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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조봉암 법살<上> 조봉암득표에 놀란 이승만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0-02 (금) 12:00:33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일제시 독립운동을 하시다 여러번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을 헤치고 제헌 국회에 진출, 헌법 제정에 일조하셨으며 초대 농림 장관으로 이땅에 토지 개혁을 일으키셨다. 이 박사의 일인 독재에 항거하시어 대통령 후보자로 두번 입후보, 그 두번째는 사실상 투표에서는 이겼으나, 개표 조작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종신 독재를 노리던 이승만 박사는 그의 수하를 총동원하여 간첩 잡기보다 조작에 더 유능한 특무대를 활용하여 양 명산이라는 이중간첩을 이용해서 선생을 억지 간첩으로 조작하고, 입법부를 통해 야당의원들을 강제 구금한 뒤에 소급입법을 제정한 후에 사법부를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협박하여 자기가 원하는 판결을 내리게하여 합법을 가장한 실질적인 정치적 암살을 자행하여 선생은 타계하셨다. 52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서 드디어 2011120일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서 당시 대법원이 법률 적용을 잘못했음을 시인하고 무죄 판결을 내려 뒤늦었지만, 선생의 인권이 복권되고, 숭고한 정강 정책이 이 나라의 법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런 면에서 조봉암선생의 주의 주장이 부활(復活) 했다고 할 수 있다.

 

925일 조봉암선생 탄신 117 주년 기념일을 지내며, 선생의 일기를 간단히 살펴보고, 미국 정부와 현지 대사가 조 봉암 선생이 무죄임에도 이 박사가 최대의 정적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것으로 간파해서 그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사실을 미 국무부 자료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 이 자료 공표 (비밀 문서에서 비밀 해제)가 여러모로 재심 판결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돌아가신 조봉암 선생은 무죄 판결로 복권과 사실상 부활한 반면에 일인 종신 독재를 위해 정적 없애기를 식은 죽먹듯이 하던 소위 국부 이승만은 조 선생을 없앴다고 좋아했을지 모르나, 그로부터 몇달 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비밀 특사를 보내서 퇴진을 권고하였다. 그 때는 웃고 넘겼지만,해를 넘겨 4.19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발빠르게 그를 강권하여 권좌에서 밀려나게 하고 (자진하야가 아님), 하와이로 CIA 비행기 특등석을 타고 귀양가서 (자진 망명이 아님) 노년에 타국에서 별세하는 비운(悲運)을 당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간략한 일기

 

조 봉암 선생은 독립 투사로서 일제시대에 여러번 옥살이를 하였고, 옥고로 인해 손가락 여러개를 못 쓰게 되었다. 전에 동아 일보 사장을 지낸 정치학자인 김학준 박사가 힘주어 강조한 것처럼 일제 당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공산주의를 통해 조국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에 매진했고, 조 선생은 해방 이후에 인천 지구당책임자로 활동했으나, 당수 박헌영과의 이견으로 공산당 (남노당)을 탈퇴하고 사회민주주의자로 변신하여 1948년 단선에 참가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조 봉암 선생은 국회 부의장에 선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초기 내각에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소위 유상 몰수 유상 분배원칙에 의한 농지 개혁법을 입안하고 성공리에 집행해서 남한에서 수백년 내려온 소작농제도를 없애버리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참고로 이북에서는 여느 공산국가처럼, “무상 몰수 무상 분배원칙으로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제헌 의원을 거쳐 19505.30 2대 총선에도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된 조봉암 선생은 6.25 사변이 일어나, 모두 걸음아 살려라고 피난 가는 통에도, 국회로 가서 문서를 정리하여, 처분 또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보관시킨 다음에 남쪽으로 떠났다. 서울 수복 후에 국회 의장단과 같이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면서 이 대통령이 서울 사수를 발표했으나,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서울을 도피한 사실에 대해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내도록 촉구했으나, 이 박사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점을 시사해준다. 첫째는 이 대통령이 아주 명백한 자기 잘못도 인정할 줄 모르는 제왕적 통치자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둘째는 이 박사가 조 봉암 선생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로 지목하고, 경계심을 갖게 되는 단초(端初)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중인 1952, 이 박사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시 헌법 규정으로는 국회내의 지지가 약해서 당선 가망성이 낮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을 감금하는등 폭압적 방법으로 헌법을 고쳐서 직선제로 바꾸어 힘없는 국민들을 위압하여 거의 절대 다수표를 얻어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일인 독재에 항거하여 대선 출마

