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쏘련 수상 스타린을 1943년 11 월에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처음 만나 대일 참전을 요청한 것은 미국이 진주만 공격이후 태평양 상의 그 수많은 섬에서의 싸움에서 일본군의 소위 결사 항쟁에 너무나 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쏘련이 북쪽에서 제2 전선을 펼쳐서 일본을 협공한다면 미군의 피를 덜 흘리며, 전쟁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국제 사회에서는 그냥 주는 “공짜”는 없고 받는 것에는 반대급부(反對給付)를 주게 되는데, 로즈벨트가 스탈린에게 약속한 것은 노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빼앗긴 것을 되 찾게해준다는 것 뿐이었다. 즉 미국은 쏘련 참전으로 매우 큰 이득을 얻게 되지만, 미국 것으로 내주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예를 들어, 알라스카를 도루 돌려 준다거나 하지않았다) 아주 좋은 흥정을 한 셈이다. (중국 관계 예: 여순 대련 만주 철도 건등은 쏘련이 전후 약 3년만에 철수했기 때문에 다루지 않음)
이를 두고 로즈벨트가 너무 양보를 했다는 것은 뭘 모르고 하는 말이다. 1945 년 8 월 15 일에 일제가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독립은 못 했지만 우선 일본의 속박으로 벗어났으나, 법적으로 보면 일제의 지배에서 조국은 가엽게도 미쏘 양대 전승국의 분할 통치 (군정) 하에 들어 가게 되었다. 우리의 기쁨은 곧 사라지고 그 때부터 분단의 고통을 지금까지 이어 왔다.
우선 일본의 항복을 가져 오게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는 쏘련의 대일전 참전과 일본에 대한 원자탄 투하인데, 그 두 가지 극적인 사건이 어뗳게 일어났는지를 자세히 알고 고마워 할 일은 감사해야 하고 잘못 된 것은 그런대로 짚어 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우선 설명드리기도 쉽고 또한 독자들이 이해 하시기도 쉬운 쏘련의 참전부터 살펴 보자. 위에 잠간 운을 띄운 것과 같이,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이 스탈린 수상에게 요청해서 그가 응낙했고, 또한 1945 년 2 월 얄타 회담에서도 다시 미측이 쏘측에 참전을 다짐하고 , 이에 스탈린은 전쟁이 끝나고 3 개월 후에 개전하겠다고 확약을 했다. 그러므로 독일이 연합국에 5 월 9일 무조건 항복하였기 때문에 8월 9일 쏘련이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개전한다는 것은 얄타 회담 3거두 (따라서 미영쏘 3 대국) 사이에는 기정사실화 되었다. 다시 말하면 쏘련이 난데 없이 그해 8월 9일에 대일 개전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3대국 국민들과 전세계는 그 일을 알 수 없을 테지만.
그러면, 원자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사용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그 영향을 받은 우리들이 알고 넘어 가야한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원자탄 개발의시초는 아인슈타인의 권고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미국, 독일, 일본, 쏘련 등 제 2차 대전 참가국들은 누가 먼저이기전에 모든 나라들이 원자탄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될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미국에 관한한, 헝가리 출신 과학자 질라드(Leo Szilard) 씨가 영국에 있을 때 어느날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핵분열로 가공할 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서 이를 어느 정도 이론적 체계를 갖춘 다음, 미국에 와서 같은 망명객으로 먼저 미국에 와서 명성을 떨치든 아인슈타인의 이름으로 로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도 연구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보이니 그들에 앞서 성공시켜야 한다고 청원을 하였고, 이 건의를 받아들여 핵 개발 사업을 “맨하탄 프로젝트”라 하고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Robert Oppenheimer) 씨가 책임자가 되어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아주 비밀리에 추진되었으나, 언제 완성되고 실험이 성공 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얄타 회담에서 로즈벨트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보다 확실한 대일 참전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국으로서는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손해 볼 걱정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은 독일 항복을 불과 4 주 앞 두고 운명하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나자, 미국의 공화당측은, 전임 로즈벨트 대통령이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비난하는 것은 동유럽과 중유럽을 쏘련에 그냥 넘겨줬다는 것이다. 쏘련이 공으로 먹은 것이 아니고, 나치 독일을 무찌르고 많은 군인들의 피를 흘려서 차지한 땅었다. 미국과 영국이 나치에서 해방시킨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스 등의 내정에 대해서 쏘련에 일언반구의 발언도 허용하지 않은 상황에서 쏘련이 피흘려 얻은 나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상호주의에 어긋난다고 평하는 인사들이 많았고, 또한 얄타 회담에 참가했던 당시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Edward Stettinius) 씨는 회담 분위기는 미국과 영국이 감내놔라 뭐내나라 할 입장이 못 된다고 했으며, 오히려 쏘련이 더 많은 양보를 했다고 말했다. 즉 T -34 전차를 앞세운 쏘련의 적군은 독일 전체를 점령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추고 있었으나, 미국과 영국에 더 넓고 좋은 독일 땅을 차지하게 하였으며, 독일 수도 베를린도 분할토록 한 것은 스탈린의 선심(善心)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얌체족들이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까, 새로 대통령이 된 준비 안된 트루만은 원자탄 계획을 처음으로 브리핑 받고, 전임자와 차별화를 위해 모든 것을 로즈벨트에게 뒤집어 쉬우고, 원자탄 계획이 성공하면, 쏘련의 참전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기로 작정했다.
