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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인보다 비참한 10만 화전민’

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37>
글쓴이 : 륜광 날짜 : 2024-05-11 (토) 17:48:07

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37>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일제에 국권을 뺏긴 20세기 초엽 여러 불평등의 문제가 심화됐지만 언론에 특히 많이 언급된 것은 소작인 문제였다. 특히 이 시기엔 땅을 빌린 댓가로 지주에게 바치는 것 말고도 일제의 조직적 수탈로 소작농의 고통이 극심했다. 그런데 이들 소작인들보다 훨씬 힘들게 살면서 관심은 거의 기울여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화전민(火田民)이었다.

 

화전은 본래 산에 불을 지펴 들풀과 잡목을 태운 뒤 그 곳에다 농사를 짓는 것을 이르지만 백년전 화전민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1192453일 동아일보는 ‘10여만의 화전민기사에서 소작인보다도 몇 곱절이나 비참한 화전민의 정황을 소개하면, 춘궁(春窮)을 당하여 보통 농민도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일이 드물지 않거늘 심산궁곡(深山窮谷)의 참 천한 나무 사이에서 나뭇가지 풀잎 사이로 풍우를 피하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해 가는 수 만의 화전민의 비참한 정황이야 무엇이라 할 수 있으랴고 보도했다.

 

이어 제일 많은 도()는 평안북도의 6,00028,000여 명이요 그 다음이 평안남도 3,109호의 13,000여 명이다..이 불쌍한 100,000여 만 화전민의 농사하는 방법과 그 생활 상태를 대강 살펴보면, 늦은 가을에 산에 불을 질러 두었다가 이듬해 봄부터 귀밀, , 기장의 농사를 시작하는데 걸음을 주는 것도 아니고 김을 매는 것도 아니니, 수확은 보통 밭의 10분의 11정보에서 2()에 지나지 못하며 부식물로는 먹고 남은 곡식을 시장으로 가지고 가서 소금과 바꾸어 옴에 지나지 못하며, 두어 마리의 돼지와 닭 몇 마리를 쳐서 옷감이나 사 오는데 지나지 못 하는데, 이것도 눈이나 많이 오는 겨울이 되면 먹일 것이 없어서 잡아 먹고 만다고 하니, 평생가야 변변한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하며 불행히 농사나 잘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이 풀뿌리를 캐어 겨우 연명이나 해 간다 함에, 그들의 참혹한 사정을 무엇이라 하랴고 안타까워했다.

 

그런 반면 있는 사람들은 호의호식 별천지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같은 날 조선일보의 사치(奢侈) 소비의 금은(金銀)’에서는 온 세상이 모두 경제상으로 곤란을 받아 우는 모양으로 지내지마는 그래도 있는 사람은 별세상으로 지내는지, 작년 1년 동안에 경성 내에서 만들어 낸 금은 제작품의 값이 690,916원어치나 되는데 먹고 입고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호사(豪奢) 바람으로 사용하는 것이 경성에서만 1년에 700,000원이나 된다며 자세한 내역을 소개해 사람들의 혀를 끌끌 차게 만든다.

 

54일 동아일보는 인천항에 나타난 놀라운 숫자기사에서 품질좋은 조선쌀을 총독부에 빌붙은 곡물무역상들이 염가로 일본에 보내고 정작 조선인들은 식량이 부족해 만주의 거친 좁쌀이나 안남미(安南米)를 수입해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전하고 있다.

 

54일 조선일보는 사령탑코너에 대다수 조선인들이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소위 일부 양반 계급은 술집과 요리집에서 기생을 끼고서 부어라 마셔라 주지육림속에 살고 있다며 배고파 부르짖는 농촌아이들을 위해 기생주는 돈과 술먹는 돈의 10분의 1이라도 공익사업에 쓰면 어떠할까라고 꼬집었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백년전 기사를 소개한다.

