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지는 한국의 존재감
7월 초순 현재 미국 장기 국채 가격이 급락, 시중 금리와 연동되는 국채 수익률이 치솟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제롬 파월 의장에게 금리를 내리라고 으름장을 놓은 지 며칠 안돼 나타난 현상이다. 미국 국채의 위기는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위태롭게 한다. 미국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일본도 최근 국채 가격 하락 속 추가 자국 국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과 가까운 두 강대국들의 국채 위기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존재감을 높여준다.
재정 적자, 무역 적자에 맞서 고군분투 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동맹국들을 중심으로 방위비 분담금을 국내총생산의 5%까지 높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터무니 없는 정치적 수사와 허풍이 난무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하나씩 이끌어내는 미국의 국익은 느리지만 집요하게 관철(貫徹)되고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 및 서아시아(중동) 분쟁은 미국이 세계 에너지 패권의 중심지를 서아시아로부터 빼앗아오는 계기로 삼는 용의주도함이 돋보인다. 특히 이란을 분쟁에 본격 참여시키고 북한처럼 핵무기 보유국의 길로 가도록 한 것은 이란 에너지의 최대 수요국인 중국을 약화시키는 시금석(試金石)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아시아에서 찬탈한 에너지 시장 조성자 자리를 러시아와 공유, 과점시장을 조성할 것으로 예견된다.
한국은 미국과 관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벌이는 와중에 미국으로부터 알래스카 가스전 개발 참여 제의를 받았다. 미국은 마치 의례적인 제안을 했다는 식의 태도다.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 한국의 참여가 사뭇 간절하다. 당연히 한국은 이런 미국의 간절함을 관세 및 방위비 협상에 활용할 전망이다.
무너지는 페트로 달러…주요 산유국들 러시아 구심 브릭스로 결집
2024년 사우디아라비아가 페트로 달러 시스템(미국 달러로만 에너지 매출대금 결제하는 시스템)을 50년 만에 종료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중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급속히 퍼진 이 소식은 곧 중국 매체들과 일부 외국 매체들 사이에서 정설처럼 번졌다. 프랑스 매체 <AFP>는 당시 “가짜 뉴스로 검증됐다”고 보도했다. 1974년 미-사우디 양국이 맺은 경제협력협정은 달러로만 결제한다는 내용도, 50년이라는 시한도 애당초 없었다. 그러나 완전 가짜는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2024년부터 최고우량 고객 중국에게 달러가 아닌 위안화를 받고 원유를 팔기 시작했고, 중국과 통화 스왑 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중국이 주도하는 ‘다국가 중앙은행디지털통화(CBDC) 프로젝트’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2024년 달러 결제의 독점적 배타성이 무너졌기 때문에 변형된 프레임의 보도가 난무한 것이었다.
세계 에너지 경제의 중추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가 미국에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하다. 마침 미국은 2010년 상용화 개발을 시작한 셰일에너지(가스와 오일)로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에 올라 있다. 그런데 셰일에너지가 2025년 기준 앞으로 약 20년 후면 얼추 고갈(枯渴)된다고 한다. 매장량이 남아 있더라도 생산비가 너무 비싸 경제성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다.
원심력에 이끌려 미국의 품에서 멀어지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 이란 등 주요 상위 산유국들이 잇따라 러시아가 주도하는 브릭스(BRICS) 주위로 뭉치기 시작했다. 1위 산유국이긴 하지만, 지구촌 에너지 경제의 구심이 서아시아(중동)에 있다는 점은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민주당은 틈만 나면 기후변화 운운하면서 화석 연료 산업계 규제를 주장하며 난리를 피운다.
