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위보다 일병 계급장이 마음에 드오
3월 2일 화, 1976년
오늘 아침 일찍 연대에 다녀오다. 중대장이 중위계급장을 사오라 해서 사서
주고 오다. 나의 어깨에 달릴 뻔하다 만 것이나 나는 일등병 계급장이 더욱 마음에 든다. 우리는 대중 속에서 숨쉬어야 하니까 말이다.
3월 3일 수, 1976년
나는 지금 한개피 화랑담배를 피워물고 있다. 너무도 장엄하고 광활한 자연
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 저 탁 터진 강변, 한없이 뻗쳐진 모래사장, 땅
을 기어 가듯이 누운 강. 강 건너 조는 듯이 앉아있는 마을. 그리고 초봄의
볕이 내 등을 따사롭게 어루만지고 있다. 나는 총을 무릎에 뉘어놓고 산허
리에 앉아 아득한 들판을 내려다 보고 앉아있다.
오늘 비상이 걸려 이곳까지 달려와서 경계를 하고 있다. 노야와 같이 이 경
관을 노나 갖고 싶다. 산더미같은 하얀 구름이 산허리를 둘러싸고 있다. 어
느듯 내 팔에 날개가 돋아난다. 그리고 저 광활한 허공을 날아 강건너 멀리
멀리 날아 간다. 저 강 건너 노야가 있다. 내 사랑 내 생명. 저 모래밭 위에 서있는 점 하나 그것은 내 동료 작은 병사다.
오늘 연대에서 안 일인데 곧 포상휴가 상신을 하겠다고 하니 곧 휴가증이 나오겠지.
---사랑하는 마누라님!
당신이 출근하고 텅 빈 방에 코를 벌름거리며 당신의 체취를 맡다가 당신
사진을 찾으러 통을 열어 보니 우리 둘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와 내 일기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구려. 옛날 편지와 일기를 뒤적이다 보니 정말 세월이 우리에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준 것 같고 처음의 내 생활보다 지금의 생활
이 얼마나 복되게 여겨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실은 내가 그만치 면역도 생기고 한마디로 강해져 있음을 실감하겠구려.
그리고 둘이서 눈 내리던 날 찍은 사진을 보며 세월이 流水같음도 느끼오.
언제나 장하고 씩씩한 우리 마누라님 당신을 사랑하오. 노상하는 맣이지마는 건강해 집시다. 씩씩해 집시다.
하지만 우린 그 말대로 해오고 있었는 듯 하오. 내 생각컨데 오늘 퇴근해서
빈 방에 들어서면 눈물 많은 마누라님은 또 울적하시겠지만 내일이 되면 내 전화하겠고 또 시간이 빨리 가리라 생각되오. 그러면 또 만나지 않겠소.
이번 휴가는 정말 안락하고 즐겁게 보냈오. 볼수록 대견해가고 어른스러운
마누라님을 둔 졸병은 행복하여이다. 내 소제하고 당신이 계신 학교 교문까
지 갔다가 대구 갈려고 하고 당신이 학교 기둥에 기대서서 찍은 사진 가져
가오.
마누라님은 어떨 땐 막 투정부리는 애기같기도 하고 소년같기도 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가 마누라님이 보고싶고 꼭 안아주고 싶어 나도 모르게 벌
떡 일어났오만 당신은 지금 학교에 갔지 하고 다시 앉아서 쓰오.
혼자 빈 방에 이렇게 있으니 그 좋아하는 잠도 실컨 못 자고 게으름도 마음
놓고 못 부리고 학교 간다고 쫄랑쫄랑 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스
럽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미안해서 콧물이 조금 나는구려.
