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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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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34)

인간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다
글쓴이 : 현승효노천희 날짜 : 2021-07-13 (화) 05:33:55

인간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다

 

 12월 1일 월, 1975년


드디어 이 해도 한달이 남았다. 훈련에서 부대로 돌아오니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빨래. 군대 일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 언제가 되면 사람을 소모시키고 시간을 허비하는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고참놈이 또 지랄


을 한다.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처먹는 걸 잘 안 준다는 게 이유다.


밤에 집합을 당해서 모두 몇차례 얻어 맞다.



돌아온 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내 사랑 노야의 편지 3통. 밤에 급히 답을 하다. 소식이 없어 무척 궁금했겠지. 


그녀의 편진 언제 읽어도 신선하고 생명력 넘치는 기쁨이 있다.


 


돌아 온 첫날 부터 또 다시 내 뱃속엔 사르트르가 자리 잡는다. 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책이다. 


놈의 글은 해박하고 재치 있으나 좀 난해하고 조리가 없다. 그러나 美와 예술을 논하는 글이라 내게 필요한 것이 많다.



사물은 세계에 --저 고요한 안개, 검은 강, 푸른 하늘--그것을 드러내 보일 때 비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의식적 주체에 의해서 인식되기 전에는 영원한 침묵 속에서 잠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에 인간이 말을 걸고 표현하고 이름을 붙일 때 그것은 비로서 새로운 양태로 전개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자연과 우주 세계의 발견자다. 인간이 발견자라고 하면 


인간자신은 결코 본질적인 창조자가 아니라는 내적 확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인간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고 오히려 발견자이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와 창조활동에 있어서 자신을 우주의 본질적 실체라고 느끼게 되고 


또 그렇게 간주되기를 원한다. 이 본질적 실체에 대한 동경이 창작과 문학의 동기가 된다. 


이상이 놈의 창작동기에 관한 견해다. 재미있고 유익한 논설이다.



어떻게 재수가 좋으면 이번 달에 두번 휴가를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포상휴가를 못 가도 안타까울 건 없다. 


23일 나는 휴가를 출발하게 된다. 안녕 잘 자라 내 사랑아.


 


 


****보고싶은 당신에게


목욕하러 나왔다가 정전이라 당신이 인간미 있어 보인다 하는 이선생네 와서 드러누웠습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맑은 개울물에서 빨래하고 치우고 하며 부지런 떨었어요. 


빨리 당신이 와서 맛있게 밥해 멕이고 싶어요. 먹고는 나들이도 하고 사람이 안 다니는데서는 업히기도 하고.


 


눈꼴 사나운 것 없고 분통 터질 일 없는 그야말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살고 싶어요. 


당신의 능력과 빛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곳 그래서 불안해 하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고 자랑할 수 있는 곳.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곳, 그런 곳에서 활개치고 살고 싶어요.


 


나이 든 여선생들은 하나같이 인생이 무의미하다 그럽니다. 


뭘 하려고 사는지, 옛날의 열정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사랑을 하고 있는지, 사랑이 뭔지 


나무토막같이 무덤덤해져 간다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아니예요! 하고 막 부정하고 싶어집니다.


 


당신과 저처럼 사랑하고 늘 새로운 하루와 빛나는 내일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별로 보지 못합니다. 당신같이 남자다우며 생생한 사람도 없을거예요. 


한 밤중에 한 번씩 깨입니다. 그럴 때는 당신의 사진에 키스를 하고


저를 사랑한단 말이 있는 귀절을 열 개 이상 읽은 후에 다시 잠을 청하여 잠들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치료 많이 하셨어요? 당신은 틀림없이 자상하면서도 노련한 위생병일거라 생각해요. 


이곳은 아침에 일어나면 안개가 자욱합니다. 아 보고싶어라. 송금 받으셨겠죠.


1975년 11월 19일 노야.


 


 


****그리운 당신께


오늘도 학교 급사를 빤히 보아도 편지 왔다는 말을 안 합니다. 속상해 죽겠어! 입이 한 자나 나왔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 저어쪽 하늘에는 노란 보름달이 둥그렇게 아, 달님은 정답기도 해라!


 


노래를 부르니 다 따라 하는군요. 여럿이 함께 노래 해보기도 얼마 만인지.


달을 따라 손에 손을 잡고 길이 끝나는 곳까지 이대로 가고 싶었어요. 


개울물은 또 얼마나 맑은지 빨래를 꺼내와서 다 빨았어요. 손이 좀 시린데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어요.


 


학교사무는 끝이 없어요. 25일 문교 종합감사라 해서 난리법석이예요. 


저는 공문서를 정리해서 매일 목록을 만들어 두는 것과 혼분식 조사예요. 


이런 일은 그야말로 형식적이고 아무 쓸모도 없고 의미가 없는 일이예요.


