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 의사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다. 그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자, 북간도로 가서 양병학교(養兵學校)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병찬·민영설 등이 헌병대에 밀고하여 1910년 12월 평양에서 붙잡혔다. 이어 군자금을 보관해두었던 배경진과 박만준·한순직·원행섭(元行燮) 등도 체포돼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안악사건의 발단이었다.
일제는 안악을 중심으로 160여 명의 요시찰자를 붙잡아 ‘내란미수·모살미수·강도 및 강도미수죄’를 날조하여 18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40여 명은 거주를 제한했다. 대부분 궐석재판으로 이루어진 판결 결과는 안명근 종신형, 김구를 비롯한 7명은 15년형 등이었다.
훗날 감형된 안명근 의사는 1921년 출옥,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길림성의 의란현(依蘭縣) 팔호리에서 전염병에 걸린 공소 신자를 돌보다 별세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지금까지 안명근의사가 안중근의사의 사촌동생으로 알려졌지만 백년전 신문에서는 그가 안중근의사의 종형으로 소개되어 관심을 끈다. 나무위키 등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안중근의사는 1879년 9월 2일생이고 안명근의사는 1879년 9월 17일생이다. 두 사람이 동갑내기 사촌인 셈인데 한쪽은 안중근 의사가, 또다른 쪽에선 안명근 의사가 ‘형’으로 나오니 아리송한 일이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백년전 신문기사를 소개한다.

☯ 철창생활 14년에 폐안(廢眼)설이 전하는 안명근(安明根) (1924.02.25.) 조선일보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암살하고자 계획 중에
비밀이 폭로되어 감옥에서 늙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합병이 된 후로 사방에서 벌떼같이 일어나던 사건은 거의 다 끝을 고하였건만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을 총살한 안중근(安重根)씨의 종형(從兄) 안명근(安明根)은 그의 종제(從弟)의 뒤를 따라서 그 이듬해에 데라우치 총독이 서도(西道)에 순회할 때를 타서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암살하고자 하다가, 거사도 하기 전에 사실부터 발각되어 슬픈 눈물을 뿌리고 종신징역(終身懲役)이라는 형벌 아래에서 새로이 중창(重創)한 경기감영(京畿監營)에 구치되었다가 그 후에 다시 서대문감옥으로 옮겼다가, 1912년에 다시 15년으로 감형되어 그 후에 공덕리에 있는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어 이후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청창 속에서 봄바람 가을비를 겪고 보내며 장구한 동안의 세상 사정은 간혹 새로 들어가는 죄수에게 꿈같이 듣고 지낼 뿐이었다. 그는 원래 마음이 철석(鐵石)보다도 오히려 굳으므로 감옥 안에서도 독감(獨監) 생활을 하며 감옥 규칙을 그대로 지킬 뿐인 바, 간수들도 매우 칭찬하기를 말지 아니하던 터인데 그가 요사이 와서 눈이 멀었다고 하는 풍설이 일반에 전하게 되므로 그의 가족은 물론이요 일반 듣는 사람으로도 눈물을 금하지 못하는 터인데, 이제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들은 즉, 그가 3년 전에 잠시 안질(眼疾)이 있어 고통하다가 그 후에 도로 회복되어 지금까지 건강한 생활로 매일 차디찬 벽돌 방에서 혼자 눈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면 공장에 들어가서 할자(轄子) 고르는 것으로 14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보내는 터인데, 이제부터는 앞으로 1년 수개월 밖에 남지 아니하였던 바 이번의 감형(減刑)으로 인하여 나머지 형기의 반은 줄었으므로 금년 9월경에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리라는데, 합병 이래 조선 모험객(冒險客)의 수범(首犯)으로는 오직 안명근 한 사람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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