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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간 단골식당 애용 美할아버지’ NY타임스

글쓴이 : min 날짜 : 2010-06-09 (수) 13:36:35



 
 뉴욕의 한 식당. 윌리엄 허츠 씨(93)는 커피를 오더하지 않았지만 웨이터가 하얀 잔을 대령했다. 손잡이가 달려 사용하기 편한 이 컵은 오직 그만이 사용하는 전용컵이다.


 허츠 씨는 사디스 레스토랑에서 전용 컵을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의 단골손님이다. 화요일 점심 식사가 끝나면 이 컵은 다시 깨끗이 치워져 코트 보관실 캐비넷의 지정된 장소에 보관된다.


 올해 만 93세인 허츠 씨는 지난 77년간 이 식당에 왔다. 44가 234웨스트인 현재 주소지에서 사디스가 개업한 것은 1927년 3월이다. 허츠 씨는 1933년, 브로드웨이를 동경해 뉴욕에 온 꿈많은 하이틴 시절에 식당을 처음 찾았다. 


 훗날 카네기 공대로 이름이 바뀐 피츠버그의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드라마를 공부한 그는 1937년 대학을 졸업하고 머큐리 씨어터에서 오손 웰즈와 함께 일을 할 때도 사디스에 갔다.


 그가 이듬해 웰스의 ‘세계의 전쟁’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한 작품이 라디오로 방송됐을 때에도 사디스에 갔다. “사디스에서는 집처럼 편안했지만 다른 식당들은 그렇지 못했어. 정말 편안해. 거기서 파티를 하기도 했지.”


 8월이면 94세 되는 그는 요즘에도 일주일에 두 번은 사디스에 간다. 그는 “부모님이 결혼 50주년 축하연을 이 식당 2층에서 했어. 아버지 95회 생신잔치도 2층에서 했고..나도 이 공간에서 살아온거지.”

 뉴욕의 많은 곳이 바뀌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고집스레 옛 것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오랜 세월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테이블에서 먹고 마신다. 자신들을 그저 자주 오는 사람들로 부르는걸 모욕으로 여기는 것 같다.


 허츠 씨는 사디스에서 오랫동안 외투보관일을 맡은 레니 캐롤과 함께 브로드웨이 오프닝나이트 쇼를 보러가곤 했다. 1950년대부터 센트럴 팍 남쪽에 있는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것도 그녀가 자기가 사는 빌딩을 소개한 덕분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허츠 씨는 사디스의 어떤 종업원보다도 오래 이 식당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 식당의 창업주인 빈센트 사디 시니어를 기억하는 몇 안되는 단골 손님 중 하나다. 사디 시니어는 1947년 경영에서 손을 뗐고 1969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최근 몇 년간 화요일마다 사디스를 찾는 그는 보통 홀 구석에 있는 4번 테이블에 앉는데 뒤 벽에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라이자 미넬리의 캐리커처가 붙어 있다. 이따금 실수로 허츠 씨가 오기 전에 다른 손님들이 이 테이블에 앉기도 하는데 허츠 씨가 오면 웨이터가 정중하게 다른 테이블로 옮겨달라고 청한다.


 이 식당의 공동 소유주인 숀 사디 리켓 씨(37)는 “허츠 할아버지는 보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창업주의 증손자로 아버지 은퇴후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단지 화요일에 오는 손님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일부”라고 말했다.


 사디스는 오랫동안 브로드웨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빈센트 시니어가 1953년 저술한 책에 따르면 토니 어워즈도 이 식당 오찬자리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츠 씨에게도 이 식당의 인생의 중심이었다. 그가 이곳에 늘 오는 것은 또다른 이유가 있다.


 1940년 그가 연출한 연극이 리세움 씨어터에서 하던 공연이 일주일도 안되고 중단된 마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사디스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빈센트 시니어 씨가 그에게 디저트와 커피를 권하면서 “네가 하는 쇼가 중단된걸 들었어. 난 이 식당에 계속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돈 걱정은 하지 말고..”라며 따스하게 말했다.


 허츠 씨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 그게 바로 이 식당의 오랜 단골이 된 이유야. 내 마음을 흔든 따뜻한 그 한마디 때문에..빌어먹을 그 분이 너무 멋진거야”하고 말했다.


 허츠 씨는 물론 요즘엔 돈을 내고 식사를 한다. 사디스의 벽에는 수백개의 뮤지컬배우들과 영화배우 TV 탤런트들의 캐리커처들이 붙어 있지만 허츠 씨의 그림은 없다. 세계의 레스토랑 수도에서 정기적으로 식사하는 대부분의 뉴요커들처럼 그는 자기가 식사하는 식당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그는 1930~40년대 엑스트라 배우였고 잘해야 조연이었다. 무대감독도 하고 캐스팅 디렉터, 연출보조를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디스 바로 옆에 있는 극장표 판매사에서 일했다. 그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식당을 오갈 때 버스를 타고 튀김 치킨을 먹으면 꼭 반을 남겨 집에 있는 애견, 디에고에게 주려고 싸간다.


