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페덱스에서 출발했다. 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 사분의 일 정도 찼을까? 크고 작은 박스가 컨테이너 바닥에 쌓였다. 그냥 가다간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지지봉 3개를 받쳤다. 15번 고속도로는 왼쪽에 산맥을 끼고 뻗었다. 네이슨이 지금까지 간 본 곳 중 솔트레이크시티가 가장 좋았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절경(絕景)이었다.
얼마 후 6번 도로를 타고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 산맥 사이로 난 고개를 넘어갈 것이다. 길은 191번 도로로 이어져 스패니쉬 밸리(Spanish Valley)를 통과한다. 계곡이 깊었다. 운전에 더 신경 쓰느라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적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길 외에는 안 보였다. 밤새 길만 보며 달렸다. 네이슨은 이날 가장 편히 잤을 것이다. 보통은 중간에 설 때 10마일 앞서 네이슨을 깨운다. 오늘은 따로 정해둔 트럭스탑이나 휴게소가 없었기에 가다가 눈에 띄는 트럭스탑에 내가 알아서 세웠다. 30분 휴식을 취한 후 내 운전 가능 시간이 40분 정도 남았을 무렵까지 달렸다. 네이슨은 트럭이 Albuquerque에 위치한 한 트럭스탑에 들어설 무렵 깼다.
간밤에 유타 - 콜로라도 - 뉴멕시코 순으로 왔다. 뉴멕시코에 오니 서부영화 풍경(風景)이 다시 나왔다. 전 날 낮에 쇼핑하느라 잠이 좀 부족했지만 산악지대를 지날 때는 괜찮았다. 평지로 나오니 조금 피곤했다. 마땅히 차를 세울 곳이 없어 계속 달렸다. 도로가에 차를 세우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네이슨이 운전대를 잡고 다시 출발했다. 나는 경치 구경도 잊고 잠을 청했다. 그 사이 트럭은 뉴멕시코 - 텍사스 - 오클라호마로 이동했다. 중간에 텍사스를 지날 때 잠깐 일어나 바깥 경치를 봤다. 사방이 평평했다. 초원이거나 밭이거나 목장이거나. 대규모 풍력 발전 단지도 있었다. 텍사스의 소떼는 검은 색이 아니어서 그런지 흙도 묻고 약간 지저분해 보였다. 다른 중남부 주의 소들은 대게 검은 색이라 깔끔해 보인다.
야간 운전을 하니 밤에는 안 보이고, 낮에는 자야해서 경치 구경에는 안 좋다. 나중에 실컷 볼테니 상관은 없다만.
오클라호마에서 다시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7시간 정도 운전하면 알칸사스를 지나 테네시 주 멤피스에 도착한다. 4시간 정도 운전하고 트럭스탑에 차를 세워야 했다. 유리창에 벌레가 터져 죽은 점액(粘液)이 가득해 시야가 잘 안 보일 정도였다. 와셔액을 뿌려 와이퍼로 닦아도 소용 없었다. 헤드라이트 불빛도 희미했다. 가장 많이 로드킬 당하는 생물은 곤충이다. 특히 해질 무렵해서 두어 시간 동안은 집중적으로 트럭에 부딛혀 죽는다. 크고 작은 곤충이 그렇게 쉽사리 터져 죽는다. 창문은 트럭 전면의 일부분이다. 나머지 부분에는 얼마나 많겠는가. 적어도 수천 마리가 하루 밤새 목숨을 잃을 것이다. 밤에 트럭스탑 주유소에 주차한 트럭은 저마다 기다란 유리창 닦게로 청소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간 주유소는 하필 펌프가 고장나 주유기 진입구가 막혀 있었다. 네이슨은 인비저블 스프레이와 천을 이용해 유리창을 닦았다. 와이퍼도 새 것으로 교체했다.
이미 밤이 깊어 그 이후로는 곤충이 많이 터지지 않았다. 운전하다 보니 길가에 토끼가 자주 다녔다. 도로변에 서 있는 사슴도 한 마리 봤다. 야행성 동물이 로드킬을 많이 당한다.
다음 화물도 페덱스다. 이번에는 메사추세츠 주 보스턴으로 간다. 다음 주 월요일에 시민권 신청 지문 채취가 있다고 했더니 디스패처에게 얘기해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네이슨은 나를 내려주고 자기가 집으로 가면 다시 만나기까지 2주 가량 걸릴 수 있으니 일을 쉬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하루이틀이면 충분하다.