트루만은 대통령이 된 초기에는 대쏘 협조책을 그냥 유지하려고 해서 5월 초에 로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든 합킨스(Hopkins)를 모스코바에 보내서 대쏘 협조 체제를 유지한다는 신임 트루만 대통령의 메세지를 전했고, 이에 쓰탈린은 로즈벨트의 구상인 “한국의 4 개국(미쏘영중) 신탁 통치” 약속을 이행토록 할 것이라고 얄타 비밀 협약 내용을 전언했다.
한편 트루만 대통령은 얄타 회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외교 가정교사가 필요했는데, 로즈벨트의 측근이어서 얄타 회담에 참석해서 회담관계기록을 충실히 하였고, 자신의 의정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준 번즈(Byrnes) 씨를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7월 3일에 국무 장관으로 전격 기용하였다.
첫 핵 실험이 성공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전쟁 상(War Secretary) 스팀슨이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임시 위원회(Interim Committee)를 구성해서 원자탄 사용 시기, 대상 등을 토의하였다. (소속 위원들은 이 글 말미에 붙임) 당시 트루만의 고문이었든 번즈가 대통령의 개인 대표로 참석했다. 그가 권고한 안을 위원들이 동의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5.6.1):
*위원회는 원자탄을 일본에 대해서 가급적 빨리 사용한다.
*주변에 근무 노동자들의 주택이 있는 공장 지대에 사전 경고 없이 투하한다.
*투하 대상지는 군사 지역을 전쟁상이 선정토록 조언한다.
이에 따라 번즈 고문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위원회 합의 사항을 전달했다.
한편 위원회는 원폭 투하 예정지로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카, 나가사키 및 교토로 선정했는데 스팀슨 장관이 교토는 일본의 고도로 문화 시설이 많다고 비토를 놓았다. 이에 대해 장관 자신이 신혼여행을 그곳에서 보낸 것도 일부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임시위원회의 합의 사항이 알려지자, 시카고 멧 랩(Chicago Met Lab)의 제임스 프랭크 (James Franck) 등이 원자탄 개발을 주도한 질라드 씨의 영향을 받아서 원자탄 이론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만간 다른 나라들도 원자탄을 만들 수 있게 되어 군비 경쟁을 유치시키고, 산업 시설과 인구가 대도시에 밀집(密集)된 미국이 산업이나 인구가 국토 전역에 펼쳐진 다른 나라에 비해 원자탄 공격을 받는 경우 피해가 더 클 것이므로 미국이 먼저 핵을 사용하는 경우, 세계 여론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레오 질란드와 프랭크 씨는 워싱턴으로 가서 6월 12일 스팀슨 장관을 만나 그 보고서를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부재중이라고 하여 보좌관에게 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든 중에 맨하탄 프로젝트 진전이 호조를 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 항복 후에 열기로 한 전후 처리 문제를 다룰 포츠담 회담 개최 날짜를 2주나 연기하였고, 번즈 장관을 포츠담 회담에 동행시켰다. 즉 트루만은 가급적 자신이 회담에 참가한 동안에 원폭 실험이 성공하여 힘으로 스탈린을 눌러 볼 심산(心算)이었다.
뉴멕시코에서 행한 원자탄 실험이 성공한 것은 7월 16일 포츠담 회담 개막한 날이었으나, 그날의 보고는 너무 간략하여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 뒤 7월 21일 맨하탄 프로젝트 책임자인 그로브스(Groves) 장군으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받고나서, 트루만 대통령은 쏘련의 참전 없이 독자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졌다.
그래서 그는 그날부터 모든 문제를 원자탄으로 해결하러 들었다. 그 첫 번째 조치로 보고받은 당일(7월 21일) 원폭을 일본에 투하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7월 24일 스탈린에게 휴게 시간중에 짬을 내서 통역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다가가서, 마치 지나가는 얘기인 것처럼 아주 겁내주는 무서운 위력을 가진 신무기를 가졌다고 말하자 스탈린은 놀래지도 않고 그저 담담히 축하한다고만 응대했다. 멀찌감치에서 눈여겨 보던 보좌관들이 좀 실망하였고 아마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들어서 그럴지 모르니 다음날 그 내용을 알려고 참모들이 질문 공세를 펼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어 예상이 빗나가 오히려 트루만과 그 일행이 더 어리둥절하게 됐을 뿐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암호를 해독(解讀)했기 때문에 일본이 쏘련을 통해 항복 주선을 요청한 사실도 알고, 일본의 해외 주재 무관 등으로 부터도 천왕제만 유지되면 항복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통해 모든 일본의 장병들이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가 따를 뿐이라고 경고/협박했다.