 

이 때 조봉암 선생도 출마 했는데, 선생이 출마한 이유는 아무도이 박사가 무서워서 출마할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에 무투표로 당선되어 더욱 오만한 독재를 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그가 출마하자 이시영 선생도 출마했다.

 

그 선거에서 그는 인지도도 낮고 위압적 선거 분위기 속에서 선거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그리 많은 지지표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권력에 맛이 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통폐로, 재선이 된 이승만은 백성들을 위해 뭘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자신의 영구 집권만 꿈꿔서 일찌암치 해괴한 이승만식 45수학이론을 내세워 부결된 삼선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19541129) 세번째 당선의 길을 텄다.

 

3대 대통령 선거는 1956년에 치루게 되었는데, 이때만해도,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1953727), 사회적으로 안정이 어느 정도 되어가고, 교육열이 높아져 이승만박사가 통치 하는한 뭔가 달라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보는 여론이어서, 당시 보수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선거 구호로 못 살겠다, 갈아 보자를 내세웠다.

 

이 무렵 보수계에서는 민주당을 설립하는데, 조봉암 선생도 이에 동참하려했으나, 일부에서 그의 전력에 남노당 연관성이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바람에 참신한 진보 정당을 설립 준비를 하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런데, 보수계의 민주당 후보자인 신익희 후보가 선거 유세차 기차로 이동중에 급서하여 조봉암선생이 유일한 야당 후보자가 되었다.

 

1956515일에 치뤄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박사는 5046천여표로 당선되고, 조봉암 선생은 2164천여표로 낙선했지만, 4년 전 선거 때 보다 괄목할 지지도를 차지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선거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진 대통령 선거

 

3대 대통령 선거도 부정 선거였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부정 사례를 얘기도 못하도록 경찰과 정치깡패들이 구타 연금 등으로 막았기 때문에 그 당시 크게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승만이 물러난 후 언론에 숨통이 좀 트였을 때, 부정 선거 사례에 대한 증언들이 나왔다.

 

1: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든 박종태씨는 자신이 제 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여당측 선거 참관인이었는데, 개표인들이 조봉암 선생표 98장에 이승만 표를 앞뒤에 한장씩 붙여서 이승만 표 100 장 묶음으로 했으며 나중엔 앞뒤로 붙일 이승만 표가 없었다는 얘기를 박종태 의원이 1967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에서 여야 의원 간담히에서 공표했다. 야당의 정의형의원이 도시에서는 야당 표가 나오지만 농촌에서 무지해서 여당 표만 나온다고 핀잔을 받고 시골 출신의 박 의원이 농촌에서도 야당 표가 나오지만 개표시에 표 도둑질 때문에 뺏긴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전례를 든 것이다.

 

2: 부산에서 야당 참관인으로 개표 상항을 관찰한 박문철 씨는 자기 구역에서 조봉암 약 3만 표이고 이승만 약 1 만표로 집계가 되었는데, 자신을 경찰이 연행한 다음에 개표 결과를 뒤집어서 발표했다고 증언했다. 한국 제2의 도시에서도 그 정도였으니 알아볼만한 일이다.

따라서 전국 각 개표소에서 나름대로 창조적아이디어를 내어 이 박사 득표 숫자 올리기를 조작해서 나온 결과로도 이승만 504 만표를 얻고 조봉암 216 만표를 얻어서 유효 투표의 약 30%를 차지했으니 선거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는 말이 옳다고 하겠다.

 

최근 김종필 전 총리가 그의 회고록(50)에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불과 75 만표 차로 이겼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 선거를 염려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기술했는데,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이 웅변으로 김종필씨의 글을 연결해준다.