화물을 오후 3시 이후에 실을 수 있어서 밥테일로 트럭스탑에 왔다. 이번에는 네이슨이 내리지도 않고 내가 바로 주차했다. 컨테이너를 달지 않은 트럭 주차는 식은 죽 먹기다. 멤피스에 한식당이 서너 곳 있다. 네이슨에게 알려줬더니 반색한다. 인터넷으로 그 식당의 메뉴를 검색해 내게 물었다. 한국 발음 그대로 영어로 적혀 있어 내 설명이 필요했다. 그 중 홍어도 있었다. 이건 너는 못 먹을거다. 한국 사람도 잘 못 먹는다. 냄새가 심하다. 오줌 냄새난다. 유투브 영국남자 홍어 도전기를 보여줬다. 네이슨은 자기가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시도해보고 싶다고 했다. 못 말리는 도전정신이다.
## 부록 : 불닭볶음면 도전기 후기
불닭볶음면 도전이 싱겁게 끝난 후 뒤 트럭스탑에서 쉴 때 네이슨은 못 참겠다며 김치를 꺼내 먹었다. 김치통을 열어 킁킁 냄새도 맡으며 좋단다. 나는 거기에 깍두기랑 깻잎무침, 오이무침을 더 해 줬다. 밥도 먹겠냐고 물으니 배불러 괜찮단다. 나 혼자 햇반을 데워 먹었다. 네이슨은 그 짠 반찬을 밥도 없이 그냥 먹었다. 네이슨은 한국 음식 너무 맛있다며 애들 크면 자기는 한국 가서 살거란다. 나는 이 김치가 진짜 맛있어서 먹어. 내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지만 맛 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먹어야 하니까 먹는거야. 그런데 김치는 내가 즐겨서 먹는거야.
물론 한 시간 뒤 네이슨은 생수 한 병을 들이켰다. 우리는 반찬으로 먹는 짠 음식을 미국 사람들은 그 자체로 먹는다. 나는 처음엔 네이슨이 샌드위치만 만들어 먹길래 냄새를 싫어할까봐 라면 끓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도 샌드위치나 시리얼 같이 냄새 안 나는 음식으로 먹었다. 네이슨의 식성을 알고 난 이후로는 서로 편하다. 오늘도 내가 운전할 때 알아서 햇반 꺼내서 데운 다음 김치와 김을 반찬으로 해서 먹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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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의 한국 식당
일어나니 이미 네이슨은 빨래를 마쳤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줄 알았더니 같은 모양의 청바지가 여러 벌이다. 나는 갈아 입을 옷이 변변치 않아 양말과 내의만 간다.
미니밴 뒤에 커다란 물탱크를 단 이동식 세차 서비스가 있다. 흑인 남자 3명이 한팀으로 일했다. 요금은 45달러였다. 조금 비싸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 좋다고 네이슨은 말했다. 시원한 생수 세 병을 챙겨주기도 했다. 트럭에 붙어 있던 온갖 벌레 사체를 말끔히 씻어냈다.
12시. 우버 택시를 불러 한국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 우버는 뉴욕과 달리 아무 라이센스 없이 개인이 하는 것 같았다.
식당은 멤피스 한인회 바로 옆에 있었다. 식당 창문에는 30대 멤피스 한인회장 당선 공고가 붙었다. 메뉴를 보더니 네이슨은 나보고 시키라고 했다. 사진도 없는 메뉴만 보고 어떻게 알겠는가. 돼지 불고기, 해물파전, 김치찌개를 시켰다. 반찬과 함께 나온 음식을 보더니 네이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양이 많냐고.
서비스로 공기밥도 하나 더 나왔다. 음식이 깔끔했다. 제대로 된 한식 식사를 오랜만에 했다. 네이슨의 얼굴이 벌개졌다. 한국 음식은 그렇게 spicy하지는 않지만 hot하지. 천천히 속에서부터 더위질거야. 나 진짜 한국가서 살거야. 계산은 내가 할게. 진짜야? 돈 많이 나올텐데. 걱정마. 그럼 내가 다음에 스테이크 살게. 지난 번 스테이크는 별로였어.
한국인들이 세계 곳곳에 진출해서 한국 식당과 가게를 많이 열었으면 좋겠다.
다시 우버 택시를 불러 트럭스탑으로 돌아왔다. 페덱스에 가서 서류를 받고 트레일러를 연결하기 위해 야적장(野積場)으로 왔다. 출발 시간이 6시로 정해져 있다. 보스턴까지 출발 후 28시간 내에 배달해야 한다. 보스턴 지역은 끔찍하게 교통이 막히는 곳이라 네이슨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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