 

10여 만의 화전민(火田民) (1924.05.03.) 동아일보

소작인보다 더 비참한 그 생활

세상에서 숨어있는 가련한 일



 

우리는 요사이 소작인의 불쌍한 상태를 동정하며 말하지마는 그 소작인보다도 몇 곱절이나 비참한 화전민의 정황을 소개하면, 춘궁(春窮)을 당하여 보통 농민도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일이 드물지 않거늘 심산궁곡(深山窮谷)의 참 천한 나무 사이에서 나뭇가지 풀잎 사이로 풍우를 피하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해 가는 수 만의 화전민의 비참한 정황이야 무엇이라 할 수 있으랴. 조선 전도의 화전민이 얼마인지 자세한 숫자는 모르나 최근 총독부 조사에 나타난 숫자만 보더라도 호수 15,000호에 인구 70,000여 명이다.

 

제일 많기는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제일 많은 도()는 평안북도의 6,00028,000여 명이요 그 다음이 평안남도 3,109호의 13,000여 명이며, 제일 적은 도가 충청남도로서 거의 없다 해도 좋겠다. 물론 이것은 외면에 나타난 관청의 조사라 이밖에 평안북도의 강계(江界) 지방이나 평안남도의 맹산(孟山), 영원(寧遠) 지방이나 황해도 곡산(谷山) 지방이나 함경남도 갑산(甲山) 지방의 깊은 산속에는 얼마나 많을는지 모르되, 당국에서도 그 조사밖에 50,000여 명 가량은 숨어 있으리라 추측하니 모두 치면 대략 150,000여 명은 될 것이다. 이 조사에 나타난 70,000여 명이 경작하는 토지 면적은 21,700정보에 경작 개소가 6,200여 구역에 33,000여 개소 이다. 예날 한국 정부 시대에는 상당한 조사 통계가 없었을뿐더러 이를 금지하는 법령도 없었으므로 화전민의 수효가 얼마나 있었는지 알지 못 하였으나

 

최초 정리는 1916년부터

화전민의 삼림 남벌(濫伐)이 심하여 피해가 막대하다 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1916년부터 이에 대하여 훈령(訓令)을 발포하고 화전민의 정리를 시작하였는데, 이 훈령을 발포한 1916년의 외면에 나타난 조사와 1919년도의 조사를 보아 그 증감을 비교하면 아래 기록한 숫자와 같다. (1916년부터 총독부에서는 화전민 정리에 착수해 오던 바, 1919년 독립운동 당시 이후는 적당한 대책이 없었고 오직 고식적(姑息的) 박멸책을 취한 듯하며, 이에 따라 정확한 조사도 없었다.)

 

연도 호수 인원

191622,303199,539

191915,46070,786

 

이 숫자로 보면 1916년도보다 1919년도에는 면적 13,345정보(町步), 호수 6,842, 인구 128,753명의 감소이다. 이것은 1919년도의 비교이니 금년에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수효는 알 수 없으나 연년히 조금씩 줄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당국에서는 화전민 정리의 방침으로

 

6,000호 정리를 3,000원으로 했다

1916년 이래 6,000여 호를 정리하였으며 그 6,000호 중에 1,359호는 매호 평균 15~16원씩 이전료를 주어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시켰었는데, 그 총비용이 3,360원이다. 이 숫자를 보면 당국에서는 한편으로 박멸책을 쓰며 또 한편으로는 구제를 한다 하지만, 5~6년 동안에 불과 3,000여 원의 돈으로 6,000호를 정리하였음은 그 수단이 여하이 고식적(姑息的)이며 따라서 그 성적도 짐작할만 하다. 통계상으로는 6,000여 호가 감소하였다 하나 그 실은 관헌의 금지가 심함에 따라 그들은 점점 당국의 눈에 띄지 않을 깊은 산골로 패해 들어감에 지나지 못한 것이요, 결코 수효는 얼마 줄지 않았을 것은 근래에 자주 일어나는 화전민의 참상을 볼아 가히 짐작할 것이다.