그런데, 트루만은 7월 25일자 일기에 “원자탄을 지금부터 8월 10일 사이에 사용할 것이라고 적었다. 트루만은 일본이 7월 28일 예상대로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절했다고 하나, 하세가와 교수에 의하면 일본은 거절한 적이 없고 다만,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고, 즉 묵살(默殺)했다는 것이다.
트루만은 이미 원자탄을 일본에 투하할 것을 번즈와 사전 합의하고 “무조건 항복”이라는 받아들일 수없는 조건을 내새워 “무응답=거절”로 해석해서 원자탄을 투하할 명분 쌓기를 한 셈이다.
아이젠하워를 위시한 그의 모든 고위 장성들이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임시위원회 합의를 내세워 8월 6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탄(꼬마 Little Boy)을 투하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을 10 여만명 살상하면서 트루만 대통령은 미군의 인명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정당성의 논리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원자탄도 소이탄 등 이미 사용주인 다른 무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으로 무기를 만든 것은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가 바라던 즉각적 항복 소리는 들리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미국에서 이미 여러 도시를 선정해서 엄청난 폭격을 해왔기 때문에 또 하나의 융단폭격(絨緞爆擊) 정도로 이해해서인지 일본 정부의 반응은 전무하였다.
한편 쏘련은 8월 8일 저녁에 몰로토프 외상이 일본 대사를 초치하여 일본이 포츠담 선언에 응대를 않고, 또 연합국의 요청에 따라8월 9일 자정을 기해 양국간에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고 통보하고, 150만에 달하는 쏘련 군은 독쏘전의 명장 바실리에프스키 원수의 지휘아래 서, 북, 동 3개 방면으로, 압도적인 탱크 등 기계화 부대를 선두로 질풍노도와 같은 속도로 진군햐여약 일 주간 전투로 만주 전역과 나진 청진 등 북한 지역을 휩쓸었다.
놀랍게도 태평양 섬에서 미군에 결사 항전으로 많은 미군의 전사상자(Casualties)를 만들어 냈던 일본 군인 60 여만 명이 쏘련군 포로가 된 것에 대해 아직도 미군 측에서는 의아해 마지 않는다고 한다.
쏘련군이 대일 전에 참전하자 일본 어전 회의가 열리고 한가닥 믿고 있던 쏘련마저 참전하니 그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고, 사할린, 천도 열도 쪽에서 남하하는 쏘군이 그들을 점령하고 나서, 홋카이도 쪽으로 몰려 온다면 방비할 도리가 없을 터이므로 항복하여 일왕제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한편 미국은 쏘련 참전날 일본에 또 하나의 원폭을 투하하러 고꾸라로 향했으나, 그 상공이 짙은 구름이 끼어 있어서 대타 후보지인 나가사끼에 '뚱보(Fat Man)'를 투하했고, 이후로는 실험용이 아닌 원자탄 실탄이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러고 며칠 뒤인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자기네 원자탄 두발에 일본이 손 들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받아들였으나, 일본계 미국인 하가와 교수는 원자탄이 아니라, 쏘련군 참전이 일본 항복의 직접적 원인 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는데, 항복 직전의 일본즉 고위 인사들의 자료를 철저한 검증(檢證)한 것이어서 대단한 지지를 받고있다.
한편 원자탄 투하가 반드시 일본의 항복만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쏘련에 대해 실력과시를 하여 전후 질서개편시 쏘련의 세력 팽창에 대한 억제책으로 행한 것이고, 그래서 트루만 대통령이 실제적으로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냉전을 시작했다는 수정주의 학설이 많은 호응을 받고 있는데, 이 학설을 주장하는 분은 알프로비치(Gar Alperovitz) 교수이다.
원자탄 사용과 투하 대상지등을 선정한 임시위원회 구성 요원들을 살펴보면, 사실상 트루만의 개인 대리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번즈 고문이 이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세부 사항은 구성원들에게 발언권을 주지만 큰 테두리는 번즈가 대통령을 움직여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종 결정을 번즈가 권고하고(Recommend) 위원들이 동의한다(approve)는 문장을 보면, 번즈 외의 의원들은 거수기 였다는 감이 든다. 따라서, 적어도 취임 초기의 트루만 대통령은 번즈의 손아귀에 놀아난 감이 있어 보인다.
* 임시 위원회 구성원
번즈 (James Byrnes): 트루만 대통령의 개인 대표, 랠프 바드 (Ralph Bard): 해군 부차관, 윌리암 클레이턴 (William Clayton): 국무부 차관보, 배너바 부쉬 (Vannevar Bush): 과학 연구 개발청장, 전 MIT 공과 대학장, 제임스 코난트 (James Conant): 하버드 대학교 총장이며 저명한 화학자, 칼 캄턴 (Karl Compton) : MIT 총장이며 저명한 물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