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민족이 일제의 탄압(彈壓)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3.1 절, 나는 또 다른 곳에서 아픈 역사의 기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아마도 이곳은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일본군국주의의 인간마루타와 함께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최악의 사례일 것이다.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Tuol Sleng Genoside Musieum)’.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가 배어있는 이곳은 이름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70년대 폴 포트 정권이 자국인 200만명을 학살한 그 대표적인 현장이다.

본래 고등학교였지만 폴 포트의 지시로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동안 자국민들을 수감하고 고문한 교도소로 운영됐다. 기록을 살펴보니 연도별 사망자 숫자가 총 만여명에 달한다. 일설엔 30명 정도가 살아 남았다고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나와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죽음의 수용소였던 셈이다.

마치 침대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묶어 놓고 고문을 가한 지옥의 형틀이다.

가르침과 배움을 행하는 교육의 장을 고문과 학살의 장으로 만들어버린 헹동은 폴 포트의 광기어린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학교라는 곳이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인간의 입장에선 원초적인 잔인함과 악랄함을 표출하기엔 최적의 장소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악의 권력에 짓눌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버린 캄보디아 인들이 수감됐던 이 교도소는 프놈펜 시내 한 구역에 자리잡은 채 그 길을 오고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노출하고 있다.

교도소라면 통상 사회로부터 격리(隔離)되는 이들이 수용되므로 시내에서는 떨어졌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바로 옆에서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고문(拷問)과 학살(虐殺)이 자행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문득 지금은 역사기념관이 된 독립문 근처의 서대문 형무소가 떠올랐다. 일제시대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지사를 투옥해 고문, 살해한 곳이었는데 해방후에 사형집행장이 있는 형무소로 운영됐다고 들었다. 큰 길옆에 있는 이곳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역사관이 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한 느낌이 든다.

뚜얼슬랭에 들어갈 때만 해도 주말이 주는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페인트 칠이 다 벗겨진 건물이 스산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지만 그 침울함을 벗겨 버릴듯한 강렬한 햇볕과 군데군데 심어진 열대 과일나무들이 뿜어대는 달콤한 향기에 잠시 취했다.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화사한 겉 포장지를 뜷고 역사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죄수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차마 두 눈을 뜨고 보기 힘든 모습에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이들과 이미 죽은 이들의 사진들이었다. 자포자기한 표정의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의 어린 아이, 실명(失明)되어 그 눈빛을 알아볼 수 없는 할머니의 사진까지.

그들은 폴 포트 정권에 반대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로 교도소로 끌려왔다. 그들의 가족, 주변인들 또한 붙잡혀 들어왔다. 너무나도 처참하고 허망하게 끝나버린 그들의 삶을 전시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불과 십여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의 역사도 따지고보면 수백만명이 죽은 한국전쟁의 비극이 60여년전 일어났고 일제 강점기 또한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세대는 참혹한 역사를 뒤로 하고 태평스럽게 살면서 하이테크놀로지의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 오늘날 내가 갖고 있는 고민과 걱정을 감히 이들에 비할 수 있을까.
<下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