 

하나는 1973년에 발생한 김대중씨 납치 사건이요 (사실상 살해 계획이어서 그의 정적을 없애 버리는 것이요, 아직까지 누가 시켰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다음은 친위 구데타인 유신을 통해 (1972/10/17) 선거자체를 없애버려 선거라는 민주 정치의 악폐(惡弊)를 근절하려 했다. 이를 보면 제왕적 독재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조 봉암 선생 제거를 구상한 이승만 박사와 그의 뜻을 따른 졸개들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개표 부정) 으로 겨우 당선된 이 박사는 조봉암 선생을 두고는 영구집권 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수하들에게 힌트를 주기 시작해서 소위 니들이 알아서 기게만들었다.

 

우선 간첩을 잡는데 보다도 만들어내는데 더 귀신인 김창룡 (그는 너무 잘하다가 부하의 총에 죽었다) 이 지휘하든 특무대에서 HID 소속으로 남북간 비밀 교역 종사자인 양명산을 일제 때부터 알고 지내든 조봉암 선생에게 생활비를 보태게 하고는 그 돈이 이북에서 온 돈이고 북한의 인사와 서신을 교환했다고 고문을 통해 조작해서 조 선생을 간첩으로 몰았다.

 

그외 행정부 사법부등 간여한 인사들이 많으나 일일히 열거하지 않기로 하겠다. 조봉암 선생이 후에 사면 복권된 상태에서 하수인들 즉 이 박사의 졸개들을 나무랄 수 없고 살인 명령을 내린자는 이승만 그 한 분일 따름이므로 다른 분들은 용서하고 잊어야한다고 믿는다.

  


 

국무 회의등을 통해 조 봉암 제거를 암시한 이승만 어록

 

최근에 밝혀진 이 박사의 국무 회의에서 행한 조봉암 선생에 대한 제거를 사실상 힌트를 주는 언행이 많아 주목된다.

 

* 1958 113일 조봉암 선생이 경찰에 자진 출두한 다음날(114) 경무대 국무회의:

 

내무부 장관(이근직) : 조봉암 이외 6 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중입니다.

이 박사: "조봉암은 벌써 조치됐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311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 홍진기에게 이 사건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

홍진기 장관: "현재 공판중이나,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양명산)이 있으니 유죄에 틀림없습니다.

이 대통령: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라면, 전에는 증거 없이 기소한 것처럼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이렇게 주의를 줬다.

 

* 그뒤에 1심 판결이 나오자 74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 박사: “이러한 판사들은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라명서 분개했다. (일심 판사는 연말 연임에서 제외되었다.)

법무부 장관: 1심 판결에 검찰이 즉시 항소하였으나 고법, 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0월에 열린 2심에서 조 인구 검사는 조봉암 선생에 사형을 구형했다. 밑에서는 위에서 내는 소리에 장단을 잘 맞추고 있었다. (그 당시 세간에서는 이 박사가 주재하는 경무대 국무회의를 어전회의라 불렀다.

 

그리고, 4.19 이후에 전에 미군 정보 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는 고정훈씨는 김창룡 특무대장으로부터 이 박사가 조봉암 선생을 제거할 것을 재가하는 문서를 자기에게 보여주었다는 증언이 있었고, 19581월초 미국 정보기관이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 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는 1958113일자 국무부 수신 전문 520호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이 박사가 이 모든 움직임의 시발점이라 볼 확률이 높다.

 

미국의 양다리 걸치기를 절대적 지지로 믿은 조봉암과 윤길중

 