 

그들의 생활

사람답게 못 사는 그들

이 불쌍한 100,000여 만 화전민의 농사하는 방법과 그 생활 상태를 대강 살펴보면, 늦은 가을에 산에 불을 질러 두었다가 이듬해 봄부터 귀밀, , 기장의 농사를 시작하는데 걸음을 주는 것도 아니고 김을 매는 것도 아니니, 수확은 보통 밭의 10분의 11정보에서 2()에 지나지 못하며 부식물로는 먹고 남은 곡식을 시장으로 가지고 가서 소금과 바꾸어 옴에 지나지 못하며, 두어 마리의 돼지와 닭 몇 마리를 쳐서 옷감이나 사 오는데 지나지 못 하는데, 이것도 눈이나 많이 오는 겨울이 되면 먹일 것이 없어서 잡아 먹고 만다고 하니, 평생가야 변변한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하며 불행히 농사나 잘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이 풀뿌리를 캐어 겨우 연명이나 해 간다 함에, 그들의 참혹한 사정을 무엇이라 하랴. 1919년 이래 고식적(姑息的) 수단으로 박멸책을 강구하던 당국에서도 화전민의 정리에는 별로 효험이 없고 그들의 궁상(窮狀)만 날로 심해지므로

 

숙전(熟田; 해마다 농사짓는 밭)을 분배하여

정리한다는 식산국

드디어 식산국에서는 한 적극적 방침을 쓰게 되어 임야 조사만 끝나면 이 방침을 실행하리라는데, 그 방침은 국유(國有) 불요존림(不要存林)으로 숙전(熟田)에 적당한 곳이 약 300,000정보나 있는데 이것을 화전민의 총 호수를 30,000호로 보고 1호에 대하여 5정보씩을 나누어 준다고 하더라도 150,000정보면 넉넉할 것이라 하여, 당국에서도 숙전에 적당한 곳을 지금 조사 중이라 하나 그 이상(理想)대로 과연 실행될는지 의문이나 당국에서는 하여간 소극적 방법으로 아무 성적도 없는 화전민을 구축(驅逐)하려고 힘쓰는 것 보다는 확실히 묘안(妙案)이라고 하나, 화전민이 만족할 만한 토지를 제공하게 될는지 모를 것이며 아무리 총독부에서 좋은 방법을 가졌다 하더라도 각 도군면의 행정 관리의 생각을 개량하기 전에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격이겠다. 화전민의 화전 소유권 문제를 알아보면 국유지의 처음 입화(入火)는 가을철에 마음대로 하지만, 한 번 입화(入火)한 곳이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될 때에는 그 권리를 새로 오는 사람에게 팔며 또 사유 산림에는 감독같은 자가 있어서 산림을 빌리고 세금을 받는다 한다.

 

사치(奢侈) 소비의 금은(金銀) (1924.05.03.) 조선일보

1년 중 머리 치장만 거의 100,000

작년 중 경성에서만 만든 것이

각종을 합하면 700,000원이다



 


온 세상이 모두 경제상으로 곤란을 받아 우는 모양으로 지내지마는 그래도 있는 사람은 별세상으로 지내는지, 작년 1년 동안에 경성 내에서 만들어 낸 금은 제작품의 값이 690,916원어치나 되는데 원래 먹어서 배를 불릴 수도 없는 실상은 그리 필요한 물건이라고 할 수 없고, 다만 먹고 입고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호사(豪奢) 바람으로 사용하는 것이 경성에서만 1년에 700,000원이나 된다는 것은 대개 어떤 종류의 계급에서 많이 사용하는 지는 모를 것이 없으나, 그와 같이 많은 것을 대체 무엇을 만들어서 그리된 것인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더라.

 

인천항에 나타난 놀라운 숫자 (1924.05.04.) 동아일보

조선미는 염매(廉賣)하고 만주속(滿洲粟)과 안남미(安南米)

겨우 겨우 살아가는 우리 신세



 

