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홍콩오픈을 취재할때로 기억된다. 남자복식 결승에 오른 박주봉-김문수조는 그야말로 배드민턴의 정수(精髓)를 보여주었다. 85년부터 배드민턴과 인연을 맺은 이래 무수히 많은 경기들을 보았지만 박-김조는 말레이시아 조를 상대로 생애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다.
상대는 강력한 점프스매시와 의표를 찌르는 헤어핀, 절묘한 드롭샷 등 배드민턴의 모든 공격 기술을 동원했다. 그러나 어떠한 각도에서도 받아치는 박-김조의 신기에 가까운 수비에 차츰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빈틈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박-김조의 완벽한 플레이가 거듭되자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배드민턴 경기에선 처음 보는 진기한 장면이었다.
배드민턴이 최고 인기인 동남아에서 ‘주봉 버거’ ‘주봉 주스’가 팔릴만큼 인기를 모은 한국배드민턴의 전설 박주봉. 그가 역대 최고의 복식선수로 평가받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왼손잡이 파트너 김문수다. 박-김조는 복식의 교과서요, 배드민턴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들로 인해 영원한 2인자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불운한 스타들은 중국의 리용보-티안빙이 조였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불운했던 것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강자들과 이류로 전락한 유럽의 배드민턴 명가들이었다.
80년 이전까지 변방이었던 한국은 81년 세계 스포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영오픈에서 황선애가 혜성처럼 등장, 여자단식에서 우승한 이래 배드민턴 파워의 강력한 한 축을 구성해 왔다.
그러나 실력만큼 따르지 않는 것은 외적인 문제인 외교력이었다. 얼추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의 아킬레스건은 여전히 허약하다. 런던올림픽에서 실격사태를 빚은 한국선수들에 대한 대처방식만 보아도 그렇다.
여자복식 조별예선에서 ‘져주기 경기’를 선도한 중국조와 함께 정경은-김하나 조, 하정은-김민정 조 등 8명이 실격판정을 받은 사건은 외형상 전적으로 선수들의 잘못으로 보인다. 한국선수단은 사과성명을 내고 해당선수 4명과 김문수 코치의 AD카드를 회수하고 조기귀국시키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좀더 냉정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처벌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을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한국이 최대의 피해자가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강력한 추가징계를 주문하는등 IOC의 고압적인 자세는 최악의 심판진으로 잡음을 빚고 있는 런던올림픽의 문제를 호도(糊塗)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물론 스포츠 본연의 페어플레이를 외면한 선수들의 행위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왜 이런 경기가 나왔는지 구조적인 원인을 함께 살피고 처벌의 수위가 합리적으로 내려졌는지 저울질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저간의 흐름을 보면 감정적인 IOC 수뇌진의 입김과 희생양 만들기에 나선 미디어의 균형잃은 보도가 파문을 확산시킨다는 느낌이다.
‘올림픽 최악의 승부조작 스캔들’이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문제가 있다. 강한 상대팀을 만나지 않기 위해 고의로 느슨한 플레이를 한 것이 넓은 의미의 승부조작이 될 수도 있겠지만 범죄적 행태라 할 ‘승부조작 스캔들’로 의미를 강제하는 것은 지나치다.
아다시피 이번 파문은 세계1위인 중국 왕샤올리-위양 조(A조)가 자국의 세계랭킹 2위 톈칭-자오원레이 조(C조)가 예상외로 조 2위가 되자 4강 토너먼트에서 만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경은-김하나 조에 져주기 경기를 시도한 것이 원인이었다.
고의로 서비스를 미스하고 셔틀콕을 라인 바깥으로 치는 등 노골적인 져주기 플레이에 한국팀은 성한국 감독이 심판진에 항의하고 한국선수들이 맞대응하면서 관중들의 야유를 받게 됐다. 두 팀 모두 느슨한 경기를 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깐 중국은 기어코 한국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정상적인 경기라면 당연히 이겨야 할 세계1위조가 고의로 패배한 것이다. 중국의 비열한 플레이는 이어 열린 C조 한국의 하정은-김민정조와 인도네시아의 멜리하나 자우하리-그레시아 폴리 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에서 1위를 하면 8강 토너먼트의 중국의 챔피언조를 만날 판이었다.
