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준 UN대사가 최근 UN안보리에서 일본 정부를 준엄하게 꾸짖는 발언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오 대사의 발언은 압축된 내용만 한국 언론을 통해 소개됐지만 발언 전문(全文)을 살펴보면 일본의 역사왜곡 등 과거사에 대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과감한 문제제기와 설득력있는 논지의 명문(名文)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UN안보리의 공개회의는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전쟁의 교훈과 평화’라는 주제로 비회원국까지 총 60개국이 참가한 이례적인 대규모 회의였다. 비상임이사국인 우리나라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일본의 역사의식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오 준 대사가 ‘작심 발언’을 준비했다.
1차대전의 발발 원인이 편협(偏狹)한 민족주의와 국가간 상호불신이라고 진단한 오 대사는 “일본지도자들의 언행이 국가간 불신과 동북아지역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며 외교무대에서는 보기드문 ‘돌직구’를 날렸다.
미국 철학자이자 시인 조지 산타야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하는 사람이다.(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를 인용하고 “종전 후 불과 20여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상을 재차 경험한 것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유럽통합을 위해 노력한 독일과 침략의 역사를 미화한 일본의 상반된 행보를 비교하며 “일본군 강제 성노예문제는 인류 양심의 문제다. 일본은 지난해 유엔총회에서 무력분쟁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기여를 언급하면서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각국 대사들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위안부 관련 발언들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잘 몰랐는데 오 대사의 발언이 유엔내에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는 후문(後聞)이다.
▲ 안보리+경제사회이사회 의장 수행 진기록
세계가 주목하는 UN에서 적시에 히트를 날린 오 준 대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다자외교 전문가다. 외무고시 12기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경력의 3분의2 이상을 유엔 업무에 쏟았다. ‘유엔통’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지난해 9월 UN대사로 부임하면서 그는 이시영 전 외교부 차관과 함께 한국 외교관 중 최다(4회) 유엔근무 기록을 세웠다. 유엔대표부 2등서기관(1985∼88년)으로 시작돼 유엔총회의장 비서실 공사(2001∼02년), 유엔대표부 차석대사(2005∼07년)를 거쳐 6년만에 세계 외교의 각축장인 UN에 재입성한 것이다.
올들어 오 대사는 또다른 기록을 추가하게 됐다. 한국 외교관으로는 사상 처음 안보리와 경제사회이사회 등 UN의 양대 핵심기관 의장직을 맡게 된 것.
우리나라는 지난해부터 2년 임기의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15개국으로 구성된 안보리 의장은 이사국이 한달씩 돌아가는 순회직으로 지난해 2월 전임 김 숙 대사가 의장직을 수행했다. 올 5월 우리나라가 다시 의장국이 되는 것이다.
지난달 14일엔 UN 경제사회이사회(ECOSOC) 부의장에 선출되는 낭보(朗報)를 전했다. 아태 그룹을 대표하는 부의장인 오 대사는 지역 순환 관행에 따라 2015년 7월부터 1년간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직을 수임한다. 유엔의 경제 사회 개발 등의 이슈를 다루는 경제사회이사회는 유엔 총회, 안보리와 함께 유엔의 핵심 헌장 기관이다.
안보리의 경우 이사국 선출이 쉽지 않은 반면, 한 달 임기의 의장국은 적어도 한번씩 돌아가게 된다. 그에 비해 경제사회이사회는 이사국(임기 3년)이 54개국으로 많을뿐더러 의장 임기가 1년으로 길고 대륙별로 돌아가기 때문에 기회 자체를 잡기가 지극히 어렵다.
하물며 똑같은 사람이 임기중 두 개 핵심기관의 의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순번이 운좋게 맞았기때문”이라고 했지만 국제외교 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강화되는 시점에 UN대표부 수장(首長)으로 임명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오 준 대사는 대학(서울대 불문과) 시절만 해도 언론인이 꿈이었다. 그러나 4학년때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절친한 친구가 “시험과목이 언론사와 비슷하니 먼저 도전해보라”는 제안에 응한 것이 덜컥 합격을 했다.
오 대사는 “덕분에 언론계엔 응시할 기회가 아예 없었다”고 웃었지만 기실 독립운동가였던 선친(오우홍)이 건국후 외무부 창설멤버로 2대 LA 총영사를 역임하는 등 ‘외교 가문’의 남다른 배경도 작용했을 법 하다.
▲ 한때 언론인 꿈..직접 그린 ‘유화 연하장’ 인기
오 대사는 해마다 연말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만든 연하장 1000장을 전 세계 지인들에게 보낸다. 싱가포르 대사 시절엔 주변 거리 풍경을 유화로 그린 카드를 보내 받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일일이 자필로 쓴 연하장을 보내 사람들을 사로잡듯 ‘외교의 달인(達人)’들은 연하장도 남다른 면이 있는 셈이다.
UN에서 다시 반 총장과의 인연이 시작됐지만 오 준 대사는 반기문 총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외교관이다. 한승수 전 외교부 장관이 2001년 9월부터 1년간 제56차 유엔총회 의장으로 활동할 때 반 총장이 비서실장이었고 오 대사는 바로 아래 직책인 비서실 차장이었다.
또 반 장관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부임한 2004년 1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외교통상부 국제기구 국장으로 재직했고 UN 사무총장 후보로 나섰을 때는 UN 차석대사로 다자외교전문가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당선에 기여, 훈장을 받기도 했다.
올해 우리나라가 안보리 이사국 2년차로 5월 한달간 의장직을 맡고 경제사회이사회 부의장으로서 내년 의장직 수임(受任)을 준비해야 하는만큼 오 준 대사는 어느때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야 한다.
안보리 의장직의 경우 상임이사국과 달리 비상임이사국들은 통상 10~20년만에 한번씩 안보리에 참여하므로 경험을 축적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따라서 두번째 의장직을 수행하는 올해 안보리에서 우리나라가 보다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오 준 대사는 “의장 기간 중 고위급 공개토의의 주제로 비확산 문제와 같이 현 국제사회가 직면한 중요한 안보 문제를 다루는 방안과 함께 안보리 산하기구 중 의장직을 맡고 있는 1540위원회(WMD 테러조직 확산방지 결의이행위원회)가 올해 결의 채택 10주년을 맞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는 행사나 회의도 검토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내년 7월부터 1년간 경제사회이사회 의장국 역할에 대해 오 대사는 “경사리는 유엔 인적 재정 자원의 70%를 관장하는 업무를 다루고 있다. 특히 우리가 의장 임기를 시작할 2015년 후반기에는 유엔 새천년개발목표(MDG)가 종료되고 새로 출범할 포스트2015 개발목표 와 신기후체제 협상도 합의한다는 일정표에 따라 빈곤퇴치와 지속가능 발전한 환경문제 논의에서 리더십을 발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 준 대사는 “임기 중 안보리 의장과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을 모두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과분한 영광이고 어깨가 무겁다”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우리나라의 인재들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더욱 두각(頭角)을 나타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도움을 주는 데 남은 외교관 임기를 집중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