그런데 역시 직장생활을 하며 당신은 더욱 어른이 되었고 오히려 더 건강해
졌으니 이젠 막 쫒아 보낼거요.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날도 많이 있을거요,
그땐 아무 생각말고 푹 자오. 자고 나서 산보하고 작은 일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리고 당신은 너무 욕심쟁이이고 투정꾼인 것 같소. 이젠 좀 두둑한 뱃짱을 가지고 느긋하게 지내오. 그리고 하루하루 생활은 모쪼록 재미나게 보내고 알았소? 주말이면 이선생님 패들이랑 산보 등산도 가고. 정구도 치고 재미
있게 보내오.
그리고 책은 너무 벅차고 어려운 건 읽지말고 명작소설 같은 걸 읽으시고.
지독한 여자가 되어 주시기 바라오. 지금도 지독스럽지만 다부진 당신을
보면 왠지 졸병도 가슴이 우쭐해 진다오. 밥 부지런히 해먹고 적당히 운동
하고 써도 써도 한이 없을 듯하오. 보아도 보아도 그리운 님의 모습이오.
이제 그만 쓸려오. 우리 후딱후딱 해치웁시다.
마누라님 가자마자 편지 할께요.
지금 11시요. 설거지 하고 빨래 해놓고 차 타러 갈려오 빠이빠이
이제 세상보다도 더 크고 나의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마누라님만을 사랑하는 바보쫄병이 3월 13일 1976년, 승효.

---그리운 노야에게 (군사편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고 아쉽고 애타는 날들이었소. 어찌 되었든 또 시간이
흘러 이렇게 글을 띄우게 되었구려. 나는 건강하고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오. 노야의 모습은 더욱 훌륭히 변모되어 있어 기뻤소.
언제나 귀대 시간은 촉박하고 바쁜 걸음이라 가능하면 당신에게 들러서 올
려고 했다가 시간이 여의치 않아 노야가 서운했으리라 생각되오. 아직은 젊고
할일이 많은 우리들이니 우선은 아쉽고 안타깝고 외로울지라도 참고 견디며
또한 이겨나갈 용기도 있으리라 믿소. 항상 씩씩하고 장하신 노야이니 잘 참고 나가시리라 믿소.
그리고 내 학교 문제는 좋은 결말이 날 듯도 하니 우리 희망을 버리지 말고 견
뎌 내기로 합시다. 노야도 그저 하루를 즐겁게 보람차게 지내도록 하시기
바라오. 항상 몸이 소중함을 명심하여 자중자애하여 건강하시길 빌겠오.
안녕, 또 소식 전하리다. 승효.
---사랑하는 소년에게
오늘도 고달프나 가슴에 가득히 밀려오는 포만감을 안고 봄날의 저녁에 걸
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오. 아마 지금쯤 나의 첫 편지를 받고 기뻐하고 있으리라 믿소.
아직도 꽃샘 바람이 오싹 춥구려. 허나 이젠 완연한 새봄이오. 항상 소년이 멀리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가슴 벅찬 행복이오. 돌아오는
날 서울 작은 형은 퇴근하고 없고 큰형과 통화했소.
이젠 소년께서도 느긋하게 기다리는 자세로 나의 군생활을 볼 수 있는 지혜
가 생겼으리라 믿고 나 또한 이 생활을 덕성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생겼소. 그만치 우린 기성인이 되어간다는 증거이오.
그리고 세상이 평온해지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오.
희망을 안고 우리 지내기로 하오. 이번에 본 소년의 모습은 강인하고 원숙한 한 사람의 기성인을 보는 것 같아 위축되었더랬소.
항시 장한 나의 사람이오. 건강에 유념하시고 백묵가루는 되도록 마시지 않는 요령을 배우도록 하오. 그럼 안녕. 승효.
3월 20일 금, 1976년
사랑하는 님과 이별하고 떠나온 지도 1주일 오늘은 온 세상이 눈으로 덮혔
다. 이곳은 봄이 무척 늦다. 온몸이 오무라든다. 나는 입술을 베어 문다.
노출된 몸의 부분은 칼로 끊어내 듯이 차다. 강이 옆이라 바람은 몹시 차다.
