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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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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가 대단한 이유 한가지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3-03-18 (월) 15:51:46

 

 

뜬금없지만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黃永祚) 얘기부터 해야겠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감격의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한 영웅 황영조. 그의 금메달은 대한민국이 마라톤에서 공식적으로 따낸 첫 금메달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이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시상대에 오른 그의 가슴엔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도 올라가는 일장기를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비분강개를 달랬던 바이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되어 있고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생전에 손 옹은 IOC(올림픽위원회)에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올림픽위원회가 인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만 손기정의 일대기(一代記)를 쓴 자료에는 국적을 한국으로 밝히고 이름을 손기정을 표기했다. 그리고 그가 일장기를 달고 경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92년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땄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손기정 옹이었다. 그것도 일본선수 모리시타 고이치를 2위로 떨궈뜨리고 차지한 금메달이었다. 만 여든살에 접한 손자뻘 선수의 금메달은 그는 감격어린 일성을 토했다.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만으로도 황영조는 희대의 영웅이다. 그러나 필자는 황영조보다 한 수 위로 두는 마라톤 영웅이 있다. 바로 황영조의 동갑내기 친구 이봉주(李鳳柱)다.

 

황영조는 혜성처럼 나타나 짧지만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91년까지 중장거리 선수로 마라톤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그해 3월 동아국제마라톤대회에 동료선수들의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해 깜짝 3위를 차지하며 마라톤선수의 진가를 드러냈다.

 

이듬해 2월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당시 한국신기록을 2분 이상 앞당기는 2시간8분47초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 일약 한국마라톤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6개월뒤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냈으니 마라톤에 입문한지 불과 1년반만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이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황영조는 94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9초의 한국신기록으로 2위를 차지했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선 2시간11분13초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연히 그를 놓고 96애틀랜타 올림픽 2연패의 기대감이 부풀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을 4개월 앞둔 96년 3월 동아국제마라톤에서 2시간25분45초로 29위의 충격적인 레이스를 펼쳤다. 그리고 얼마 뒤 은퇴를 선언했다. 30대선수도 많은 마라토너로선 너무 이른 스물여섯의 나이였다.

 

그가 은퇴를 결심한 배경중에는 족저건막염이라는 고질적인 부상이 있었다. 그러나 훗날 한 인터뷰에서 밝힌 은퇴의 진짜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솔직히 더 뛸 수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딸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한국 최고기록 등 모든 걸 이뤘다. 더 뛸 의미가 없었다. 운동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정상에 있을 때 그만두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서서히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정말 힘든 선택이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스포츠2.0 2009년 1월 9일>

 

그의 말을 액면(額面) 그대로 받이들이고 싶지만 좀 허세가 느껴진다. 올림픽을 4개월 앞두고 금메달을 딸 자신도 있었는데 은퇴를 결심한건 설득력이 없다. 그해 열리는 올림픽이 미래를 설계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방해할 이유도 없다.

 

필경 그는 올림픽2연패에 대한 주위의 높은 기대에 심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더 뛸 의미가 없었다”라는 말은 그래서 솔직해 보인다. 고질적인 부상도 빌미가 됐지만 목표의식이 없어진 상황에서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었을 것이다. 동아마라톤의 형편없는 기록은 은퇴명분을 위한 미필적 고의(?)였는지 모른다.

 

황영조에 비하면 이봉주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다.

 

충남 광천고교 1학년때 육상 장거리에 입문한 그는 황영조가 화려한 조명을 받는 동안 철저히 국내용에 머물렀다.

 

92년 바르셀로나를 앞두고 첫 풀코스 도전이었던 올림픽대표선발전에 출전했지만 레이스 도중 넘어져 올림픽행이 좌절됐다. 93년 10월 광주전국체전에서 우승, 가능성을 보인 그는 그해 12월 호놀룰루마라톤에서 우승, 마침내 국제대회 시상대에 올랐다.

 

황영조의 돌연한 은퇴로 메달 기대를 접었던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그는 남아공의 조사야 트그워니에게 불과 3초 차이로 뒤져 은메달을 차지했다. 금메달에 버금가는 소중한 은메달이었다. 이봉주 덕분에 한국은 올림픽 마라톤에서 2회 연속 메달을 따네며 신흥 마라톤강국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3초차로 분루를 삼키게 했던 상대 트그워니는 불과 4개월후 후쿠오카 마라톤에서 역전우승을 차지하면서 속시원한 앙갚음을 했다.

 

98년 로테르담마라톤에서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44초)으로 준우승, 같은 해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했다. 4년전 친구 황영조의 히로시마 금메달에 이은 잇단 쾌거였다.

