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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바로 알자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07-11 (토) 00:33:58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은 누구 덕분인가? 하는 논란이 가끔씩 분분한데, 우수하고 근면한 우리 국민 전체에게 돌리고 싶고, 꼭 한 분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한국전에 휴전 조인을 성취시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킨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공로를 돌리고 싶다.

 

휴전 당시 이승만 박사가 현직 대통령인데다가, 그 분이 용맹무쌍하셔서 “북진 통일”을 단독으로라도 이루겠다고 휴전을 거의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휴전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전혀 감사할 줄 모르고, 틈만 나면 아이크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아이크의 눈밖에 나서 4.19가 일어나기도 전이 1959년 여름에 비밀 특사의 내방을 받아 하야를 권고 받고, 그다음 해 4.19로 권좌에서 밀려 났다는 것을 전 회에 기록했다.

 

휴전이 우리 한국민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는10 년이 넘게 전쟁을 계속해온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예를 보면 우리가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 두 나라에 무슨 건설과 발전을 기대하겠는가? 요즘도 심심찮게 반군의 공격으로 얼마가 죽었다는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이점에 동감한다면, 아이젠하워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취임한지 근 반년만에 초고속으로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휴전을 성취했으며, 한반도에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는지를 살펴보자.

 

우리 모두는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944 년 6월 6일 노르만디 상륙 작전을 성공리에 이룩하여 유럽 대륙에 제 2 전선을 구축하고, 나치 독일을 소련과 함께 동서 양 측면에서 압박을 가해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큰 공훈을 세운 것은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크에 관해서 알고 있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평화 주의자이고 인명을 존중하는 덕장이었다.

 


그는 독일이 항복한 다음 분할된 독일의 미군 점령지역 사령관으로 6 년간 전쟁으로 독일의 곳곳에 보이는 엄청난 폐허와 인명 손실을 직접 눈으로 참상을 새겨보고 전쟁은 가능하면 피하고, 할 수 없이 한다고 해도 인명 손실을 줄이는 방향으로 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 지역의 전후 처리를 위해 1945 년 7월 전승국 정상들이 모인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 회담중에 미국에서 시행한 핵실험이 성공하자 이 신무기를 일본에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아이젠하워는 그 때 이미 일본은 미 공군의 융단 폭격으로 많은 도시가 대파되고 인명 피해도 컸고, 또 전쟁을 더 오래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조만간 항복할터인데, 원자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얼마나 인명을 존중하고 부하들을 사랑하는지는 다음 예에서 잘 들어 난다.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 독일측 전선이 마구 무너지니까, 몽고메리 등 영국 측에서 조금만 더 진격하면 독일 수도 베를린도 손쉽게 장악하 수 있을터이므로 진격을 은연중에 부축였다. 그러나, 아이크는 당장 그 의견을 거부했다. 다른 장군들 같았드라면, 적의 수도를 선점하는 것은 아주 큰 공훈이므로, 훈장도 받고 승진도 하니까 (아이크의 경우에는 물론 더 올라갈 계급이 없었지만) 좋아라 신나서 덥석 제의를 받아들이겠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여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즉, 첫째, 베를린은 이미 얄타 협정에 의거하여, 소련의 진공 목표로 할당되었고, 그지역은 역시 소련 분할 점령지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설령 베를린을 선점한다 하드라도, 소련에 그 지역을 이관해야하기 때문에, 왜 쓸데없이 미군의 인명 손실까지 감당하며 소련에 돌려줄 땅을 침공해야 되는냐. 둘째로, 만약 그와 같은 사안이 연합국측 공식 계통으로 명령이 내려온 것이 아니고, 전우로서 조언한데 지나지 않으므로 따를 수 없다고 밝혔다.

 

전후에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된 뒤에, 베를린을 선점하지않았다고, 아이젠하워한테 트집을 잡는 인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얄타 협정 내용도 모르고, 저하고 싶은 말만 해댄 것이었다. 실제로,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위한 작전에서 10 만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다. 만일 미군이 단지 선점이라는 영예만 탐해서 독일 수도로 진격했더라면, 쓸어지는 독일도 수도 사수에 마지막 안간힘을 했을 터이니까,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고, 아이크의 용단으로 그러한 피해를 미연에 방지했다.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미군들이 체코의 북서부까지 진공했으나, 그 지역을 모두 소련에 인계하고 물러 갔다. 즉, 베를린을 점령했다손 치더라도, 이처럼 인명 손실을 무릅쓰고 차지한 땅을 소련에 넘겨줬을 것이다.

    

아이크 전쟁 종식 구호로 대통령 당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고, 전시에 동원되었든 군인들이 복원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군복무 혜택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싼 이자로 집도 장만하였으며, 또 하나 종전의 큰 사회 현상으로 “베이비 붐”이 일어났다. 그런데, 1950년 여름에 난데 없이 Korea 라는 나라에서 전쟁이 났다고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선전 포고도 없이 군대를 보내고, 지역 방위군 (소위 주말 군인)을 현역으로 소집할 뿐만 아니라, 다시 징집을 실시하여 젊은 애들을 뽑아 단기 훈련을 거쳐 전선에 보냈다.

 

미국의 명장 맥아더가 인천 상륙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38 선을 넘지말라는 중국의 경고도 무시한채 한만 국경으로 기세 좋게 올라가며 “크리스 마스는 집에서 보낸다”고 큰 소리를 탕탕 칠 때까지는 모두 응원의 박수를 보냈으나, 11 월 하순에 평안 북도 산골짜기에서 중무기는 고사하고 일인당 소총도 한 자루씩 가지지도 못한 오합지졸(烏合之卒)로 여겼던 중군 인민 지원군에 생각도 못한 참패를 당해 엄청난 피해(사상자)를 당했다. 많은 군인들이 포로가 되고, 군수 장비를 내버리고 걸음아 나살려라고 도망쳐 나오기에 바빴다.