또한번의 져주기 경기가 펼쳐지면서 파장이 더욱 커지자 세계배드민턴연맹(BWF)이 올림픽사상 전무후무한 4개조의 동시 실격을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 문제를 살펴보자. ‘져주기 경기’에 대한 비난은 불가피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배드민턴 개인경기에서 전통방식인 토너먼트를 외면하고 조별리그후 8강 플레이오프라는 방식을 채택한데서도 발생한다.
이번에 실격한 4개조는 메달권이 가능한 팀들이다. 결선 토너먼트플 진출이 확정된 마당에 대망의 메달고지 문턱에서 수월한 팀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고의로 경기를 느슨하게 하는 사례들은 모든 스포츠에서도 흔히 발생하고 있다. 까놓고 얘기해서 이번 비극은 선수들의 ‘연기’가 너무 서툴렀던 탓이라는 자조도 가능하다.
강한 상대를 피하기 위한 ‘꼼수’가 비난받을망정 판돈이 오가는 승부조작처럼 매도(罵倒)되고 4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린 선수들을 중범죄자인양 징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IOC와 BWF가 그렇게 공명정대하고 떳떳한 조직인가. 징계를 하더라도 최초의 원인제공자인 중국조를 실격시키고 나머지 팀들은 경고조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져주기 경기가 가능하도록 방치한 심판진은 왜 문제삼지 않는가. 가벼운 경고만 주고 경기를 속행시켜 중국조의 뜻대로 결과가 끝났기에 이들과 대결하는 C조 그룹도 ‘우리도 안하면 손해’라는 판단을 한게 아닌가. 경기의 전권을 가진 심판진이 무능하게 대응하고 뒤늦게 전원실격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우스운 것은 져주기 경기가 또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자복식 B조에서 세계 5위 일본의 후지이 미즈키-가기와 레이카 조는 2승을 챙긴 후 한 수 아래인 대만의 청원싱-첸위친 조에 0-2로 무기력하게 졌다. 덕분에 일본은 조 2위로 8강에서 세계 2위 톈칭-자오윈레이(중국) 조를 피할 수 있었다. 반면 인도는 대만, 일본과 똑같은 2승 1패를 기록하고도 득실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강호들이 무더기로 실격한 덕분에 일본은 4강전에서 어부지리로 올라온 캐나다를 2-1로 격파하고 일약 결승까지 올랐다. 죄없는 인도를 울리고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예약한 일본은 연기력이 좋아서 징계를 하지 않았을까?
무더기 실격사태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한국이다. 모든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 중국은 챔피언조 대신 세계 2위조가 결승에 진출, 금메달 전선에 문제가 없을 전망이다. 원인제공국은 금메달을 따고 바보처럼 휘둘린 한국만 국쏟고 발덴 형국이다.
일각에선 중국만 징계를 줄 경우 반발이 무서워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끼워 무리한 처벌을 했다는 관측이 있다. 공교롭게 이들 팀이 각종 국제대회 우승을 독식하는 아시아권이라 배드민턴종주국 영국을 비롯, 세계배드민턴의 둘러리로 전락한 유럽의 화풀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엉터리 판정과 오심으로 최악의 올림픽이라는 비난을 받는 IOC는 “선수들이 경기를 모독(冒瀆)했다”며 준열히 꾸짖으며 “진상조사를 통해 코치까지 징계하라”고 엄포를 놓을 자격이 없다. 해당 선수와 코치는 이번 사태로 이미 충분한 벌을 받았다. 한번의 실수로, 그것도 상대가 유도한 함정에 빠진 어리숙한 선수들이 4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것도 억울한데 더 이상의 징계는 없어야 한다.
대한체육회와 대한배드민턴협회는 부적절한 플레이에 대한 선수들의 잘못은 인정하되 이번 대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형평성 외면, 과도한 징계에 대한 분명한 문제 제기를 IOC와 WBF에 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미스테리는 BWF 회장을 강영중 대교그룹 회장이 8년째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연맹 회장인 한국인인데 한국이 더 피해를 봤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국인이 회장이라 더 손해를 본것인지, 얼굴마담이라 실속이 없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BWF 본부는 말레이시아에 있고 회장을 빼면 조직내 주요 부서에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이 회장인데 경기인출신 인사가 세계연맹에서 단 한개의 중요 포스트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오늘의 셔틀콕 참화를 불러 일으킨 또다른 원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