 


그렇지만 다 정리하고 왔어요. 학교 일과 집일을 깨끗이 하고 나니 참 홀가분 합니다. 


이런 날은 당신과 둘이 앉아 맛있는거 먹으며 도라도란 이야기하면 딱인데……


맨날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코 앞에 닥쳐야 할 때도 있고 


안할 때가 더 많은 얼렁뚱땅 하는 습관은 조금 고쳐진 것 같아요. 


내 남자가 언제 날 멕여 살릴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안하면 밥줄이 끊기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도리없이 내 맡은 일은 내가 해야지 아이고…


 


오늘 밤은 유난히 달이 좋아 홀로 있는 이 밤이 자꾸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시골서 보는 달이 진짜배기 입니다. 


지금 옆방에서는 가야금 뜯는 소리가 들립니다. 테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예요.


 


가을과 달과 가야금 산조! 숨을 죽이고 듣습니다. 


굵고 가늘고 크고 작고 강하다 약하다 변화가 얼마나 큰지 우르르르 쾅쾅 폭포소리 같다가 


비단명주같이 부드럽다 느리다 갑자기 좌르르르 숨넘어 갈 듯 빠르다 


산조에 따라 가다 가슴이 조여지다가 터질 듯 하다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들썩들썩 춤을 춰 봅니다, 흥에 겨워.


 


올해는 가을이 긴 것 같은데 그래도 겨울은 어김없이 오겠지요? 


나뭇잎은 마르고 가지는 앙상해 졌어요. 보고 있으니 마음이 저려 옵니다. 


영화 지바고에 나오는 황량한 설원과 눈이 커다란 어린 지바고가 엄마의 장례식 도중에 어두워져 가는 


러시아의 음울한 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던 그런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쟁이 나서 피난 가 있던 작은 시골, 도서관 구석에 앉아 있던 라라의 눈에 섬광이 번쩍 하고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바고가 도서관에 쓱 들어서지 뭡니까. 오, 이럴 수가! 


만날 사람은 어째서라도 만난다는 것, 우연히 재회하여 운명적 사랑을 하게되는 벅찬 순간입니다.


 


놀라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두사람의 얼굴은 빛이 납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두사람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주체 못하고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는 거리를 꼭 붙들고 


둘만의 아늑한 방을 향하여 좁은 골목을 지나고 있습니다.


 


장면 하나하나 다 좋지만 이 장면을 저는 가장 좋아합니다. 


시인인 지바고는 라라와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씁니다. 큰형은 당신 보고 지바고 같은


의사가 되라 하시더니 당신은 지금 지바고 같은 위생병이 되었네요.


 


나의 자랑스러운 님! 


머리는 차가운 별같이 반짝이는 이상으로 가득하고 가슴은 뜨거운 사랑으로 넘실거리는 나의 남자, 


한없는 연민으로 쫄병들 고름도 잘 짜주는 지바고 같은 위생병님.


 


빨리 겨울이 와 당신은 저에게로 달려 와서 우린 멋쟁이가 되어 차거운 겨울바람을 기분좋게 맞으며 거리를 활보할텐데. 


방학이 지나면 집을 옮겨야 합니다. 주인집에서 하숙을 쳐야 한다고 방을 빼라 합니다.


1975년 11월 20일 노야.


 


 


****사랑하는 당신께


아침에 쌀을 씻는데 손이 시렸어요. 겨울이 온다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추위에 덜덜 떨 당신을 생각하니 울컥 …


월동준비 하라고 당신은 성화시지만 연탄불이나 안 끄뜨리면 월동준비 끝!


 


주소가 바끤 걸 보고 지대로 가고 싶어 하던 당신 원대로 된 줄 알았어요. 


아이들은 점심을 후다닥 먹고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공을 차고 있어요.


창가로 가서 내다보니 저도 섞이고 싶어져서 나가서 하늘도 쳐다보며 빌빌 다니며 구경했어요.


 


푸른 하늘! 정말이지 구름 한점 없는 하늘입니다. 당신도 지금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고 있으리라. 아름다운 생각을 많이 하고 싶어요. 신


문에 문화면은 음악회 미술전람회 문화행사 안내로 꽉 차 있어요. 시골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예요. 대신에 호젓한 길을 아름다운 생각을 하며 홀로 걸어 볼려고 합니다.


 


당신과 살면 늘 행복하겠지만 만날 사람이 너무 많고 약속이 끊이지 않을까


그게 좀 걱정이 됩니다. 지금 참 행복합니다. 


당신의 편지는 너무 자상하고 등에는 햇볕이 따사롭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당신도 평화로운 하루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1975년 11월 21일 노야.


