려 역경을 차라리 사랑하련다. 노야와의 사랑이 나를 슬프게 할 때도 있고 가슴을 찢게하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나의 사랑이 더욱 뜨거워 가듯 나는 나의 시련을 사랑하련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리운 고운 나의 생명이 있기에 나는 용감할 수가 있다. 노야! 이제 곧 떠나야 한다. 떠날 시간이 되었다. 새로운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일어서자!
자기긍정 현세계 부정
왜 구도자들은 탈속을 필요로 할까?
그들은 현세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자가 인연을 끊는 것은 현세를 묶고있는 사슬 (수없이 고통이 반복되는것을 항시 초회적으로 받아 드리는 사슬)을 끊고 떠남으로써 고와 슬픔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위적으로 묶어놓고 조작해 놓은 인간집단의 사슬, 압제와 규율과 속박을 자유인은 못 견뎌한다.
• 현세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기긍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코 참된 자기긍정이 되려면 대승의 경지에 있어서이다. 싫고 떠나프고만 싶은 현세, 그래서 구도자는 매여 있는 것이 괴롭다. 하지만 일체중생의 제도를 그의 염원으로 할 때는 그는 즐겨 현세로 복귀한다.
여기에 환속의 참된 의미가 있다. 현세야말로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 구도자는 기피와 도피인 탈속이 아니라 개조하려고 돌아온다.
• 따라서 구도자의 행동양식은 현세를 부정한 뒤 개혁하는 것이며, 현세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기긍정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자 반항자는 진정한 자기긍정자이다.
• 현세를 부정하는 자만이 떠날 수 있다. 그것이 제1보이다.
그러나 떠나기만 하는 자는 참된 자기긍정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실을 아직 올바르게 부정하지 못함으로써 참된 자기긍정이 못되기 때문이다. 부정되지 못한 현실은 여전히 상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도자는 현실에 돌아와야 한다. 철저한 현실의 부정만이 참된
자기긍정을 실현할 수 있다. 이는 속박과 규율과 독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으로 통한다.
• 그래서, 이제 구도자는 현실로 돌아와 그 속에서 신음하고 괴로와하며 고통에 몸부림친다. 현실을 자기의 道場으로 하기 때문이다. 속인은 이것을 보고 그도 우리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출발점과 종착점이 겉으로 같다고 해서 그들이 같을 수 없다.
• 대승에서는 중생의 구제를 그가 행하는 투쟁의 수확으로 가진다. 대승에서야말로 자기완성(긍정)과 중생구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양자는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이다. 양자는 동일한 것이다.
참된 구도자의 자세는 이런 의미에서 대승이 될 수 밖에 없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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