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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뉴욕한인교회 8호실

일제만주침략규탄성명서 등 일제하독립운동 산실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5-06-30 (화) 06: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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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대한인 성명서가 만들어진 역사의 현장입니다."

 

뉴욕한인교회 역사추진위원회 간사인 윤창희 변호사가 28일 교회 건물에 있는 특별한 역사의 현장을 첫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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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희 간사는 이날 마지막 예배를 마친 후 일본의 만주침략(1931918)을 규탄하기 위해 19311125일자로 작성한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대한인의 성명서(The Korean Manifesto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 in Manchuria)'가 완성된 곳이 교회건물 4층에 있는 8호실이라고 소개했다.

 

이 성명서는 1930126일 뉴욕한인교회에서 개최한 뉴욕학생회 제1차회의를 통해 조직된 '뉴욕동포 내지 학생운동 대책강구회의'(일명 뉴욕한인공동회)의 인물들로 허정 위원장, 고재완 서기, 황창하 회계, 오천석 윤병구 이기붕 이동제 우상룡(이상 선전위원) 박리근 홍태호 정경희 오장호 김일선(이상 수전위원)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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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시카고와 나성(LA) 디트로이트, 리들리 등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같은 목적으로 설립된 한인공동회와 연대해 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등 세계 각국 주요 기관에 영문 책자를 발간 배포하고 미국 언론과 주요 기관 등을 상대로 당시 광주학생운동 등 조선에서 일고 있는 학생운동에 대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만주침략 규탄성명서는 당시 후버 미국대통령과 존 가너 미하원의장 등에게 보낸 것으로 대한인국민회 등 기존의 미주한인단체나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와는 별도로 뉴욕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해 전 세계를 향해 발표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미주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대응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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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목으로 일본의 대륙정책 한반도병합과 일본의 만주침략 사이의 몇가지 시사점 만주에서 한국인의 사례들로 나뉘어 당시 상황을 분석하고 수많은 조선인을 살상한 일본의 폭압을 고발하는 한편 2300만 조선민중과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자료의 표지엔 특별한 숫자가 있었다. 성명서 제목 하단에 명기된 교회 주소에서 ‘No.8’이라는 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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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희 간사는 "이 자료가 발굴된지도 얼마 안됐지만 넘버 8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4층 자료실에 가다가 문득 방 번호를 보게 됐다. 하늘색 페인트 칠 된 문에 흐리게 나와 있는 방 번호가 눈에 띄었다. 맨해튼 남쪽의 방, 바로 8호실이었다"고 말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윤 간사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단다. 당시 회의실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8호실에서 역사적인 규탄 성명서가 제작된 것이었다. 그는 "성명서에 교회 주소만이 아니라 방 호수까지 정확하게 표기한 것은 당시 선조들이 성명서가 후대에 길이 기억될 역사적 자료가 될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방증(傍證)"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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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인교회 건물 현관부터 낡은 계단 손잡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인선각자들의 손때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지만 보물창고라 할 자료실엔 귀중한 사진들을 비롯한 자료들이 다수 보관돼 있다.

 

이날 역사편찬위원회는 193162일 동부대회 학생총회 사진엔 독립운동가 김 마리아 (1891-1944) 여사를 비롯한 한인지도자들과 당시 유학생들, 미국인 등 약 40명의 단체 사진도 처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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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마리아 여사는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주인공이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몸을 상한 여사는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고 1923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한 김 마리아 여사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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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희 간사는 "오랜 세월속에 사진이 한 귀퉁이가 멸실(滅失)됐지만 김 마리아 여사의 모습은 한쪽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병고에도 젊은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은 김 마리아 여사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진"이라고 말했다.

 

또한 193464일 제7회 동부대회를 열고 단체로 촬영한 사진 등 다수의 자료들이 함께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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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뉴욕한인교회 목회실에선 이용보 목사를 비롯, 주영빈 건축위원장, 조중수 재단 이사장, 윤창희 간사, 이은혜 회계 등 위원들과 독립기념관 조범래 학예연구관 홍익대 이현호 교수, 박영종 씨 등 한국서 온 관계자들이 함께 자리해 향후 뉴욕한인교회 자료전시관 문제를 협의했다.

 

현장에서 꼼꼼이 자료들을 훑어본 독립기념관 조범래 학예연구관은 "뉴욕한인교회에 소장된 역사적인 자료 실태를 파악하고 앞으로 영구적인 보존 관리를 위한 지원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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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노창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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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뉴욕지방의 '모교회' 뉴욕한인교회

 

뉴욕한인교회(영어: Korean Methodist Church and Institute)1921년에 창립된 미국 연합 감리교회에 소속된 감리교공동체이다. 미국 뉴욕시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ew York 에 위치하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과 19193.1 만세운동이 있은 후 1921년 뉴욕에서 한인들의 3.1절 기념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인 개신교 공동체의 설립을 의논 하고 그 결과로 뉴욕 한인교회가 설립 되었다. 교회 설립날짜에 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많은 설들이 있으나 현재 1921428일을 설립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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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예배는 매디슨 거리 감리교회(영어: Madison Avenue Methodist Church,교회주소는 1723 Madison Avenue New York, NY)에서 가졌다 하며 1923422일 교인들의 헌금과 미국 연합감리교회 즉, 미국 감리교회의 도움으로 자체 건물을 459 West 21 Street에 마련한다. 1927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옆 633 West 115th Street로 다시 이전 한다. 아마도 유학생들이 많고, 진보적인 신학교인 유니언 신학교(영어: Union Theological Seminary)도 옆에 있어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진보신학의 명문인 유니언 신학교가 옆에 있어 뉴욕한인교회는 지적인 교회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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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설립 당시 미국 특히 동북부에는 한인이 별로 없었다. 1902년 갈릭호(SS Gaelic)를 타고 하와이로 한인들이 이민 노동자로 옴으로써 미국에도 한인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나, 그들이 동부로 이주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보다는 한일합방 이후 망명한 애국지사들과 학생들이 개신교 교회를 이루었고 독립운동가들의 뉴욕 거점이 된 것이다. 교회 설립부터 독립을 위한 많은 활동이 있었고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에 많은 교인들이 대한민국으로 돌아가 활동 하였다.

 

고국으로 교인들이 돌아감으로 교회는 교인의 감소로 힘든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과 남은 교인들로 교회는 유지된다. 대한민국이 독재정치로 고통받자, 뉴욕한인교회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70년대에는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한인의 이민이 늘어나고 교인들도 많아지게 된다. 자체 건물의 협소함이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으나, 길 건너편에 있는 성공회학교인 성 힐다와 성 위고학교(St. Hilda’s and St. Hugh’s School)와 의논하여 주일예배를 학교 예배실에서 드리게 된다. 학교와의 관계는 항상 좋지는 못하여, 한때 178가의 Broadway Temple, 120가의 유니온 신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2014년 현재 자체건물에서 계속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건물 증 개축을 추진하고 있다.

 

뉴욕 지방의 한인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주변에 교회가 새로 설립될 때 뉴욕한인교회 교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였다. 이와같은 이유로 뉴욕한인교회는 작지만 뉴욕지방의 "모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자료=www.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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