 




'나의 노야' - 현승효



12월 2일 화,1975년


알몸의 인간 본체.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고 어떠한 것에도 도색되지 않는 사물이란 존재치 않는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神조차도 예외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神도 상황에 포섭된 인간과의 관계이니까. 神 그 자체도 주어진 상황을 완전히 탈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이 상황에 뛰어들고 또 그 상황을 개조하여 변혁한다. 


한가지 아쉽고 답답한 것은 우리가 접하는 모든 뛰어난 사상물이라는 건 다 번역문이기에 그 진수를 그대로 읽을 수 없다는 거다.



낮에는 수없이 환자가 몰려 든다. 짜주는 고름만도 한 되나 될거다. 어떨 땐 옷을 버리기가 일수다. 손은 노상 피를 묻힌다. 그러나 보람있고 의의있는 일이다. 오늘 아버지에게서 돈이 2000원 왔다. 유용하게 쓸 수 있어 좋다. 밤에 노야와 윤건호 선생님께 편질 쓰다.



생활이래야 매일 똑같은 생활. 6시에 기상, 막사 주위를 쓸고 밥 타오고 식기 닦고 청소하고 치료해 주고 틈틈이 책 좀 보고 노야 생각하고 그게 전부


다. 요즈음은 겨울이라기보다 늦가을이 계속되어 고마운 일이다. 이제 노얄 만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무얼 할까? 어딜 갈까? 즐거운 연말이 되겠지.


안녕, 노야.






12월 3일 수,1975년


문득 모든 위대한 사상의 발견이란 이 우주의 궁극 원인적 규명에 있어서의 인간의 內省的 발견이란 생각이 떠오른다. 


그 내성적 실체라는 것이 자유 理性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사상가에 따라 그 계기는 모두 틀린다. 


사르트르는 상황적 논리에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고 까뮈는 반항에 있어서이고 헤겔은 정신현상에 있어서이다.



이대로 계속 전진을 한다면 나도 언젠가 어떤 하나의 motive를 발견하게 되겠지. 기대되는 일이다. 


사르트르의 문학론에서 하는 주장은 작가란 독자와의 상관적 계기에 있어서의 양자 서로의 자유의 인식과 용인과 인정이며 하나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란 목적 자체의 자율성. 절대적 가치와 상관관계에 立場적 의식(상황적 의식)의 통일로써 나타난다.



치밀하고 재치있고 해박한 두뇌의 소유자인 듯 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자유의 표현이며 읽는다는 것 그리고 느낀다는 것


역시 독자의 자유의지이다. 따라서 쓴다는 것은 세계의 재현이며 이 재현된 세계를 변혁 변형케 한다는 의지이며 그런 차원에 있어서 작가는 세계에 참획한다. 


야스퍼스의 말로는 침묵과 회피는 세계와 자신의 실존에 대한 不成實이라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아직 확고하고 명확한 자유의 개념에 도달치 못한 한 젊은 지성이 있다고 하자. 


그가 우리나라와 같은 현실에 있어서 전반적 이해에서가 아니라 일각의 타당성을 이해한 후 행동으로 옮겨 맞아 죽었다 하자. 


그렇다면 과연 그 영혼은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인지 우주의 초월자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전인간적인 자기 내적인 자아에 있어서도 그렇다.



글을 쓴다는것이 어떤 상황을 명명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상황이 아니다. 


그것은 변경되어야 하며 또 변혁되어져야 할 상황인 것이다. 古典主義란 이미 정체되어 있고 현실이 영원으로 착각되고 또 그렇게 인정된 세계에 있어서이다.



어쨌든 그는 그외 숱한 주옥같은 설명들을 많이 첨부하고 있지만 그가 말한 시는 좌절로서의 참획이라는 귀절은 눈부신 발견이다. 


그것은 언어적 견지에 있어서도 시어란 이미 언어가 아니라 대상이다. 


내 머리에 맴도는 생각을 이 종이에 다 옮겨 적을 수 없으나 안개처럼 내 머리에 떠오르고 있다.



노야! 넌 무얼 하고 있나. 내 사랑아 요즈음은 잠이 모자라 졸려 죽겠다.


밥을 먹고 식기를 닦고 나면 해가 완전히 떨어져 깜깜하다.


 


노야, 나는 널 완전히 알고 싶다. 너도 나처럼 이렇게 써둘 수 없을까. 지나놓고 나면 그건 보석처럼 쌓인다. 쌓여서 나의 분신이 되고 촉각이 되고 파편이 된다.


 


오늘 밤도 너에게 편질 썼다. 안녕 잘 자! 즐겁고 안락한 밤이 되길 기도한다.



환자들이 너무 많아 짜증스러워진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빌빌대는 모습과 마음대로 해주지 못해 짜증스럽다. 오늘도 얼굴에 온몸에 고름이 튀어 찜찜하다.



노야의 부탁, 지바고같은 위생병이 되라는 말. 역시 지대생활은 중대생활에 비하면 편하고 좋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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