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9년 7월 뉴욕타임스가 1면에 뉴욕에 사는 한인남성이 이름 때문에 겪는 웃지못할 애환(哀歡)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름은 존 도우(40 John Doe). 한국이름은 도장현이었다. 열 살때 부모와 함께 이민한 그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리자 영어이름 존(John)을 쓰기로 했다. 문제는 성이었다. 도(Do)를 열이면 열, ‘두(do)’라고 발음했기 때문이다.
고민끝에 미국의 성씨의 하나인 Doe(도우)가 발음이 비슷한 것에 착안, ‘e’라는 이니셜을 하나 더 넣게 되었다. 존 도우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이름의 수난시대(受難時代)는 시작됐다. 존 도우가 얼마나 특별한(?) 이름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존 도우를 한국식으로 풀이하면 ‘홍길동’이다. 구청이나 은행에 가면 견본양식 이름으로 쓰는 홍길동 말이다. 미국에선 익명(匿名)이나 신원미상(身元未詳)의 인물을 지칭할 때 존 도우라고 한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따금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屍身)의 발가락에 ‘존 도우’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정겹기도 한 우리네 홍길동보다 존 도우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가 느껴진다.
‘존 도우’ 도장현씨가 미국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해프닝을 겪었을지는 불보듯 훤하다. 존에 대비되는 여자이름은 제인(Jane)이다. 우리로 치면 철수와 영희라고 할 수 있는데 신원미상의 여자 또한 제인 도우(Jane Doe)라고 이른다. 이런 식으로 ‘Baby Doe’, ‘Cali Doe’ 등의 파생어가 나왔다.
존 도우는 본래 영국의 토지 점유소송에서 익명의 원고 이름에서 유래됐다. 이에 대척(對蹠)관계(關係)인 익명의 피고는 리차드 로우(Richard Roe) 라고 부른다.
1988년 캐나다 토론에 ‘제인 도우’로 불린 여성이 있었다. 연쇄 강간범의 희생자였던 그녀는 자신에 앞서 4명의 피해자가 있었는데도 사전경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당국을 제소, 무려 11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할 수 있었다.
도장현씨는 뉴욕타임스 기자가 ‘당신과 결혼한 여성이 호텔에 투숙할 때 존 도우 부부라고 사인하면 주위의 시선을 견딜수 있을까’라고 짖궂게 질문하자 이렇게 익살을 부렸다.
“가장 웃기는 일은 내가 제인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하는거다. ‘존과 제인 도우(John and Jane Doe)’라고 써있는 장면을 상상 해봐라.”
서론(序論)이 길었다. 요즘 갑과 을의 관계를 논하는 기사들이 차고 넘친다. 얼마전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하는 녹취록이 SNS를 통해 파장을 일으키면서 우리 언론들은 일제히 ‘갑의 횡포’, ‘을의 반란’ 등 ‘갑과 을’의 불평등한 관계를 다루는 갖가지 기사들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포탈의 검색어도 갑과 을이 약방(藥房)의 감초(甘草)였다. 한가지 이슈가 떳다하면 부나비처럼 몰려다니며 떠들어댄 ‘김여사 시리즈’가 있었다. ‘립서비스’, ‘스펙’, ‘엣지있게’ 등등 엉터리 영어단어들도 바람을 타면 만인의 유행어가 됐다. 바야흐로 시류를 타기 좋아하는 ‘냄비저널리즘’이 온 국민을 ‘갑과 을’의 바다에 풍덩 빠트린 것이다.
갑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십간(十干) 중 하나일뿐이다. 그런데 을과 함께 계약당사자로 활용되면서 불공정한 계약의 우월한 위치에 있는 상징이 되버렸다.
입달린 사람이라면 너도나도 갑과 을을 놓고 한마디씩 거들면서 모든 갑은 힘있는 강자요, 을은 무력한 약자처럼 여겨질 정도다. 안타까운 ‘순애보(殉愛譜)’의 대명사 갑돌이와 갑순이까지 죄진 사람처럼 눈이 흘겨진다면 과민한 것일까.
갑과 을의 관계를 본격 조명한 것은 2010년 10월 시라큐스대 정치학자 한종우 교수가 ‘글로벌웹진’ 뉴스로에 기고한 연작칼럼 ‘갑의 위치를 되찾자’와 ‘겁많은 순록이 아니라 단결하는 들소’가 최초다.
한 교수는 “세상 모든 것이 갑/을의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과연 민주주의의 갑인가 을인가? 독재로 점철된 한국의 정치사에서 우리는 갑의 얼굴을 한 을이었다. 소통과 불통의 경계에서 헤매거나 특권층이 포장한 서민정책으로 영원한 을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도된 갑/을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을이 된 갑들이 갑의 위치를 찾는 자발적인 운동에서만이 가능하다”고 일갈(一喝)했다.
SNS세상에서 을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갑은 이제 을의 눈치를 보는데 익숙하다. 때로는 과격하고 선동적인 을의 집단행동으로 선의의 피해자인 갑들도 나오고 있다.
문제는 갑과 을의 용어가 아니다. 갑을의 기존 질서를 역전시켜야 한다는 논리에 매몰되지말고 호혜(互惠)와 쌍무(雙務)의 대등한 눈높이가 되야 한다. 그것이 진정 전도(顚倒)된 가치를 바로잡는 길이다. 갑은 을, 을과 갑은 선후의 개념이 아니라 회전문처럼 돌아가고 있을뿐이다.
그러니 한국언론이여, 유행병처럼 ‘갑이니 을이니 슈퍼갑이니’ 호들갑떨지 마시라. 우리 모두 갑다운 갑, 을다운 을이 되는 명랑사회(明朗社會) 건설에 분골쇄신(粉骨碎身)함이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