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이 끝나고 2주가 흐르도록 그 결과에 대한 감격과 만족에 취해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근심에서 벗어나 안도감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가 투표한 후보가 겨우 5% 미만의 지지를 받았어도 흐뭇하기만 하다. 참신한 비례대표의원 1명을 기대하며 찍었던 정당이 전국적으로 1%의 지지조차 받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절대 질 수 없는 선거판이었다. 각종 통치기구와 정보기관은 물론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까지 장악한 터였다. ‘선거의 여왕’은 여기저기 선거판에 노골적으로 뛰어들었다. 북한의 위협을 부풀리며 이른바 ‘북풍’도 만들어냈다. 게다가 분열(分裂)된 야당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비판하기보다 서로 삿대질하며 싸웠다.
난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박근혜 정권의 폭주(暴走)와 새누리당의 영구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후보단일화를 이루어달라고 호소하는 글을 발표했다. 수도권에서 새누리당 후보의 어부지리를 막기 위해 유권자의 지지를 덜 받는 야당후보가 제발 물러서달라고 절규하는 글도 썼다. 낙담해서 기권할지 모를 유권자들에겐 선거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뽑는 게 중요하지만 가장 나쁜 놈을 떨어뜨리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며 꼭 투표하도록 권했다. 새누리당이든 더민주당이든 국민의당이든 모두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보수로 여길만한 진보 세력에겐 비인간적이고 반민족적이며 비민주적이고 반평화적인 극우수구 새누리당을 심판하기 위해 못된 더민주당을 지지할 수도 있고 얄미운 국민의당에 표를 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는 가운데 사회원로들의 개입과 중재에도 불구하고 투표 전날까지 야당 후보들이 단일화를 이루지 않거나 못하는 것을 지켜보며 좌절과 분노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폭압통치 아래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민주화 데모 한 번 해보지 못한 주제에 법석을 떨 자격이나 있느냐는 체념(諦念)에 빠지기도 하면서 투표일을 맞았다.
당연히 여소야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새누리당의 압승을 예상하며 걱정하기만 했지 참패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런 터에 새누리당이 헌법을 뜯어고칠 수 있는 200석이나 국회선진화법을 팽개칠 수 있는 180석은커녕, 다수결로 밀어붙일 수 있는 150석도 얻지 못했다. 과반 붕괴뿐만 아니라 제1당 자리마저 빼앗겼다. 투표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의아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국내정치보다는 국제관계를 주로 공부해왔어도 명색이 정치학자인데 민심이 이토록 위대하고 무서운 줄 정녕 몰랐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 수준이라며 박근혜 정권의 독선과 폭정은 국민의 의식 수준에 따른 것이라고 오히려 유권자들을 무시하고 원망하지 않았던가. 하기야 공자는 무려 2,500여 년 전 백성을 물에 비유하고 군주를 배에 비유하며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는 명언을 남겨놓긴 했다.
총선 결과에 대해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 그리고 학자들이나 분석가들을 포함한 이른바 선거 전문가들 모두 놀라는 모양이다.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2주가 지나는 동안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정권의 독선과 불통 그리고 새누리당의 막장공천을 비롯한 억지와 횡포 등에 대한 심판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청와대와 여당의 불통과 오만이 갑자기 빚어진 일이 아니잖은가. 2014년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파렴치를 만천하에 드러낸 세월호 참사 직후 실시된 지방선거에서조차 여당이 압승(壓勝)했고, 그 후 치러진 모든 재.보궐선거에서도 집권당이 이겼으며, 최근엔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하겠다는 사람들이 30-40%에 이른다는 말까지 나왔던 터다.
