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재적 존재에서 발견할 경우, 언제나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지가 그것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그 원인은 목적물인 결과에 의존해 있다. 따라서 자유의지가 원인이 되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결과는 전제와, 전제는 결과와, 또 본질은 존재와, 존재는 본질과 분리할 수 없는 변증법적 순환의 환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본질과 존재의 완전한 통일은 자유에서만 도달될 수 있다.
그 외의 사실들은 또 다시 소외와 투쟁을 낳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가 구현되지 않는 곳에서는 완전한 통일을 기대할 수 없다. 비록 어떤 것이 창조 과정에 있더라도 본질과 존재의 괴리 상태로 인식의 영역에 속하는 한, 본질인 원인이 존재인 결과에 선행한다. 이는 숙명적 투쟁을 초래한다. 그러나 회향의 여정 종점에서는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가 구현되므로, 여기서는 원인과 결과, 본질로서의 자유의지와 존재로서의 자유의 구현이 하나로 되어, 그 목적이 원인이 되어 있고, 동시에 원인이 목적이 되어 있다.
우리는 존재의 인간화에 대해 좀 더 심원한 것을 탐구해야 하지만, 우선 현존재적 세계를 직면할 때의 이질감으로 인한 공포를 거치지 않으면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 그것은 한계 내에서 모든 것을 비아로 대함으로써 가능한데, 여기엔 나와 너의 불일치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선행하는 불일치로 인한 대상화를 거친 후 정신 영역에서의 일치에 의해 파악된다. 존재는 유한 한 물적 개념인 시공 속에서 확인된다.
정신은 존재 파악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정신은 전 존재로 펼쳐져 있다. 존재는 불일치가 연속되는 한, 즉 운동에 의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한 정신의 전 영역에서 파악된다. 존재는 대상과 존재 이전 영역인 정신 영역의 일치 상태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존재 자체는 대상과 정신의 통일체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이나 정신 한쪽만을 강조하는 존재의 이론은 문제를 단순화하는 데 불과하다. 대상과 정신의 부분적 통일인 현존재는 어디까지나 한계영역 내에 존재 한다. 뿐만 아니라 존재가 궁극적인 단계에서 무제약성이라는 완전성에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탈존재 상태에 이르고 우리의 정신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존재 파악이란 언제나 불일치의 일치화다. 이때 대상적 존재는 정신과의 일치 속에서 존재 자체가 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존재 파악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가능성의 한계인 실재성의 파악을 의미하며, 행동과 태도에 호소하는 것을 가능하게하므로 존재의 상황을 변경시키는 측면도 지닌다. 가능성과 실재성의 문제는 정신과 물질에 공히 적용되는 것이다. 파악되기 이전의 존재는 가능적 존재이며, 파악을 통해 정신과 일치를 이룸으로써 실재적인 것으로 된다. 정신은 과정 속에 있으며, 자기 영역 내에 수용하는 만큼 존재 확인을 통해 대상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실재성은 가능성에 비하여 언제나 극히 작다. 가능성과 실재성의 영역은 정신의 영역과 크기가 같다. 왜냐하면 정신성이 확인할 때 실재성이 부여되고 확인하지 못할 때 가능성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자연에 용해된 상태에 머무는 인류에게 재난과 악은 일시적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전율도, 고발도, 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신(死神)인 동시에 모신(母神)인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이미 긍정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존재의 비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영원한 반복을 받아들이며 죽어갈 뿐이다.
이 현존재적 자아, 즉 대상과의 관계 속에 머무는 존재는 육체적으로 생의 보존 또는 현존재적 유지로 나타난다. 정신과 육체의 공존체인 정념 차원에서 그것은 자아와 대상의 불일치에서 일치를 향한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성은 탈관계적 존재 자체와의 일치를 향한 안내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 힘은 이성에서만 구현되며, 이로써 현존재 내에서 이성은 우위를 지닌다. 현실적 자아가 그 최고 영역인 이성에 의해 정지와 개방상태로 고양될 때, 육체·정념·이성은 한 정점에서 일치되고 결합하여 통일을 이룬다. 이때 이성은 실체성·가능성·실재성·전체성으로, 정념은 고매함으로, 육체는 영생에 대한 외경 내지 무한한 생명으로 귀결된다. 이 삼자는 모두 일체의 의존적 관계에서 탈피한 상황으로 자유와 독립적 존엄에 접해 있다. 이는 삼위일체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로 자유 자체다. 이러한 상태는 개방과 정지를 통한 관계의 통일이라는 하나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에도 자아는 통일이라는 관계에서 완벽하게 떠나지 못하므로 완벽한 회향을 이루지는 못한다. 완벽한 회향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피안에, 즉 인식과 정념과 육체 및 존재적 개념을 초월한 공⋅ 멸에 있으며, 더욱이 공⋅ 멸이라는 이름까지도 없는 일묵(一默)의 상태에서만 완결된다.