 

하지만 99년 런던마라톤대회에서 저조한 기록으로 12위에 머문 뒤 소속팀인 코오롱과의 갈등으로 한동안 방황(彷徨)하며 그는 선수생활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은퇴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서른에 접어든 나이, 저조한 기록, 소속팀과의 갈등. 어느 하나 긍정요인이 없었다. 이미 그도 황영조 못지 않은 영광의 기록들을 갖고 있던 터였다. 은퇴를 한다 해도 아쉬울 게 없는 화려한 선수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0년 삼성전자에 입단한 그는 같은해 2월 도쿄마라톤에서 2위 입상하며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을 다시 세우고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기대를 모았던 시드니올림픽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져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2개월만에 후쿠오카마라톤에서 또다시 준우승(2시간9분4초)을 차지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2001년 그는 세계3대 마라톤의 하나인 제105회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마저 우승, 화려한 선수인생 2기의 정점(頂點)을 찍었다. 어느더 서른 중반의 나이. 비록 올림픽 금메달은 얻지 못했지만 그 이상가는 불굴(不屈)의 메달들이 이봉주의 목엔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황영조가 몬주익의 영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이봉주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선수생활의 진퇴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자신감도 없었고,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뛰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6~7개월의 기나긴 슬럼프였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못했고, 결국 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는 것, 내 스스로 이겨내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을 혹독하게 깨달았다.” <스포츠2.0 2009년 4월 2일>

 

그는 좌절과 시련이 올 때마다 선수생활 초기의 슬럼프를 떠올리며 초심으로 돌아갔다. 나이를 잊고 달리는 그를 보고 국민들은 함께 달리고 함께 호흡했다. 황영조의 빛에 가렸던 이봉주, 아깝게 2위에 그친적이 많아 ‘2위전문가’라는 안타까운 별명이 있었던 그는 어느 순간 ‘국민 마라토너’라는 영광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사진=뉴시스 유동일 기자>

 

“내가 달릴 때마다 국민들이 보내준 성원은 사실 내가 훈련하면서 만든 근육의 힘보다 더 강했다”고 털어놓는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14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3년뒤,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1위에 골인함으로써 국제대회사상 최고령 한국인 우승자의 기록을 아울러 썼다. 그로선 네 번째 올림픽 출전이었던 2008베이징에서 28위에 그쳤지만 국민들은 ‘봉달이’ 이봉주의 지칠줄 모르는 도전 자체에 열광하고 감동했다.

 

2009년 3월 그는 불혹의 나이에 마지막 레이스를 달렸다. 2년전 우승했던 서울 국제마라톤이었다. 2시간16분46초 전체 14위. 그러나 순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흔살에 기록한 총 40번의 공식레이스 완주. 세계적인 마라토너 가운데 그 누구도 생애 마흔번의 풀코스를 뛴 선수는 없었다.

 


<사진= 뉴시스 전신 기자>

 

긴 서론을 마감하고 짧은 본론에 들어간다. ‘여왕의 귀환’으로 불린 이번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를 보며 떠오른 두 선수가 황영조와 이봉주였다. 전술했다시피 황영조가 한국 마라톤사에 길이 남을 스타임엔 분명하지만 이봉주처럼 국민마라토너 반열(班列)에 들 수는 없는 일이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차지한 김연아의 금메달은 황영조의 금메달만큼이나 감격적인 쾌거였다. 밴쿠버이후 김연아가 은퇴를 했다한들 누구도 유감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금메달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국민들을 오래도록 기쁘게 했고 한국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했다.

 


<사진= 뉴시스 전신 기자>

 

그런 김연아가 2년여 공백(空白)을 끊고 은반에 복귀 3개월만에 치른 세계선수권에서 기라성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것도 압도적 기량의 클린 연기로 독보적인 점수를 얻으면서 말이다.

 


<사진= 뉴시스 전신 기자>

 

솔직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잘해야 본전’인 대회였다. 스폰서와 흥행의 문제, 아직은 변방(邊方)에 불과한 코리아의 부상을 견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도 있다. 이미 한국피겨스케이팅의 위대한 역사를 쓴 김연아로선 고질적인 허리 통증을 안고 있었고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유혹도 있었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은퇴대신 다시 도전의 길을 택했다. 감당하기 힘든 심리적 중압감이 있을 터인데 마치 단 하루의 공백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도 노련하고 원숙하게 기량을 과시하는 김연아의 동작 하나하나에 감격하지 않을 국민들이 없다.

 

이대로라면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2연패가 문제없다는 말도 들린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방팔발의 늘어난 기대만큼 예기치 않은 반전(反轉)의 위험도 커지는게 스포츠의 세계이다. 기왕이면 김연아가 소치에서도 세계인들로부터 황홀한 기립박수를 받으며 시상대에서 애국가가 연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설사 그렇지 못해도 전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김연아가 올림픽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우리에게 김연아가 있다는 것을.

 


<사진= 뉴시스 전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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