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팍스-아메리카의 붕괴에 대한 진통제같은 예고편이다. 그간의 세계질서는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과 달러기축통화, 소프트파워로 포장된 각종의 국제기구 등에 의존하여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 중동 등에서 러시아의 급부상, 유럽에서의 왕따, 이란봉쇄전략과 베네수웰라에서 친미쿠데타의 실패, 대중무역제재의 패착 등으로 자기발등찍기를 반복하고 있다.
미국의 북한접근은 북핵폐기라는 주제를 넘어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상대적 분리와 미국으로 편입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다른백년은 이후 급속히 전개되는 미국 패권주의의 붕괴과정에 대한 역사적 증인으로 알림기능을 다할 것이다.
- 다른백년 이래경 이사장
세계 패권을 향한 미,중,러 간의 힘겨루기
최근 미국은 중국과는 강대국 패권경쟁에, 러시아와는 군사적 대립구도에 접어들었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관계개선과 함께 공식적인 동맹은 아니지만 세계관의 합치와 긴밀한 정책 협력이라는 의미있는 합의에 이르렀다.
냉전 이후 주요 국가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세계질서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강대국간의 관계재편(realignment)의 원인이다. 단일 국가가 이끄는 세계, 즉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평화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요약되는 이러한 세계관은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부담을 감내할 의지를 잃지 않을 때, 그리고 다른 주요국들이 미국의 패권을 묵인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에서 目睹(목도)한 강대국 간의 전형적인 경쟁구도가 다시 등장했다.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 간의 경쟁은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그날까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이들의 경쟁과 합의 모두 매우 비대칭적 양상을 띄고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각각 완전히 다른 능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세계 3대 군사강국이자 강력한 지정학적 당사자들로서 서로 간의 관계가 글로벌 전략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러나 각자의 어젠다와 목표, 전략, 전술은 모두 다르다. 이는 18세기와 19세기에 보았던 냉전이나 유럽 내의 경쟁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관계이다.
미국은 기존 패권의 지속가능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자 세계무대에서의 우위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쩌면 기술적으로도 자신을 추월할 수 있는 중국을 가장 큰 경쟁상대로 여기는 반면, 러시아는 야심이 지나친 방해꾼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내부적으로는 미국의 미래적 역할, 외교정책의 목표 등에 대한 논의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계속 경쟁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부 기반 다지기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면서 동맹국들에게는 더 많은 부담을 지울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은 국내의 발전과 동시에 정치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쏟는 한편 세계무대에서도 계속 힘을 키우고 있다. 비록 세계 많은 지역에 대한 경험이 아직 부족하고, 중국 군대는 실제 전투를 통해 실력을 입증한 적이 없으나,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과 존재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중국의 전략 목표는 결국 국제체제에서 중국의 비중을 꾸준히 늘리며 점차 미국을 리더의 자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중국에게 러시아는 안정적인 지정학적 뒷배이자 에너지부터 군사기술에 이르는 다양한 협력과 자원의 제공자이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이나 제국주의 시절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최근 강대국의 면모를 되찾았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러시아는 글로벌 패권을 두고 미국과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아시아 대륙을 선점하기 위해 중국과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미국과 중국 모두에 맞서 지정학 및 안보상의 자주권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예측하건대, 러시아는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을 주요 적국으로, 중국을 주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다만 후자에 너무 의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굉장히 특이한 방법으로 미국의 2대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 모두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압박하면 이들이 과도하게 친밀해질 것을 염려했던 과거와는 달리, 유례없는 접근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이렇게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난 배경에는 미국 내 팽배한 러시아 무시, 중국도 은근히 러시아를 깔보고 있다는 믿음, 중국과 러시아는 서로 달라도 너무 달라서 견고한 반미 연합체를 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셈법 등이 깔려 있다. 해당 이론은 러시아가 참여할 수 있는 대부분의 개발 기회는 서구에 있기 때문에 또는 시간이 흐르면서 힘이 강해진 중국이 러시아도 종속국처럼 대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는 결국 중국을 버리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최근 전개된 정세 때문이기도 하다. 2014년 이후 중국은 러시아를 대대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주도한 제재 때문에 망설였다. 미국과의 경제관계에 얽힌 이해가 훨씬 크다고 본 것이다. 동시에 러시아와 너무 긴밀해지면 관계를 잘 관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던 듯 하다.
그런데 중국이 러시아에 매장된 에너지에 접근하는 대가로 러시아 에너지 기업들에게 자금지원을 제공하면서 중-러관계는 한층 견고해졌다. 중국인민해방군(Chinese People’s Liberation Army) 역시 러시아의 앞선 군사 기술을 접하게 되었고, 양국은 더 자주 합동군사훈련과 외교협력 등을 펼쳤다. 그렇다고 과거 중국과 소련의 연합이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러시아의 전반적 지정학적 태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한 때 러시아는 서구권에 녹아들고자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비서양국가의 하나가 되었고, 앞으로는 비록 중국과 힘을 합치지도 않겠지만,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도록 돕지도 않을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의 입지를 계속 흔드는 중국으로부터 反射利益(반사이익)을 얻으려 할 공산이 크다.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미국을 제외한 유라시아 부흥(Greater Eurasia) 기조 아래, 중국과의 협업을 지속하며 힘 있는 대륙을 정립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물론 미국을 차치하더라도 중국과 러시아가 힘을 모을 이유는 많다. 그러나 미국의 압박은 이 둘이 더욱 긴밀해지도록 만들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나, 이들은 그러한 차이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러한 차이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가 충돌할 가능성이 미국의 이중봉쇄정책으로 줄어들고 있다. 해당 정책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혹시 우리나라를 포기하고 중국과 또는 러시아와 한 편이 될 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양국 엘리트의 마음에 위안이 되어주고 있다.
글 Dmitri Trenin (드미트리 트레닌)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내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Carnegie Moscow Center) 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