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김원일 칼럼니스트
인천항에서 러순양함 바략 호와 소형군함 카레예츠 호 선원 전사 116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고 10일 타스통신이 전했다. 이 행사에는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와 러 대사관 무관, 외교관들, 대사관 부속 러시아 학교 학생들, 한국군 대표자들이 참가했다.
한국 해군의 초계함 제천함이 러시아 인사들을 바략 호와 카레예츠 호가 침몰한 장소로 인도했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오늘 우리는 러시아 역사에서 기념적인 사건인 순양함 바략 호와 소형 군함 카레예츠 호의 일본군과의 영웅적인 전투를 추모한다. 우리는 지금 바략 호가 침몰한 인천항의 지점에 있으며 우리의 영광스러운 조상들의 용기와, 자기희생, 군인 정신에 충성한 것을 기념한다. 그들의 전사는 여러 세대 러시아인들에게 용기와 영웅적인 투쟁, 애국심의 표상이 되어왔다”고 추모사를 했다.
쿨릭 대사는 러시아는 매년 러시아 군인들이 전사한 장소에 헌화(獻花)하는 의식을 시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 준 한국 측에 깊이 감사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전통은 한러 양국의 우호관계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이후에 물 속에 화관을 바치는 예식이 있었다.
인천항으로 되돌아온 러시아 대표단은 바략 호와 카레예츠 호와 14척의 일본 군함의 제물포 해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 인천에 세워진 기념비로 향했다. 러시아 대표단은 기념비에 헌화했다.
1904년 2월 9일 러시아 선원들은 일본 함대의 제물포항 봉쇄를 뚫고 포르트-아르투르 항으로 나가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다. 전력 차가 극심했던 일본 함대와의 전투에서 바략 호와 카레예츠 호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일본군의 전력이 확실히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선원들은 한 척의 구축함을 격파하고 세 척의 일본 순양함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후 다시 제물포 항으로 돌아왔다. 군함을 넘겨주고 포로가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선원들은 스스로 카레예츠 호를 폭파시키고 바략 호는 침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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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1904년 러-일 제물포해전
제물포 해전은 러일 전쟁 초기 1904년 2월 9일에 벌어진 전투로 여순항 해전과 함께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첫 전투이며 모두 기습적인 공격으로 일본이 승리했다.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던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로부터 제물포, 여순항에 이르기까지 제1태평양 함대를 주둔시켜 군사적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 연합함대의 제독 우류 소토키치는 여순항을 공격하려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명령을 받아 6척의 순양함과 2500명의 병력으로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기로 한다.
특히 일본의 방호순양함 지요다는 10개월 동안 제물포에 주둔해 같이 주둔한 러시아의 장갑순양함 바략과 포함 카레예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904년 2월 7일 일본 연합함대의 대규모 무력 군단을 본 포함 카레예츠는 여순항에 지원 요청을 보냈고, 2월 8일 이른 아침 카레예츠함이 일본의 순양함 지요다구를 발견하고 포를 쐈으나 지요다구는 어뢰로 대응해 양측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결국 카레예츠는 항구에서 퇴각했고 지요다구는 우류 제독의 소대와 접선했다. 영국의 HMS 탈봇, 프랑스의 파스칼, 이탈리아의 엘바, 미국의 군함 빅스버그 등 정박한 중립 국가 항구에서는 일본군에게 항의했으나 오히려 위협을 받아 피신했다.
우류 제독은 경순양함 지요다, 다카치호, 아사마, 나니와, 니타카, 아카시와 어뢰정 4척을 이끌고 3000명의 군사들을 제물포에 상륙시켰으며 일본 군대는 제물포로부터 이동하여 서울과 대한제국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였다.
2월 9일 오후까지 14:2로 일본군과 러시아군은 전투를 벌여 일본군은 바략함에 올라타 장교 사관 생도 알렉세이 니로드를 포함한 승조원들을 죽였으며 남은 함대는 대포와 어뢰정으로 두 전함에 큰 피해를 입혔다. 바략함과 카레예츠함의 승조원들은 나포당할 것을 우려해 두 전함을 자침시켰다. <자료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