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독립운동 산실(産室) 뉴욕한인교회가 또다시 귀중한 사료를 발굴했다.
뉴욕한인교회(담임목사 이용보)는 23일 뉴욕한인교회에서 15개 이상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활동한 사료들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료는 뉴욕한인교회 역사편찬위원회가 지난 1년간 분석 정리한 것으로 1921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상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드러나 향후 미주 독립운동 역사를 조명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독립운동단체들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들은 서재필 박사를 비롯,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도산 안창호 선생 유석 조병옥 박사 등 대한민국 건국 지도자들을 망라(網羅)하고 있다.
또한 3.1독립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던, 신한청년당과 동경 2.8독립선언을 주도하시고, 3.1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활을 하신 애국지사들도 다수 포함됐다.
뉴욕한인교회는 3.1만세운동 2년뒤인 1921년 삼일절기념식을 계기로 당시 한인 유학생들이 설립했고 미국연합감리교회의 도움으로 자체 건물을 21가에 마련했다. 1927년 기존건물을 매각한 1만7천달러와 미국감리교회 지원금 1만2천달러, 유학생들이 모은 6천달러를 합쳐 115가에 4층 건물을 구입한 후 수많은 애국지사와 근현대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기숙하거나 독립운동,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벌이는 등 한인사회의 거점(據點)으로 자리했다.
역사편찬위원회 윤창희 간사는 "이번 사료들을 통해 뉴욕한인교회가 3.1 독립운동 정신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배경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解消)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15개 이상의 단체들은 모두 중요한 독립운동을 하였고, 한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단체들이다. 이러한 독립운동단체들이 뉴욕한인교회에서 직접 창립되었거나, 1세 교우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뉴욕한인교회는 미동부 한인들의 구심점이자 독립운동의 총사령부와도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윤창희 간사는 "15개 이상의 독립운동단체가 한 장소에서 활동한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로, 이는 한국 민족사에 길이 기록될 큰 사건으로 평가할만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뉴욕한인교회는 27일 예배후에 이용보 목사가 직접 자료들의 상세한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현재 뉴욕한인교회는 노후화된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114가와 브로드웨이의 미국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
뉴욕=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대한인국민회' 미국내 한국임시정부역할
상해임시정부 기틀마련…뉴욕한인교회 발굴 사료 눈길
중국에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면 미국엔 대한인국민회가 있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에 의해 창설된 독립운동단체였다. 상해 임시정부보다도 빨리 설립된 이 단체는 한반도가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미국내에서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벌이며 외교와 행정업무를 하는 등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맡았다.
미국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의 연합으로 창설되었던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동보국회와도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는 확대회의를 통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상항지방총회, 하와이지방총회, 만주리아지방총회 서백리아지방총회를 샌프란시스코에 조직함으로써 조직의 범위를 넓혔다.
뉴욕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혹은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이름으로 활동한 이 단체는 한국 최초의 세계적인 조직이었다. 1915년, 신한민보 이대위 목사가 한글 식자기를 발명한 것을 계기로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간행하여 일제에 의해 억압된 민족언론을 되살리는 동시에, 언론을 통해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했다.
뉴욕한인교회의 사료발굴을 통해 특기할만한 것은 미국 정부로부터 국권을 잃은 한국의 ‘대사관’에 준하는 예우와 대표적인 권위를 인정받았고 상해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미국무성과 캘리포니아주 정부로부터 자치단체의 자격과 권위를 인정받아 한인사회의 자치와 권익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한일 합방후 중국으로 망명(亡命)하던 많은 우국인사들 중 541명이 여권도 없이 국민회의 보증만으로 망명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하고 영주권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1919년 3월 1일 본국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각 지방의 대표들이 3월27일 샌프란시스코에 회동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중심하여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안창호를 상하이에 대표로 파견하기로 하고, 김호는 미 서부지역을 순회하여 본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게 하여 모금책임자로 임명했다. 1919년 12월 국민회가 모집한 독립자금은 8만8013 달러로 집계되었는데, 특히 국민회에서 보내온 2만5천달러를 상해의 불란서조계 마장로 보강리에 전셋집을 얻어 임시 정부 청사로 쓰기로 하는 등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기틀을 마련하였다.
미주에서 모국어 교육에도 나섰다. 1915년에는 클래어몬트 한인국어학교(학생양성소)를 발전시켜, 한인 2세에게 잊혀져 가는 모국어를 교육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계승·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17년 1월 대한인국민회 동지들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농업경영에 착수하여 민족기업을 일으키는 한편, 국제무역에서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1927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이밖에 소년병학교와 숭무학교, 국민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사관 양성(養成)에도 노력하였다. 기타 외교활동으로는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되는 '소약소국동맹회'에 박용만을 대표로 참석케 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문제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