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사태에서 시작된 나의 칼럼이 리비아 사태로 인해 중단되고 본업인지, 부업인지 비행기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이란을 출발해서 스위스, 스페인, 남미 알젠틴(아르헨티나)을 거쳐 미국으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동안 뉴스로가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뉴스로의 한식구라는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 되었다.
1979년 2월초, 스위스 제네바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레만 호수는 물론 그 유명한 분수마저도 꽁꽁 얼어 붙어 있었고 호숫가 북한 대표부 담벼락에 써있는 "김일성 주석 만세"라는 붉은 글씨가 정처 없이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더 을씨년스럽게 흔들어 놓았다.
남미 알젠틴을 목적지로 결정하고 제네바에서 우선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두어시간 뒤 비행기는 지중해 연안 도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연결편을 타기위해 대합실로 나와 두리번거리다 외부로 나가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밖으로 나왔더니 지중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며 뜨거운 태양빛의 눈부신 세상이 펼쳐지는게 아닌가!
코끝에 와 닿는 바람은 마치 솜사탕 맛처럼 달콤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불과 반나절만에 영벽의 세월에서 한여름의 정취를 맞보니 어리둥절한 것은 우리 다섯 식구 모두였다.
동양의 조그마한 반도에서 살다온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현상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며 조금씩 촌티를 벗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구라파(歐羅巴)에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벽이 느껴지지 않고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까다로운 절차를 하나도 거치지 않았기에 스페인에 입국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옆 사람에게 물었더니 “당신들은 스위스를 떠날 때 이미 스페인 입국 절차가 끝났다”고 한다. 남북이 대치(對峙)되는 상황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경험이었다.
지중해에서의 낭만도 잠시, 우리는 내키지 않는 발길이나마 다시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또다시 두어 시간만에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하여 천애 고아(天涯 孤兒) 마냥 공항 대합실에 내동댕이 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연고자 하나 없이 무작정 상경, 용산역에 내린 상황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고원지대에 위치한 관계로 2월초 마드리드의 기후는 굉장히 쌀쌀하게 느껴젔고 눈도 꽤많이 쌓여 있었다.
살다보면 여러 사람들로부터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지인의 소개로 그 당시 스페인 대사관에 근무하시던 어떤 분께 우리를 좀 도와 달라는 부탁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전화를 했더니 두어 시간뒤 그분이 공항에 달려와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처지를 설명하니 “우선 비행기 편부터 알아보자”해서 Check 해보니 알젠틴 항공이 새벽 한시에 떠난다는 것이다,
알젠틴 항공 Desk에 가서 우리 다섯식구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요금을 지불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돈이었고 남은 돈은 미화 2천불이 채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곳에서 우리를 도와주신 그분께 40년이 다 되가는 지금껏 고마움의 뜻을 전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의 결과이지만 계속되는 다음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오죽하면 그러랴는 나의 입장을 이해 해 주시리라 믿는다.
정처없이 떠나는 방랑객 한 식구를 위해 그분께서 배려해주신 모든 것 절대로 잊지 않고 있음을 부연해두며 여기서 다시 한번 해외에서 근무하는 재외공관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식구가 다섯이나 되다보니 딸린 가방 수도 많을뿐더러 무게도 훨씬 초과되어 도저히 받아줄 수 없다는 항공사 직원과 거의 두시간동안 지루한 전쟁(?)을 벌였다. 추가 비용(Extra Baggage Charge)이 미화 5백불로 내려간 시점에(원래는 2천불이었음) “제가 지불 하겠다”고 말하자 그분 하시는 말씀 “내가 알기로 남미에서는 한 가족의 월 생활비가 2백불이면 된다고 들었다, 당신은 가만히 있으라” 하면서 계속 버티기 작전의 연속이었다.
항공기 출발시간은 가까와 오고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알젠틴과 대한민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드디어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알젠틴 항공사 직원이 한푼도 받지 않고 우리 가족을 비행기에 실어준 것이다.
거의 하루 해를 우리 가족과 함께 공항에서 지내다시피 한 그분과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됐다. 그분은 훗날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까지 지내시고 지금은 은퇴하셨다. 역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그분의 생활철학으로 볼 때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을 태운 알젠틴 항공 Boeing 747 SP로 일명 ‘짜리몽땅’이라는 비행기였다. 그때는 Boeing 747도 항속거리가 짧아 서울-뉴욕, 마드리드- 부에노스 아이레스 같은 장거리 노선을 Non-stop으로 날지 못해 장거리 노선을 위해 동체를 단축시켜 운항거리를 늘려 비행 했다. 장장 14시간 반 동안 대서양을 대각선으로 날아서 남미 대륙에 들어선 후 마침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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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나의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70년대에 조국을 떠난 대한민국 사람치고 이민의 마지막 짐을 미국에다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이란 공군에 근무 당시 거주했던 Tabriz라는 이란 제2의 도시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Visa를 신청해 봤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미국쪽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나니 사랑이 증오로 변한다는 말같이 미국에 대한 치부(恥部)를 들쳐내며 그곳에 가지 않는(사실은 못가는) 것을 합리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무렵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어느 외교관의 조언을 듣기로 했다. 알젠틴의 정식 Visa와 파라과이 영주권이 있는 나의 상황에서(이란에서 남미거주 한국분에게 파라과이 영주권을 3000 불에 구입했다) “자녀들의 교육과 미래를 기약 한다면 알젠틴으로 가고, 돈을 모은 다음 제3국을 생각한다면 파라과이를 택하라” 는 조언을 듣고 알젠틴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979년 2월 5일, 전날은 큰아이의 일곱번째 생일이었지만 어디쯤인지도 모를 4만여 피트 대서양 상공에서 보내고 오전 11시쯤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을 나오니 습도 100%의 찌는 듯한 더위의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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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 세번째 만나는 극과 극의 계절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두터운 겨울 옷을 입은 채로 시내로 가기위해 Taxi를 타고 “비싸지 않고 깨끗한 호텔로 데려다 달라”고 영어로 말을 했는데 도저히 소통이 되질 않았다,
시내에 도착하여 내려주는 대로 호텔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Five-star 스위트 룸이 아닌가.
바야흐로 4년반 동안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알젠틴 생활이 되려 하는 시간, 다음편에 그 이야기들을 이어 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