그러면, 조 봉암 사건에 대한 미국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주 드물지만, 일부에서는 조봉암 선생의 체포와 사형은 미국이 기획하고 사주(使嗾)했다는 설을 주장하는 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주장이고, 이런 종류의 글을 쓰신 분들은 한쪽만 살피고 다른 쪽은 간파한 큰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투의 글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분의 글에 의하면, 한 미군 정보기관의 장교가 오모 검사에게 조봉암 선생과 공산당의 관련 설을 제보해서 조 선생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인데, 이는 터무니 없는 낭설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미국이 조봉암 선생을 이승만의 대타로 키우고 지원했다는 설이 있다. 이를 주장하는 분은 강원룡 목사이며 그가 여러 언론에 대담을 통해 얘기했는데, 다우링 주한 미국 대사의 활동과 본국에 보낸 보고서 그리고 미 국무부내의고급 간부들 사이의 의견 교환을 살펴보면 상당히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후진국(현재 미국에서는 Client Country 라고 하며, 예전에 중국에서는 조공국이라 했다)의 지도자가, 자기네 마음에 안들게 통치하는 것을 방지하고 통제하기 쉽도록 항상 대타를 키우고 있다. 필리핀과 한국이 아주 좋은 예였고, 박 대통령 후반기에 김 대중 씨를 은연중 지원해서 박 대통령을 견제하려 했다. 여기까지를 믿으신다면, 강 목사의 설도 수긍이 가는 설명이라 하겠다.

 

강 목사의 얘기를 더 소개하겠다: 조봉암선생과 그의 측근에 의하면, “토마스라는 미국 사람이 (프레드 토마스 대사관 참사관으로 밝혀짐) 조 선생에게 접근해서 미국 대사도 만나게하고, 8군 사령관도 만나게 했으며 이 박사가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데당신은 평화 통일을 주장하므로 우리 생각과 같다. 그 사람들이(미 대사와 8군 사령관) “남북 문제는 평화적 해결 외엔 방법이 없다. 그 일에는 당신이 적임자니까 당신이 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통령 출마를 권유했으며, 나온다면 우리가 밀어 줄터인데, 단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그 문제는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하고, 매일 아침에 미8군의 미국 사람이 와서 조선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조봉암 선생뿐만 아니라, 그의 최측근인 윤길중 (나중에 국회부의장이 됨) 간사장 역시 그렇게 믿었다고 강 목사에게 확신에 찬 언급을 했다고 한다. 그 두분이 (조봉암과 윤길중) 얘기는 안했으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미국측에서 상당액의 자금 지원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영어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 미국이 그들을 지원한다고 믿었을 순진무구한 사람도 이니기에 재정 지원까지 했기 때문에 믿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일화(逸話)를 소개한다. 1971 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박 정권은 자신의 대항마로 출마한 김대중씨의 선거 자금 줄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때 감히 어느 기업가나 재력가가 김 대중씨에게 선거 자금을 댈 수 있을까? 이북이나, 일본에서 들어올까 하는 것도 더 철저히 감시 했으나 돈 들어 올 구멍이 없는데도 김대중씨는 어디서 융통했는지 모르겠으나 선거 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선거가 끝나고나서, 정부 쪽에서 내린 김 대중씨 자금 쏘스는 미국 대사관으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이 대한민국에 경제 원조를 할 때 일부를 미국측에 원화로 지급하는데 이를 대충 자금이라 부르고, 이 돈은 미국 측에서 사용하는데, 그 사용처에 대해서는 문의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미 대사관에서 김대중씨에게 대준 선거 자금은 이 대충 자금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미국이 현 집권자를 지원하되 백지 위임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강 목사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조봉암 선생과 윤길중이 미국이 자기네만 전적으로 민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전형적인 이중 플레이는 생각 못했다는 점이다.

 

많은 분들은 지금도 미국이 조봉암 선생의 구명 운동을 (김 대중씨 경우와 비교해서) 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있다. 또한 미국이 조봉암 선생이 혁신계 인사였기 때문에 그의 제거를 은근히 바랬다고까지 말하는 부류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도 없이 내놓는 억측(臆測)에 불과하다.

 

지금 되돌아보면, 한국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궁극적으로 이승만 박사를 퇴진시키는 일등 공신은 다울링 대사라 하겠다. 그는 조봉암 선생 검거와 진보당 탄압을 신속히 본국에 보고하고, 이것이 곧 다가오는 민의원 선거뿐만 아니라, 2 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최대 강적을 미리 제거하려는 음모로 보고 한국 사태 추이를 신속히 보고하며 이에 따른 훈령을 한국 정부(이 박사)에 전달하여 미국 측의 불승인 내지 불쾌감을 가감 없이 신속히 전했다.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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