나는 이번 투표혁명을 혁명이론으로 설명하고 싶다. 간단하다. 무슨 일에든 기대와 현실 사이엔 차이가 나는 법인데, ‘참을 수 있는 격차(tolerable gap)’가 ‘참을 수 없는 격차(intolerable gap)’로 커지게 되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보수층이 박근혜 정권과 여당을 무조건 지지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것 (기대)과 실제로 얻는 것 (현실) 사이엔 어느 정도 격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집권 초부터 불거졌던 인사문제, 노인복지에 관한 공약 파기,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을 거치며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불만이 생겼을 것이다. 참지 못할 정도의 격차나 불만은 아니더라도. 그러다 선거를 앞두고 청와대의 무리한 개입에 따른 막장공천을 지켜보면서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인식과 함께 불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막장공천이라는 오만과 횡포에 갑자기 민심 이반이 생겼다기보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격차에 따른 지지층의 불만이 점점 누적(累積)되어오다 공천파동을 계기로 폭발했으리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이 덕을 봤다.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새누리당이 죽을 쑤는 바람에 표를 얻었다는 말이다. 야당이 분열되어 여당이 압승하리라는 예측이 가장 크게 빗나간 대목이다. 아무튼 두 야당의 공천과정 역시 볼썽사나웠다. 예를 들어, 더민주당은 내가 사는 익산의 갑 지역 후보 경선에서 떨어진 후보를 다른 후보들이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을 지역에 전략공천하기도 했다. 새누리당 못지않게 다른 후보들과 유권자들을 무시하는 오만하고 해괴한 짓이었다. 국민의당은 ‘새 정치’를 내세우면서도 더민주당에서 뛰쳐나온 ‘헌 인물’들을 대거 공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새누리당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지지했을 것이다. 뽑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나쁜 놈을 떨어뜨리기 위해 덜 나쁜 놈에게 표를 던지고, 최악의 새누리당을 심판하기 위해 좀 못된 더민주당이나 얄미운 국민의당에 힘을 보태준 것 같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호남 민심을 두고 부정적 말이 많다. 어떻게 더민주당을 배반하고 국민의당에 몰표를 주었느냐는 불만이나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 역시 단순한 것 같다. 호남지역에서는 더민주당이 수십 년 동안 견제 세력 없는 집권당이나 만년 야당 노릇을 했다. 보수 세력의 ‘참을 수 없는 격차’가 새누리당을 심판했듯이 호남 유권자들의 ‘누적된 불만’이 더민주당을 심판한 게 아니겠는가. 지난날엔 더민주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새누리당에 표를 주기는 곤란해서 더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더민주당을 견제하거나 이와 경쟁할 수 있는 새 정당이 생겼기에 거기에 표를 던져주었을 것이다. 수도권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야당 후보들 가운데 유권자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는 더민주당 후보를 찍었겠지만, 호남지역에서는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더민주당을 맘놓고 팽개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다른 지역에서는 새누리당의 독주와 오만을 심판하기 위해 더민주당에 표를 주었다면, 호남 지역에서는 무능하면서도 오만한 더민주당을 견제하느라 국민의당을 지지한 셈이랄까. 특히 광주에서 국민의당이 싹쓸이할 수 있었던 데는 더민주당의 ‘호남 홀대’와 ‘영남 패권’ 이외에 적어도 두 가지 이유나 배경이 더 있었을 듯하다. 하나는 김종인이 1980년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생겨난 국보위에 참여함으로써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떠받친 데 이어 지금의 박근혜 정권 창출에도 기여했다가 갑자기 더민주당 최고지도자로 나타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광주 사람들의 정서에 가장 가까운 김대중 정부를 떠받치던 이른바 동교동계가 더민주당을 떠나 국민의당에 합류한 점이다.
물론 호남지역엔 안철수와 국민의당에 대한 부정적 인식 역시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부터 그를 싫어했다. 그가 더민주당을 뛰쳐나와 국민의당을 만들 때 선거를 앞두고 야당 분열을 이끄는 게 미웠다. 개인 차원의 후보 단일화까지 반대하는 그에겐 증오심(憎惡心)이 생겼다.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면 자신과 국민의당만 죽는 게 아니라, 더민주당도 함께 죽고, 정권심판이 죽으며, 인권이 죽고, 민주주의가 죽으며, 평화가 죽게 된다고 절규하면서. 저런 고집불통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면 박근혜 못지않게 독선을 부리리라는 생각에 혐오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가 옳았다. 야당의 분열로 여당에 어부지리를 안겨주기보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국민의당으로 끌어들인 것 같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막장공천과 수도권 유권자들의 현명한 전략적 투표가 결정적이었겠지만.
