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방의회 위안부 결의안 121호 통과 주역 레인 에반스 추모 1주년 행사 다음날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를 출간한 서옥자 컬럼비아 칼리지 교수로부터 비련의 사랑과 위안부결의안의 비사를 듣고 싶었다. 워싱턴 정대위원장을 역임한 서교수는 에반스 의원과 함께 미하원 위안부결의안 통과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창밖에는 만추(晩秋)의 비가 필자의 심금을 울리고 서교수의 눈가에 진주 이슬을 만들었다. 그녀의 삶을 들으면서 강렬하게 필자에게 와 닿는 것은 모든 환경과 학업과 열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헌신토록 예비된 길을 걷게 했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이력의 그녀에게는 한번도 가보지도, 들어 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던 초행길을 바보같은 사랑을 나눈 고(故) 레인 에반스 의원과 동지적 유대속에 개척을 했다.
그녀의 폐부에서 토해 내는 육성을 들으며 또한 책을 읽으며 뜨거워지는 심장을 느끼며 나의 삶을 반추(反芻)해 보았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벽돌하나를 쌓아 올려 놓았는지 자문했고 반성을 했다. 망망대해 황무지의 아메리카나 땅에 한인 민초들의 힘을 모으고 연방의원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반인륜 법죄의 죄상을 세상에 알리고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 시키는데 헌신하고 민간 앰배서더를 자청한 서교수 앞에서 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1987년 미국 입국이후 사회에 대한 무관심 속에 꽃이 무르익어 가는 줄도 모르고 고독을 벗삼아 박사과정에 전력투구하던 그녀는 1998년 우연한 기회에 정신대 사진전을 보게 된 것을 계기로 정신대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1999년 12월 워싱턴정대위 정기총회에서 사무총장의 중책을 맡았다.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힘 없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과 발이 되고, 그들의 한 맺힌 절규가 되어 그들의 입은 반인륜적 범죄를 세상에 알려야 겠다는 사명에 사로 잡혔어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중책을 맡은 날 운명적 연인이 된 레인 에번스 의원을 만났지요. 그날 이분이 총회에서 기조 연설을 했어요. 미연방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1999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의회 회의록에 기록을 만들면서 한인들의 마음에 일제 시대의 위안부 문제를 점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죠.”
2007년 위안부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하원에서 통과된 것은 2000년 워싱턴 정대위 위원장을 맡은 서옥자 교수와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에반스 의원이 무려 다섯차례나 위안부 결의안을 발의하며 동료 의원들을 설득해온 지난한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헌법의 모든 인간은 신으로부터 동등하게 창조 되었으며(중략)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소리를 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정의롭고 올바를 일들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중략) 결국 사람들은 ‘적의 말보다 친구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 17-18쪽>
“그날 나는 에반스 의원과 짧은 만남에서 소탈한 시골냄새가 풍기는 소박함을 느꼈어요. 이 느낌 속에 내 인생속에 어제 에반스 의원 1주년 추모행사까지 했지만 나의 연인이 될 줄은 그 운명의 파도를 상상이나 했겠어요...2000년 1월 에반스 의원의 후원행사장에서 그가 파킨스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아마도 종교에 심취한 나에게 그를 향한 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과 함께 연민의 정이 빗물처럼 온 것 같아요. 그날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한 이후 만남의 숫자가 많아지고 지역구 일을 마치고 워싱턴 레이건 공항으로 오는 그를 위해 마중하는 새로운 즐거움이 사랑의 시작 같아요."
“부자연스런 그의 동작들 모습들을 보면서 지금 내 손을 잡은 이 손이 내가 돌봐줘야 할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의 여정 속에 동행해야 하는 운명임을 직감했어요.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남자의 운명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날 운명을 망각(忘却)한 채 점화된 사랑은 불꽃을 키워가고 있었고 레인은 활기와 유머가 넘쳐나고 있었어요. 이 세상 영원히.”
그녀는 어느덧 사랑을 속삭이는 소녀가 되어 들뜬 가슴을 안고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눈가에 진주의 이슬이 맺히려 한다. 필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허공을 날아다니는 까마귀 떼를 응시했다. 에반스 의원을 추모라도 하듯 1주기 행사 자정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흐느끼듯 유리창에 부딛쳤다.
병고의 몸으로 역사적인 위안부 결의안의 초석을 마련한 영웅의 1주기 행사에 한국정부 관계자 그 누구도 관심을 돌리는 이들이 없었다. 미정계의 에반스 의원 지인들과 한인 등 50여명이 작은 의사당 근처 건물 사무실을 추모의 마음으로 가득 채웠다.
“하원의장을 역임한 낸시 펠로시(캘리포니아) 민주당 원내대표, 에반스의원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약속한 혼다 하원의원, 제니스 샤코스키(일리노이) 하원의원, 마크 김(버지니아) 하원의원 등이 참석했어요. 그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어요.”
한국정부 관계자가 참석을 안한 것은 고만두고라도 추모 조화 한송이 보내지 않은 주미대사관의 무관심에 필자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옛 말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뤄도 정승이 죽으면 사람이 없어 쓸쓸하다는 뜻을 알 것 같다. 반인륜적 범죄의 희생양인 일제 위안부 여성들의 문제를 공론화 시키고 결의한 통과에 중추 역할을 한 고 에반스 의원의 1주기 추모행사를 몰라라 한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충격으로 다가 왔다. 일본의 외교와 로비력을 상대하려면 반인륜적 일제 일안부 일에 적극 나서서 세상에 알리고 일본에 사과를 요구라는 미의회 의원을 지속적으로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것이 상식인데 말이다. 이런한 분들을 찾아 나서서 친교를 맺고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외교관들의 기본 책무인데 만들어져 있는 네트워크마저 유지 못하는 주미 대사관과 한국정부 관계자들의 나태함에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워싱턴 한국외교관들과 한국의 주류매체 특파원들은 한국의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오면 일심동체가 되어 몰려다니며 미국신문에 한 줄도 나오지 않은 기사들을 자화자찬의 용비용천가로 보도하기 바쁜 일상들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1주기 행사일 백악관 미국원주민 컨퍼런스에 참석한 오바마 대통령 취재일과 겹쳐서 양해를 구하고 이튿날 염치 없이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흔쾌히 수락하여 주었다. 1주년 추모 행사로 피로가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서교수의 뜨거운 열정과 모국 사랑, 약자를 위한 헌신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월남 국수집에서 필자가 내겠다 했지만 프랑스 커피와 밥값을 기어코 그녀가 냈다. 이 메릴랜드 국수집은 필자가 몇 개월 전에 처음 지인과 갔을 때 홀로 식사하던 서교수와 마주친 곳이었다.
넓고 넒은 메릴랜드 땅에서 우연히 월남국수집에서 만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민간외교 대사 역을 자청하여 한인들의 힘을 모아 미연방의회 일제 위안부 결의한 121호 법안 통과 주역이 아닌가. 스튜어디스 시절 월남 공항에서 맛본 국수 맛을 잊지 못하여 즐겨 찾는다고 했다. 이곳에서 인터뷰를 하는 또 다른 인연의 고리에 필자는 심연(深淵)으로부터 축복에 감사를 드리고 있다.
<2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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