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9일 군대로 끌려간 다음날 논산 수용연대는 내게 보급품이라는 이름으로 군화, 전투복, 전투모를 비롯하여 양말 세 켤레와 위,아래 속옷 각각 세벌 등을 지급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 제대 하는 순간까지 이 보급품은 아니 이 보급품의 숫자는 군 생활 내내 나를 묶어 놓았었다.
수용연대에서 훈련소로 들어갈 때 보급품 점검을 했다.
“양말을 든다. 실시!” 하는 조교의 명령에 따라 연병장에 도열한 훈련병들은 모두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한 켤레씩 양말을 들고 한 켤레는 입에 문채 양말을 흔들었고 “빤쓰를 든다. 실시!”하는 소리에 양 손에 하나씩 그리고 머리에 빤쓰를 쓰고 마구 흔들어 댔다.

논산 훈련소 각개전투 훈련장의 진흙 언덕은 거친 광목으로 만들어진 흰색 사각형 빤쓰들을 빨아도 빨아도 빠지지 않는 천연 황토색으로 물들였지만 작대기 하나를 자랑스럽게 달고 훈련소를 떠날 때는 색깔에 관계없이 “빤쓰 세 개!” 라는 숫자만이 중요 했다. 논산에서 광주로 그리고 광주를 떠날 때 나는 또 다시 “양말 세 켤레!” 와 “빤쓰 세 개!”를 외치며 더불백을 꾸려야 했다.
물론 훈련소와 교육대에 머무는 동안 내게 늘 빤쓰 세 개와 양말 세 켤레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없어지는 빤스와 양말 심지어 모자와 군화를 지키기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는 빤스에 이름을 써 놓는 다거나 군화에 ‘무좀’이라고 써 놓는 것으로도 막을 수 없었고, 어느 날 마침내 단 한 벌 밖에 남지 않은 빤쓰를 빨아 빨래줄에 걸어 놓고 이를 지키기 위해 빨래줄 아래 홀랑 벗은 채 마를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있었던 기억도 있다.
그럼에도 “병영의 기적”은 퇴소 할 때가 되면 보급품의 숫자가 다 맞춰 진다는 것이었고 나 역시 그 기적의 효과로 자대배치를 통해 제대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군대 보급품은 귀중한 것이었다. 사병들에게 지급되는 것이야 질보다는 숫자의 문제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제대와 직접 관련된 생명 같은 것이어서 어디를 가든 항상 ‘양말 세 켤레, 빤스 세 개’를 외우고 다녀야 했다. 그 이유는 양말과 빤스, 군화와 전투복이 군대의 비품이라는 것이었으며 이 보급품들은 국민의 피와 같은 세금으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찬주가 가지고 있는 냉장고 9대가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참에 장군이라는 놈들을 모두 조사해야 한다. 곳간 문을 아무리 굳게 잠근다 하더라도 쥐새끼들이 곳간 안에 눌러 앉아 살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공 내전 중, 농가에 들어가 닭을 훔쳐 먹은 병사를 사형 시켰다는 마오쩌뚱의 일화가 생각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