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욕타임스가 여행면에 캄보디아 프놈펜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대개의 여행기사는 관광 명승지를 비롯한 볼거리와 음식 등 먹거리, 문화를 소개하고 있지만 이번 기사는 특별했다.
수십년전 크메르 루지에 수백만명이 학살된 ‘킬링필드’의 비극을 조명(照明)했기 때문이다. 88년 뉴욕타임스의 동남아 지국장을 지낸 스티븐 얼랭거 씨가 전하는 프놈펜의 시간여행을 소개한다.
프놈펜의 체류는 단 하루였다. 그러나 내 기억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크메르 루지의 대학살은 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내가 갔던 88년 캄보디아는 여전히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땅이었다.
끔찍한 비극을 겪었지만 여전히 많은 난민들이 태국 국경 가까운 곳에서 난민촌을 형성한 채 외교적 해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캄보디아 동료 핀찬다는 내게 “모든 캄보디아의 인텔리겐차는 크메르루지를 피해 달아나거나 그들에 의해 학살됐다”면서 “우리는 잔여물”이라는 농담(弄談)을 하기도 했다.
당시 동남아 지국장이었던 난 방콕 본사에서 돌아올 때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들렀다. 23년전 겨울의 온화한 어느 날 캄보디아를 향했다. 그러나 당시는 베트남을 통하지 않고 캄보디아에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비자를 얻어야 했다.
비행편도 없었기 때문에 호치민에서 택시를 임대해 프놈펜으로 갔다. 캄보디아는 마치 유령의 나라 같았다. 서방에서 온 사람들은 호주의 구호요원들 외엔 거의 없었다. 비옥한 평야와 야자수, 넓게 트인 메콩강앞의 앙상한 마을들이 바삭과 톤레삽강 인근에 펼쳐졌다.
베트남인들은 캄보디아의 점령을 크메르 루지의 악행을 기념하는 것으로 정당화 했다. 크메르루지가 고문하고 처형장소로 활용한 프놈펜 하이스쿨을 뚜얼슬렝 기념관으로 만들어 희생자들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그때 교실 한곳 있던 철제 침대를 보았다. 지금은 많은 이들에게 낯익은 이 뼈만 남은 침대엔 전기장치가 달려 있었다. 희생자들에게 전기고문(電氣拷問)을 한 것이다.
기실 캄보디아엔 유골들과 무덤들로 가득했다. 약탈당한 셸의 휘발유 저장탱크도 기억한다. 그것엔 시신들이 무더기로 있었고 풀섶 여기저기엔 손가락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다른 추모관이 세워진 프놈펜의 남쪽 초응액에선 앙상한 체구의 캄보디아 노동자가 허리춤에 전통적인 격자무늬 스카프를 두른 채 피크닉 탁자위에 앉아 담배를 피는 모습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유골더미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남긴 거대하고 아름다운 아트데코 구조물인 센트럴 마켓도 방문했다. 사람들은 근근이 살았지만 야채는 신선했고 값이 쌌다. 약간 비싼 쇠고기가 노천에 걸려 있고 너무 진해 질릴 정도인 우유를 파는 캄보디아식 카페 아우라이트(au lait)가 딸린 작은 가게들이 있었다.
젊은 남녀가 일하는 아담한 마사지업소에선 전통 부항치료를 하고 있었다. 젊은 여성은 어머니로 보이는 나이먹은 여성의 지도아래 작은 유리병을 데우더니 그것을 내 등에 댔다. 피부가 유리병의 진공으로 압박되면서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석양이 지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날 저녁 보엥칵(Boeng Kak) 호수의 작은 식당에서 게 요리와 바나나잎에 싼 찐 생선요리 아목을 먹었다. 시클로를 타고 프놈펜 도심에 위치한 호텔에 돌아왔다.
창밖엔 전기불이 희미한 아파트들이 보였다. 크메르 루지는 과연 어떻게 이 도시를 텅비게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을까. 또 지금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지금 이 도시는 너무 많은 태국과 중국, 싱가포르의 돈으로 꾸며지고 있다. 그러나 난 다시 한번 그곳을 가고 싶다. 광기(狂氣)가 끝난 안도(安堵)의 적막함을 느끼며.
프놈펜(캄보디아)=노철수특파원 csnoh@newsro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