조선 쌀을 일본 사람들이 일본에 갔다가 선전을 하며 조선에 와서는 총리대신까지 조선 쌀을 좋아한다는 등 여러 가지로 선전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 쌀을 일본에 많이 팔려는 장사들이 (대개 일본 사람) 진남포에 모여 곡물무역상대회를 연다 한다. 이때에 있어서 조선 쌀 무역에 대한 상황을 대략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 총독부라는 곳에서 얼마 전부터 조선미협회를 일본에 두고 열심히 조선 쌀을 값싸게 사 가지고 이것을 일본에 팔려고 일종의 선전에 노력해 온다 함은 일반이 다 아는 바어니와, 지난달에 인천곡물협회 이사를 조선 기생 몇 명까지 붙여서 일본에 보내 선전을 하고 돌아오게 하엿으며, 또 한편으로는 일본에 선전한 것이 이만하면 잘 사 먹을 터이니까 어찌하면 조선 쌀을 값싸게 사서 이()를 많이 남길까 하여, 진남포에 곡물무역상대회를 열고 조선미협회 이사 석총(石塚)씨와 총독부의 촉탁으로 일본에 선전 갔던 인천곡물협회 이사까지 모두 참가하였다 한다. 이제 숨길 수 없는 무역의 통계를 보아 조선 쌀이 일본 기타 외국에 팔려가는 것이 해마다 늘어가며 그 반면에 만주의 거친 좁쌀이나 안남미가 해마다 늘어 감이 무엇을 증명하는가를 알 수가 있다. 묻지 말고 무역만은 좋은 것이지만 자기의 양식도 남기지 않고 돈에 몰려 혹은 어찌 할 수 없는 사정으로 팔고는 보리고비를 넘기지 못하여 거친 좁쌀이나 안남미를 사서 먹게 되는 것은 오히려 제 잘못이라고나 하겠거니와, 동척(東拓)이나 조선흥업 회사라는 이름 좋은 간판을 내세우고 1년 동안 애써 지은 소작인은 무엇을 먹게 되든지 덮어놓고 법에 넘치는 소작료 또는 돈을 먼저 꾸어 쓴 폭리(暴利)로 가져가는 쌀도 적지 않다 한다. 다른 곡식은 그만 두고 쌀로만 3년 동안 인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과 또 만주 좁쌀과 안남미가 인천에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살피건대 좁쌀은 3년 전보다 작년 수입이 약 40배가 늘었으며 안남미는 약 25배가 늘어 감을 볼 수 있다.

 

조선 쌀이 수출되기는

1921879,515석에 가격 24,292,605원이요

1922761,329석에 가격 25,613,171원이요

1923855,571석에 가격 25,458,168원이며

좁쌀이 조선에 들어온 수는

1921219,100근에 가격 30,793

19224,653,200근에 가격 246,100

19238,565,600근에 가격 435,794원이며

안남미는

1921121,200근에 가격 34,921

19227,064,000근에 가격 541,695

19233,152,900근에 가격 314,817원이다. (인천)

 

생도(生道)가 망연한 100,000여 명의 궁민(窮民)

가을에 산에 불을 놓아 두었다가 그 이듬해 봄에 귀밀, , 기장 등을 심어서 겨우 연명 거리의 양식을 얻고, 돼지나 닭을 쳐서 옷 벌이나 얻어 가지고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던 가련한 화전민이 총독부 조사에만 의하여도 70,000여 명이라 하며, 그밖에 조사되지 못한 수효까지 합하면 100,000명 이상 150,000명이라 한다.

총독부에서는 소위 산림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1916년부터 화전(火田)을 엄금한 까닭에 수 많은 화전민들은 그나마 밥줄을 빼앗기고 더욱 깊은 산중으로나 그렇지 아니하면 산설고 물설은 서북 간도로 쫓겨가게 되나 함은 날마다 신문 지상에 보도되는 사실이다.

산림을 보호하는 것도 좋고 백성의 함부로 하는 것을 단속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큰 일은 살고 죽는 것밖에 없지 아니한가. 산림 보호도 백성을 위함이라 하면 이로 인하여 백성의 생활이 파멸되는 때에는 무슨 딴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하여 종래의 총독부 편에서 취해 온 태도에 대하여는 구태여 여러 말 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제 소위 당국의 방침이라 하여 전하는 바를 보면, 이제 조선 안에 있는 국유(國有) 불요존림(不要存林)으로 숙전(熟田)에 적당한 곳이 약 30만 정보인데 장차 이 땅을 화전민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들의 생활을 안도(安堵)케 하리라 한다. 당국의 계획이 과연 얼마나 성의있는 태도로 실행될는 지는 아직 의문이어니와, 화전민의 궁상(窮狀)이 점점 심해가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오직 한숨을 금치 못할 뿐이다.

 

돈과 술 먹는 돈의 10분의 1이라도 공익 사업에 (1924.05.0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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