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님의 절친한 친구였다는데 도대체 한번도 이름도 못 들어 본 신인식이라는 분은 누구신가? 궁금하고 얼른 만나보고 싶어 미칠 번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님에게서 전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던 심오석님도
너무 가슴이 아픔니다, 내님이 일기에 동지는, 동지는, 여러번 그랬는데
내님의 동지였나 봅니다
한국에 알만한 사람에게 수소문 해보라 하여도 찾을 길이 없다해서 애를 태우다가 하루는 인터넷 한겨레를 읽다 <한토마>를 잘못 누질러 정말 우연히 한토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2004년 10월 말, 그때 한토마에는 국가보안법폐지운동에 불이 붙어 있어 글동지들의 의기에 찬 열정적인 글을 읽으니 대동세계를 만난 듯 너무 기뻐서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글쓰기는 엄두가 안 나 한달 쯤 미친듯이 읽기만 하다 용기를 내어 등록하였습니다
일기문에 내 임은 자신을 한국의 젊은 '반항아'라 했더군요
이후 수백 번 읽고 또 읽었는데 얼마 전에야
아, 그는 보살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생의 색신을 버리고 보살이 되어 현세에 돌아 와
그토록 가슴아파 하던 가련한 중생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중생들 곁에서 同悲同苦하고 있을거다 하는 생각이 확 듭디다
“나의 고통으로 중생에 도움을 줘야하고 거기야말로
나의 완성의 길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디를 <반항아>로 하였습니다
내님의 일기문들을 올리고 나니 글동지들이 들어 주시고 울어 주시고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현승효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민주화
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정신을 이어 받겠습니다”…내가 그렇
게도 들어보고 싶은 말들을 해주셔서 참으로 살아있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해 년말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국가보안법철폐운동이 불붙어 1000여명
이 여의도 길바닥에서 천막단식농성을 하시고 600여명이 일시에 삭발을 단행
하셨던 역사에 유례가 없었던 실천행동을 보며 이곳에서 울며불며 발을 동동굴리며 있다가
아직먼길/ 청죽/ 가을향기/ 각골명심/ 세라/ 님들이 주도하신 국가보안법철폐를 위한 한토마네티즌단식연대 동참하여 겨우 이틀 굶는 것인따나 말로만 듣던 머리속으로만 알던 '연대'를 마음으로 몸으로 알게되고 대동세계를 만난 기쁨
에 겁날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때 한토마 글동지들에게 내가 얼마나 의지를 하고 살았던지 한 사나흘 안 보이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그럴 때 아버님이 변혁운동을 하시느라 박정희
에게 모진 시련을 겪으신 초석님의 노력으로 마침내 그렇게도 뵙고 싶어 하던 신선생님과 감격의 눈물로 전화통화를 하는데 뜻밖에도 신선생님은 내님에 관
해 너무도 귀한 말씀을 해 주시는 거였습니다
“승효는 나를 데리고 청도 운문사로 가 독립군가를 불러주며 잔학한
유신압제에 맞서 싸우자고 뜨겁게 말하고”
또, “산에서 밤이 되어 오슬오슬 한기를 느껴 떨고 있으니 승효는 돌을
따끈따끈하게 구워서 등더리에다 대어 주어 아,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가슴이 뭉클해 졌어요”
그렇고 말고요 내님은 그런 사람이예요. 누구에게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까지 철저히 숨겼던 사람들 중 한분이신 신인식선생에게서 이런 말을 30여년 후에 듣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경북대에서 수학을 가르치시다 유신독재철폐운동하는 학생들에게 동조하시다가
쫒겨나셨던 안재구 교수님, 세계적 미적분 수학박사며 통일운동가로 수십년을 옥고를 겪으신 안재구박사님의 노고로 내님 현승효도 처음으로 추모연대에 민주열사로 인정되어
6월11일 광화문열린공원, 두분과 나란히 앉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제1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제에서 조봉암 장준하 문익환 인혁당희생자
님들을 위시한 350여 열사님들과 함께 추모제단에 모셔진 것을 보고 돌아 온
뒤 꿈에 그가 살아 돌아 왔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를 묻고 난 후 딱 두번 “내가 어떤 집념으로 노야 너를 사랑했는데 내 널
포기 할 수 없지” 하며 날 데리러 왔다며 찾아 온 그를 본 후, 안 나타났는지 아니면 사느라 정신 없어 기억이 안 났는지 별로 꿈에 나타난 일이 없었는데
그는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 돌아 왔다고 하는군요
그가 아는 사람들은 다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이 죽은 후 살 의욕을 잃으셔서
말년에는 맥이 하나도 없이 병든 닭처럼 밤낮으로 잠만 주무시다 돌아가셨다는 아버님도 살아 오시고,
94년도에 암에 걸리셔서 얼마 못 사신다고 영순선생이 말해 주어 내가 비밀
리에 한국에 들어가 병실에서 16년만에 (딴놈에게 시집가느라 종적을 감추
었다가) 처음으로 붙들고 통곡을 하고 석달 뒤에 돌아가신 어머님도 살아 계
시고 사랑하던 친구들도 다 와 가지고 승효가 살아 왔다고 흥분해서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는 몸, 손가락도 못 움직여 내가 미음을 떠 먹이는데 입도 걸레가 되어 겨우 벌려 조금씩 받아 먹고 부축을 하여 몇 발자국 억지로 걸어 보기도 하고
웬지 나와는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하지않고 어디를 보는지 표정은 몹시 어두
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둘만 있게 되자 키스를 했는데 나를 빨아들이는 그
의 혀는 그래도 아주 힘이 있었어요
지난 6월에 만난 그의 후배 김재룡씨goad 는 처음으로 말해 주더군요
"형수님, 승효형이 마지막 휴가 나와서 귀대하기 전날 만났을 때
내 요번에 들어가면 죽지 싶으다 그랍디더"
아, 맨날 나보고는 자기는 불사조이니 절대 안 죽는다 하더니
후배에게는 요번에 돌아가면 죽지 싶으다 했다는군요.
"노야, 날 사랑한 것을 욕되게 하지 않으리다"
6월 29일은 내님 현승효(8.6.1950 –6.29.1977)가
죽임을 당한지 28년이 되었습니다
석달 뒤는 9월 12일날 죽은 지구 저어쪽 그의 남아프리카 동료 Steve Biko가
혹독한 탄압을 받다 감옥에서 뇌손상으로 죽은 지 28년이 되기도 하고요
Steve Biko ( 12.18.1946 - --9.12.1977)
의대생이기도 했던 Biko는 그 악명높은 남아프리카 흑인차별정책철폐운동
학생 지도자였습니다
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체게바라의 38주기이며 (6.8.1928 - 10.8.1967)
의대를 마치고 11개월간 중남미를 여행하다 가혹하게 수탈을 받고 사는
민초들의 참상을 볼 수 없어 의사가 되어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억압받는
구조를 때려 부셔 고치는 일이 더 급하다며 혁명가가 되어
정글 속에서 미 CIA와 볼리비아 정부군에 쫒겨 급히 이동하면서 탄약통과
구급약통 둘중 하나만을 지고 가야 할 때 짧은 순간 깊은 고뇌끝에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구급약 상자를 버리고 탄약통을 지고 갔던 체게바라의 3주기이며.
(2005년 7월 노야 씀)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