현실적으로 회향은 힘의 주체와 소여의 이원 관계에서 출발하여 이를 초월하는 과정이다. 이원관계 속에서 소여를 파악하는 범주로는 성질, 양상, 분량, 관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현존재의 운동과 관계를 파악하는 기본 틀이다. 이에 근거해 운동과 관계의 근원에 관한 범주, 즉 존재의 근원에 도달할 경우, 존재 자체의 4 범주로서 총체성(분량), 실체성(관계), 가능성(성질), 실재성(양상)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정지성과 개방성을 함의함으로써 운동 및 관계와 대립한다. 하지만 이 범주들도 여전히 관계와 운동에 관련된 상황에서의 존재 자체의 모습이다. 일체의 관계에서 완벽히 해방된 존재 자체는 자유 그것이며 공(空)이다. 공이나 자유도 그 이름이 그렇다는 것일뿐, 공도 자유도 없는 하나의 침묵, 적멸의 점이다.
존재에서 최대의 궁극적 단계는 이와 같이 단 하나의 관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국가에서 세계국가로, 예술에서 예술지상주의로 나가는 것은 회향의 길이지만, 궁극의 회향은 이것들 자체 까지도 떠나는 것이다. 현실의 관계 하에 있는 한, 현실의 최고 형태는 하나의 관계 내지 개방성 속에서 개체화를 무산시키고 통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향의 궁극적인 상태는 이러한 관계 자체까지도 떠나 공⋅ 멸의 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완결된다. 우리는 현실적 토대 위에서 궁극적 회향을 완결하고자 함으로써, 상아탑 속의 정신적 침잠을 현실 속으로 끌어낸다.
자아와 범아
자아는 비아와의 불일치를 감지하고 이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비아를 인식한다. 그러나 불일치 극복의 수단인 인식은 내적 불일치, 즉 가능성과 실재성 사이의 불일치에 빠진다. 비아를 포착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인식능력과 이 비아를 포착 하는 실제 인식은 불일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 내적 불일치를 의지에 의해 해결하고, 인식과 자유의지의 결합을 통해 상황적 불일치인 비아와의 불일치를 극복하는데 매진한다.
상황속의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라는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했다. 인간은 본래 복수적 존재다. 인간의 본질은 인간과 인간의 통일 속에 있다. 인간은 타자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만 전체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타자도 상황속에서 자기와 같이 한정되고 제약되는 존재지만, 상호관계 속에서는 무한정한 존재, 무제약적인 존재도 경험된다.
우리가 문제로 삼는 인간의 전체성이란 결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단독자에 의해서도, 하이데거가 말하는 결의한 자아라는 폐쇄적 자아에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점에서 포이어바흐를 지지한다. 즉 개인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인간의 본질은 인간과 인간의 통일 속에 있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은 개인적 인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이다.
상황 속에서 인간이 가지는 함수 관계를 고려할 때, 인간은 그의 본성과 세계의 관계에서 삼중의 함수관계를 이룬다. ① 자아로서의 인간과 비아로서의 우주 사물의 관계, 즉 자아 대비아의 관계. ② 개인으로서의 자아에 대응하는 타자아로서의 다수 인간을 포함한 인간관계, 즉 자아 대 타자아의 관계. ③ 자아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참 존재 내지 자기존재와 가지는 관계. 회향과 관련해서는 이 자기존재에 대한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관계는 위의 두 관계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지만, 회향을 자각한 인간에게는 위의 두 관계가 셋째 관계에 의하여 지배된다. 이 세 관계 가운데에는 인식 이전의 공포 및 자유로서의 자아와 비아의 이원적 대립이 가장 원초적이다. 그러나 현존재적 인식주체인 자아는 비아와의 불일치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할 수도 있다. 이 불완전성은 자아의 속성이다. 이처럼 자신의 불완 전성을 알 때 그는 이제 상황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는 존재가 된다. 물론 그가 형이상학으로 도피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기만에 머물 수 있다. 그가 여전히 현존재적 자아의 입장을 취할 경우 그렇다. 상황으로부터의 이탈을 위해서는 이제 인식만의 향연이 아니라, 인식과 더불어 정념도 포함하는 전인간적 체험과 인간의 존재 자체가 문제시된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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