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애틀리 선언이 8일 65주년을 맞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8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이 백악관에서 긴급 회동후 합의한 이 선언은 한반도 분할의 단초(端初)가 된 얄타 회담 이상으로 우리 민족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까지 70년간 계속되는 남북분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루먼-애틀리 선언은 원자탄 사용에 따른 세계3차대전 비화(飛火) 가능성을 막았고 무력통일포기방침과 함께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온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에 밀려 전황이 불리해지자 만주폭격 등 원자탄의 사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기자의 질문이 전쟁과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11월30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트루먼은 한국전에서 유엔군 임무를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하자 인터내셔널트리뷴서비스의 기자가 "모든 수단에 원자탄이 포함되느냐?"고 질문을 했고 트루먼은 "원자탄이 사용되길 원치 않지만 적절한 시점에 모든 무기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같은 내용이 대서특필되자 유럽이 들끓었다. 프랑스 르네 플레방 수상을 비롯한 서방의 의견을 모아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급거 미국으로 날아왔다. 원자탄을 사용할 경우, 3차대전으로 번질 것이라며 강력히 만류(挽留)한 것이다.
12월4일부터 7일까지 무려 6차례에 걸쳐 이뤄진 미영 정상회담에서 애틀리는 유엔군의 일원임을 내세워 영국 동의없는 원자탄 사용을 해선 안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했다.
투루먼과 애틀리의 대화록은 오랫동안 백악관 비밀문서(메모랜덤)로 관리되다 2005년 4월 첫 공개됐다.

1950년 12월7일 필립 제섭 무임소대사가 작성한 메모랜덤에 따르면 양국 정상은 원자탄의 사용시 긴밀한 파트너십을 갖고 결정하는데 합의했다. 애틀리 총리가 영국과의 상의 없이 원자탄 사용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언급을 명문화 할 것을 요구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사나이의 말(약속)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문서화한다고 더 나으라는 법은 없을 것"이라고 응대했다. 이에 애틀리 수상이 감사를 표했다는 내용이다.
트루먼-애틀리 선언은 큰 틀에서 한국전쟁을 철저하게 국지화하고 유럽우선주의를 확인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영국 등 서방은 미국인 한국전쟁에 치중한 나머지 유럽에 대한 힘의 분산(分散)으로 소련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 했다. 트루먼은 NATO군 총사령관을 조속히 임명하겠다고 선언에 삽입했고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 원수가 12월19일에 임명됐다.
애틀리의 방미 목적 가운데 중요한 또 한가지는 영국의 이익 보호였다. 당시 영국은 1949년 건국된 중공을 이미 승인한 바 있어 만일 전선이 중국 본토로 확대되면 당장 홍콩을 잃게 될 위험이 있고 말레이시아 등 이해 당사지역에 불똥이 튈 수 있었기때문이다.
또한 한국전쟁을 평화적 교섭을 통해 해결한다고 명문화해서 한반도의 무력 통일 방침을 포기했다. 트루먼-애틀리 선언은 유엔군의 파병 목표가 침략자의 격퇴이지 한국의 통일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당시 회담에 참석한 제임스 맥그래스 미국 법무 장관이 성명 초안(草案)에 넣은 것을 트루먼과 애틀리가 동의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무력 통일 소리는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췄고 확전론자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재미현대사연구가인 김태환 하버드남가주한인동창회장은 "얄타회담이 남북분단을 가져왔다면 트루먼-애틀리선언은 이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최대의 국제 협약이다. 무력통일의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휴전이 성립되어 적어도 남한만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했다.
트루먼과의 협상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애틀리 수상은 본국 귀환후 하원에서 트루만이 언급한 내용을 낭독하고 회담 결과에 무척 흡족해 했다.
애틀리 수상의 강경한 태도는 1945년 11월15일 원자탄 사용에 관해 트루먼과 캐나다의 맥켄지 킹 수상 등 3자간 합의문이 존재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당시 워싱턴DC에서 3국 수뇌(首腦)가 모여 원자탄을 파괴적인 무기가 아니라 평화적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합의하고 문서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윈스턴 처칠에 가려 있지만 애틀리는 영국에선 마가렛 대처와 함께 20세기 가장 유능한 수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차대전 종전 직전 영국 연립정부에서 처칠 수상이 외교 군사 등 외치에 치중하느라 수상 대행 업무를 맡았던 그는 1945년 선거에서 대승하고 노동당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영국은행과 철도 석탄 가스 전신전화 등 중요한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복지정책을 시행하는 등 오늘날 사회 민주주의의 모델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51년 선거에서 패해 수상직을 다시 처칠에게 내주었다.
뉴욕=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Clement Attlee 62대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1883년 1월3일-1967년 10월8일)는 1905년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 개업을 했고, 런던 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변호사 생활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소령으로 복무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1922년 노동당 의원이 되고, 1924년 제1차 노동당 내각의 육군차관, 제2차 노동당 내각의 체신장관 등을 지내고, 1935년 당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5년 선거에서 대승하고 노동당 내각을 성립시켜 총리가 되었다. 애틀리 노동당 정부는 국민에게 내핍을 호소하고 영국은행·철도·석탄·가스·전신전화 등 중요한 기간산업(基幹産業)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1951년의 선거에서 패배하고 1955년에 은퇴, 당수직을 휴 게이츠켈에게 이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