 식사를 위해 들어온 관광객들은 벽에 붙은 유명배우들의 캐리커처를 신기한듯 바라보지만 바로 옆의 4번 테이블에서 친구들과 앉아 있는 노인이 그 배우들과 관련한 이야기 한토막을 들려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한다.


 그는 자신의 경력과 극장 관련 경험에 대해 자랑하지 않는다-그는 웰스의 ‘세계의 전쟁’에 출연한 배우 중 유일한 생존 배우이다-하지만, 누가 물어보면 기꺼이 답해준다.


 허츠 씨가 2차세계대전 때 군복무를 하던 시기, 수천명의 군인들을 위해 리타 헤이워드가 출연한 쇼가 마이애미에서 펼쳐졌다.
 

 “그녀가 군인들 전용부두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밤 공기가 찬데도 밍크코트를 벗고 깅엄 드레스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핀업걸이다. 왜 부엌에서 일하는 주부처럼 깅엄 드레스를 입고 있느냐. 그녀를 데리고 로니 플라자 뒤로 데려가 이브닝 가운을 입도록 했다. 그날 내내 내게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허츠 씨는 1916년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콜셋(여성용 속옷) 세일즈맨이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됐지. 어머니는 클리블랜드 출신인데 아버지가 그때 클리블랜드에서 콜셋을 팔고 계셨거든..”


 그의 목소리는 자못 진지하고 엄숙했다. 마치 웰스의 목소리처럼. 비록 지금 그는 움직임이 느릿느릿하고 오른쪽 귀에 보청기를 쓰고 있지만 기억력은 그의 재치만큼이나 번뜩인다.


 최근 허츠 씨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39계단’을 친구들과 함께 구경했다. 막간 휴식시간에 그는 “굿바이”하고 일어서면서 “특정한 나이가 되면 이런 잡탕같은 걸 보고 앉아있을만한 참을성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사디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게살 샌드위치였는데 지금은 사라졌다고 아쉬워한다. 그는 대기하는 스탭 일부의 조심성에 대해 큰 소리로 궁금해했다. “사디스에서 가장 힘든 일은 계산서를 받는거야.”


 이날 허츠 씨는 평소처럼 앉던 테이블 대신 레스토랑 뒤에 앉아 있었다. 일행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와 예술가, 공연배우들로 이뤄진 더치 트렛 클럽이라는 105년 역사가 된 단체의 몇몇 회원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허츠 씨는 다큐영화제작자인 섬너 글림커 뉴욕대 교수와 얘기하고 있었다. 주제는 전쟁이었다. 글림커 씨는 벌지 전투에서 총을 맞은 경험이 있다. “난 마이애미 해변 전투를 했어요.” 글림커 씨는 허츠 씨가 첫 출연한 라디오 드라마 ‘세계의 전쟁’을 들었을 때 열네살이었다. 그것을 들으며 무서웠다고 한다.


 “난 드레스 리허설 때 오손 역을 맡았는데 이걸 하고나서 그렇게 생각했지. 100만년이 지나도 이걸 아무도 못믿을거야.”


 사람들이 떠나고 웨이터 와그너 씨가 테이블로 돌아왔다. 허츠 씨와 작별의 악수를 했지만 사디스에서 굿바이는 불필요하다. 와그너 씨는 “금요일 다시 봐요”하고 말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백살을 눈앞에 둔 세계 최고령 이발사가 뉴욕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98세의 이발사 앤소니 맨시넬리 할아버지를 소개한 것은 지난 2월 16일. 멘시넬리 할아버지는 3월 2일이면 만 99세가 된다. 한국 나이로는 이미 100세가 된 셈이다.


 세계 최고령 이발사로 이미 기네스북에 등재된 그의 이발 경력은 무려 87년. 열두살 때 처음 가위를 손에 잡았을 때 백악관의 주인은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었다.

 단골 손님 피터 리로즈 씨(60)는 올해 90살인 아버지와 함께 차례를 기다리년서 “멘시넬리 할아버지는 면도 솜씨도 기막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사람들과 얘기하는걸 즐긴다. “그게 이발사라는 직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야.”

 9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발사로 일하며 손님들과 나눈 화제들은 1929년 대공황부터 2차세계대전, 비틀즈와 뉴욕 양키스가 27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들이었다.

 이발소 주인 머그나노 씨가 “멘시넬리 옹은 걸어다니는 역사책”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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