영하 10도. 겨울이 다시 시작되는 듯하다. 나는 님의 이름을 가슴으로 부
르며 산을 오른다.
흰 눈을 뒤집어 쓴 산들이 빙산처럼 눈 아래 떠 있다. 소나무 잎새마다 한아
름씩 앉은 눈이 그대로 꽃이 되었다. 나는 설송화라 이름 짓는다. 온 산이 흰꽃으로 만발했다. 발 아래는 떨어진 꽃잎이 하얗다. 이곳 시골 병영의 야
산엔 때 아닌 설송화로 새 세상이 된다.
나는 멀리 산 너머 또 산 너머 내 사랑하는 이가 있는 쪽을 향해 선다. 그리
고 내 한 생명과 모든 것을 바친 그 님의 이름을 소중스레 부르며 산으로 산
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3월 21일 토, 1976년
눈이 계속 내린다. 마치 설국을 연상케하는 대단한 눈이다, 나도 저 눈밭에
한쌍 사슴처럼 노야와 구른다. 그 누가 사랑을 아픔이라 했던가. 그 누가
사랑을 애린의 상처라 했던가. 이렇게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이토록 누
리가 아름답게만 비치는 것을 ….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
3월 22일 일, 1976년
3.1 明洞성당사건으로 신문이 떠들썩하다. 타는 자유는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을 어이 저토록 무지막지하노. 문제가 된 사람은 2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도덕법칙에서 유래한 의무감에서. 다른 하나는 기
호나 경향에 의한 (명예등) 실용적 명령에 의해 움직인 이들로 내별할 수 있
을 것 같다.
이것은 순전히 칸트의 사고에 따른 유형일테지만 그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한
다. 나는 어느덧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실체가 되었고 오직 내 내면의 윤
리적 명열에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감을 스스로 느낀다. 그것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은혜다.
나는 한없는 열락과 희열에 빠져 요즈음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악마가 나에겐 항시 자리잡고 있으니 어이 기쁘지 않으리.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 도 다 읽었다.
이 한권의 책으로 얼마나 많은 지식이 나에게 흡수되었는가. 고귀하고 위대
한 인간에게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심심풀이로 데미안을 읽는다. 다 읽고나니 고등학교 시절에 그토록 감명깊던
책이 적잖이 유치함을 느낀다. 헷세는 일종의 신비주의자 정신이상자다.
좆도 아닌 것을 마치 신비한 베일처럼 쓰고 있으니 우서운 일이기 조차하다.
노야는 편지가 없다. 여러 통을 띄웠는데도 소식이 없어 걱정스럽다. 혹 아
픈건 아닌지 아니면 그 예민하고 다정다감하고 민감한 악마가 풀이 죽어 늘
어져 있는지 모르겠다. 제발 건강해 다오.
___사랑하는 노야에게
나는 잘 있소. 건강하고 성실하게 보내고 있소. 왜 그렇게 소식이 없소. 편지
를 아홉 통이나 보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오. 혹 병이라도 난게 아닌지 가슴을 조리오. 날 애타게 하고 기다리게 하는 건 잘못
하는 거요. 날래날래 글 주기 바라오.
매사에 대범하고 뱃짱도 있는 내가 왠지 노야 건강에 대해서는 안절부절 못하
는 걸 잘 아시지 않소. 사람을 좋아 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 할 건 못 된다는게 진리요. 하기사 노얀 매우 열정적이고 감성적이라 마음을 종잡을 수 없어 하는 줄은 잘 알고 있지만….
이상은 잔소리이고 편지 좀 해줘. 그리운 사람의 한 통의 글은 큰 기쁨과 새로운 기운을 부어 준다오.
노야처럼 신선하고 지독한 사람도 없소. 하지만 우린 지독한 사람이 되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오.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불 태우는 모습은 꼭 촛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예쁘니까. 지금 노야 생각하며 촛불을 보고 있소. 편지 좀
해주. 승효.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