1위 산유국 된 미국, 중동이 내내 불편했다

에너지 정책에 관한 한 트럼프 2기 내각의 임무는 명료해 보인다. 셰일 에너지는 다른 지역 화석 연료에 견줘 한계생산비가 뚜렷이 높다. 그나마도 고갈까지 불과 20년 남았다. 미국으로서는 셰일 에너지 고갈 때까지 최대한 국제유가를 높게 유지하는 한편 그간 민주당의 반대로 묶여있던 알래스카 가스전 사업을 본격화 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이스라엘과 이란의 미사일 공방과 미국의 이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보면 트럼프의 임무 수행 방향성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우선 이란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갈등 수준을 뚜렷하게 높여 지구촌 경기 침체 국면에서 급락할 수 있는 국제유가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잡아둬야 한다. 본격화 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구상은 일정하게 성공했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명분을 제공, 이곳을 통해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입하는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애타게 만들어야 한다. 이스라엘-미국 군사동맹의 핵무기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명분을 이란에 제공한 것도 ‘신의 한 수’다. 이슬람 시아파의 구심인 이란과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 유대교 나라인 이스라엘 등 3개 종교 세력들이 좌충우돌로 빚어낼 지정학적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에 따른 불확실성의 양)의 뇌간(腦幹)을 건드렸다. 이란 핵시설을 정말로 붕괴시키지 않은 것은 이를 위한 미국의 확실한 복안으로 볼 수 있다.
지역 긴장이 높아진 서아시아는 더 이상 지구촌 에너지 경제의 구심이 될 수 없다. 미국은 알래스카 가스전을 계기로 러시아에 뒤쳐진 북극 항로를 장악할 수요를 조성, 서아시아로부터 지구촌 에너지 경제의 중추 자리를 빼앗을 속셈이다. 알래스카 가스전 개발과 상용화까지 주요 산유국들에 항구적 국제유가의 하방 경직성이라는 ‘마법’을 걸어 놓은 뒤 세계 최상위 에너지 수요국들이 운집한 아시아 지역에 20년 간 비싼 셰일 에너지를 판다. 그 뒤 셰일이 고갈되면 이번에 관세와 방위비 등으로 어르고 달래 체결한 장기 대량 물량의 알래스카 천연가스 계약이 발효돼 본격 상용화 된다. 미국의, 트럼프의 큰 그림이다.
러시아도 서아시아 에너지 중추가 불편했을까?
여러 이유로 미국과 관계 복원과 경제 협력을 추진하고 있는 러시아는 알래스카 가스전 사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러시아는 알래스카 가스전이 사뭇 거슬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할린과 사하공화국 야츠쿠츠 가스전 등 극동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보스토크 플랜’은 최상위 천연가스 수요국인 일본과 한국을 겨냥해 추진해온 사업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이 관세와 방위비 협상에 엮어 한국과 일본에 알래스카 가스전 개발에 필요한 자본 투자와 함께 천연가스 대량 구매를 장기 계약 조건으로 참여하라고 독촉(督促)하고 있다. 러시아로서는 동아시아 선진국인 한국, 일본과 에너지 협력 명맥은 이어가고 있지만 2022년 우크라이나 분쟁 이후 가스 공동개발 등 프로젝트가 눈에 띄게 위축된 상황이다. 당연히 미국의 알래스카 가스전 사업이 마뜩찮아 보인다.
그러나 앵글을 달리 설정해 보면, 알래스카 가스전 사업은 에너지 대국이자 지구촌 패권의 또 다른 축인 러시아에게도 색다른 기회다. 우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에 파는 파이프라인천연가스(PNG) 감소분보다 훨씬 많은 물량을 이미 중국과 인도에 팔고 있다. 유럽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는 차츰 다시 회복되고 있다.
미국의 의도대로 서아시아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져 주요 에너지 무역로인 호르무즈 해협 주변이 불안해지면, 가성비가 훨씬 높은 북극 항로가 본격 탄력을 받는다. 러시아 북쪽 북극 항로는 이미 중국과의 에너지 물류로 어느 정도 실증을 마친 상황이다. 북극 항로가 더 활성화 되면 유럽쪽 야말 에너지는 물론 극동 야츠쿠츠, 사할린 에너지도 중국과 한국, 일본, 아세안에 신속배달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는 이 과정에서 미국과 인도의 강화된 견제를 감당할 중국과 이란을 설득해야 그간 공을 들여온 러시아-이란-인도를 잇는 국제남북운송회랑(INSTC) 무역로를 잃지 않는다.
<下편 계속>
글 이상현 | 스푸트니크 한국특파원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