 

크리스마스 때 돌아올 남편과 자식을 기다리든 미국의 군인 가족들은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들을 맞는 대신에, 그들이 죽었거나, 다쳤거나, 포로로 잡혔다는 통보를 받아서 그때부터 한국전은 미국민들에게 호응도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전쟁에 적극 개입한 트루먼의 인기가 떨어져, 그는 재선에 나가지 않는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한국전을 조기에 종결시키겠다는 제 2차 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 원수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고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 34 대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이에 앞서 아이크는 11월 선거를 10여일 앞둔 디트로이트 유세에서 “I Shall Go To Korea” 라는 구호를 내세워 전쟁에 염증이 난 유권자들의 폭발적 인기를 모아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 되었다. 그는 당선되면 대통령 취임 전에 한국 전선을 직접 둘러 보고 어떻게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크, 많은 반대 불구하고 휴전을 성립시키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그의 선거 공약대로 1952년 12월초에 한국 전선에 가서 3일 동안, 각급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사병들까지 만나보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 하였다.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과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고 확전(擴戰)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리도록 한 요소는 누구의 의견이 아니라, 정찰기를 타고 전선의 현황을 직접 자기 눈으로 살펴 보고 내린 그의 경험에서 나온 판단력이라 하겠다.

 

 

그가 본 한국의 중부 전선은 가파른 산세를 보이고 적진에는 촘촘히 포대로 쌓여 있었다. 땅 몇 뼘을 더 얻겠다고 우리 (미국) 자제들이 피를 흘리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판단했다. 그가 D-Day에 노르만디에 상륙시킨 연합군은 서유럽의 지세가 대체로 평탄하여, 탱크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가서 승리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처럼 가파른 산에서는 탱크를 쓸 수 없으며, 고지전을 하려면 보병이 발로 산을 타고 올라가며 싸워야 하는데, 너무 인명 피해가 많으므로 전쟁을 연장하면 할 수록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되므로 명예로운 마감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이크는 휴전 타결만이 한국전에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방지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해 4월 8일 안전보장회의(NSC)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을 분할된 상태로 휴전을 달성하겠다는 그의 결심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덜레스 국무 장관과 윌슨 국방 장관이 강경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덜레스 장관은 미국이 세계에 신뢰를 견지하려면 중국에 강판치를 날려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이크는 일주일 후에 열린 미국 신문 편집인 협회 모임에서 한국전 휴전 구도를 공표했다. 이 회의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아이크의 8년간 대통령 집권 기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외교 정책 연설로 손꼽히는데, 누가 냉전(冷戰)을 무력적으로 이겨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밝혔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포 한발, 로켓포 한 발, 그리고, 새로 진수시킨 전함 한 척이 모두 헐벗고, 굶주리는 우리 백성들로 부터 도둑질 한 것이나 다름 없다,,” 라고 군비 증강 주장자들을 비난했다. (후에 그의 유명한 군산 복합체 -Military-Industrial Complex-연설로 이어감. 다음에 다룰 것임)

 

한편, 그는 국가간의 신뢰가 되살아난다면, 편파도 아니고, 응징도 아닌 평화의 달성을 목도하게 될 것이며, 이 길로 나가는 거대한 첫 걸음이 한국에서의 명예로운 휴전 달성일 것”이라며 휴전에 대한 결심을 피력했다.

 

그의 외교정책 발표가 있은다음 휴전 회담 진도에 박차가 가해졌는데, 이 박사는 휴전 교섭에 난항을 조성하려 했다. 아이크는 단호하게 이박사에게 경고했다. “만일 이박사가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반도의 모든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국군에 대한 모든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도 중단하겠다.” 이박사는 주저앉아 버렸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일부 인사들은 지금까지 어처구니 없게 이 박사의 외교 수단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외교는 국제 사회에서 어디까지나 냉혹한 힘의 무도회일 따름이다. 당시 쥐뿔도 없이 미군에 의존하고 미국 원조로 겨우 나라 살림을 꾸려가는 처지에 이박사가 뭘 믿고 큰 소리를 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알려진대로, 불필요한 반공포로 석방으로 금성천 돌출부를 뺐기고 3만여명의 인명 피해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크의 분노를 사서 잘못했으면 그 당시(1953년)에 실각(失脚) 또는 고 딘 디엠처럼 목숨조차 잃었을지도 모를 엉뚱한 모험을 했다. 이 박사는 최대 최강의 후원자였던 맥아더가 면직되자 적어도 대미 관계에 있어서는 날개 없는 천사꼴이 되었고, 덜레스가 휴전에 반대 의견을 냈으나, 그 역시 종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전국민적 맨데이트(절대적 지원) 를 얻은 아이크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한국전 휴전이 성립되자, 의회 지도자 가운데 비평자가 많았는데, 인디아나 주 윌리엄 제너 상원의원은 휴전이 유화주의자에게 배치는 마지막 기념패라고 빈정대고, 하원의장인 죠 마틴은 아이크가 승리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트루먼이 그런 휴전에 동의했드라면 탄핵감이었을 것이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이크는 모든 비판을 무시하고, 공보 비서인 제임스 해거티에게, “어쨌든 전쟁은 끝났어” 한국전에 자식을 보낸 여느 아버지처럼, “내 아들(존 아이젠하워 소령)도 곧 귀국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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