4.13 총선 결과의 다른 주목할 만한 특징은 견고했던 지역의 벽이 허물어졌다는 점이다. 영남지역에서 더민주당 후보 9명이 당선되었고, 호남지역에서 새누리당 후보 2명이 선출되었다. 전국적으로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고, 영남에서도 ‘친박’을 낙선시킨 선거에서 호남에서까지 ‘친박’의 핵심이 뽑힌 데는 호남 사람으로서 개인적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지만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한편, 4.13 총선 과정에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점으로 떠오른 게 있다. 여론조사에 관한 문제다. 유권자가 수십만 명이든 수천만 명이든 1,000명 남짓만 잘 골라 제대로 물어보면 결과를 비슷하게 예측할 수 있다. 여론조사의 과학성이다. 된장국을 요리할 때 조그만 냄비를 사용하든 커다란 가마솥을 사용하든 한 숟가락도 채 되지 않는 양의 국물로 간을 보는 이치와 같다. 간을 볼 때 된장이 고루고루 퍼져있어야 하듯 여론조사를 할 때 대상자의 지역, 나이, 성별 등이 두루두루 분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집전화를 위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니 젊은이들이나 직장인들이 원천적으로 배제되기 쉬운 데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사람 대신 기계를 사용하느라 응답률이 몹시 낮을 수밖에 없다.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당내 경선을 치른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후보의 자질이나 정책보다 인지도를 훨씬 중시하는 한 참신하고 훌륭한 후보를 뽑긴 쉽지 않다. 글쎄 여론조사로 선거를 실시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
아무튼 이번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與小野大)가 이루어졌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의 독선과 폭정 그리고 무능과 오만을 심판한 현명한 유권자들의 위대한 힘 덕분이다. 박근혜가 꿈꾼 듯한 새누리당의 영구집권을 막았다는 자체가 뿌듯하지만, 욕심을 좀 부려 새로 꾸려질 의회에 기대를 몇 가지 품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밝혀지길 바란다. 작년에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들어섰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비협조와 훼방(毁謗)으로 수백 명이 왜 죽었는지 그리고 정부는 왜 1명도 구조하지 못했는지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6월 말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 마침 박주민 ‘세월호 변호사’가 더민주당 후보로 서울에서 당선되어 1호 법안으로 세월호 특별법 개정을 예고한 터다. 유가족을 비롯한 국내외 많은 국민의 의문과 슬픔 그리고 충격을 달래줘야 되지 않겠는가.
둘째, 테러방지법이 폐기되기를 기대한다. 청와대가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한사코 밀어붙인 악법이다. 이를 막기 위해 총선 직전 국회에서 39명의 야당의원들이 무려 200시간 가까이 무제한 토론을 벌인 것은 감동적이었다. 그 때 다수 여당의 횡포에 울분을 삼켰을 텐데 악법은 폐지하는 게 마땅하다. 아울러 전기통신사업법도 고치거나 없애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국정원과 경찰청 등이 일반인들의 통신자료를 몰래 조회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작년 6월부터 올해 1월까지 무려 일곱 번이나 털려 국정원과 경찰청을 고소해놓은 상태다. 이재정 변호사가 더민주당 비례대표의원으로 당선되어 1호 법안으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내겠다고 밝힌 게 반갑다.
셋째,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중단되길 바란다. 선친의 친일을 미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려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범죄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더 이상 잔소리가 필요 없는 대목이다.
넷째,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가 사라지고 남북 관계가 개선되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20-30년 동안 20-30배의 국방비를 쓰면서도 북한의 군사위협을 과장 선전하는 군부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부터 바로잡혀야 한다. 군사평론가로 명성을 떨친 김종대 정의당 예비내각 국방개혁부 장관이 정의당 비례대표의원으로 당선되었으니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 같다.
그런데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어도 위와 같은 악법이나 폐습을 고치거나 없애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새누리당의 반발이나 민심을 외면하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 때문이다. 따라서 다수결에 대한 야당들의 지혜와 슬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국회가 보여준 것은 다수결을 빙자해 소수의 권리0를 짓밟는 다수의 횡포였다. 진정한 ‘다수의 통치(majority rule)’는 다수파가 ‘소수의 권리(minority right)’를 어느 정도 지켜주며 사안을 결정하는 것이다. 지난 국회에서 여당이 저질렀던 다수의 횡포를 거울삼아 새 국회에선 다수 야당이 민심을 앞세워 소수 여당을 포용하며 이끌어간다면 바람직한 정치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아시아문화 5월호 ‘열린 논단’에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