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지명사전의 탁록 조를 보면 판천과 탁록은 모두 山西省 解縣 염지상원이라 나오는데(錢穆이 《國史大綱》에서 주장) 鹽池上原이지요? 소리글만 있으니 저로서는 조금 불편하네요.
답과 논평:
탁록(涿鹿)에 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정확한 위치를 밝힌 출처는 거의 없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중국고금지명대사전>, 그리고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기술된 내용을 수 백번 읽어도 탁록의 정확한 위치를 밝힐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모두 헷갈리게 적혀있기 때문이며 지리지명에 대해 상당한 수준이 아니면 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태영학파(T.K.School)의 <한민족사 고금 지리지명사전>(2024), <사근경>-역사는 모든 학문의 뿌리-(2021), 그리고 <<한단고기>의 오류비판과 지리지명 고증>(2023)에서 탁록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혔다.
전목이 말한 염지상원의 ‘상원’의 한자는 ‘上原’이 맞다. 상원의 한자를 적지 않은 이유는 첫째, 독자가 한국사람이고 둘째, 한자가 너무 많아 피한 것이고 셋째, 지리지명에 관심을 갖은 독자라면 상원 정도는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생략한 것이고 넷째, 상원보다는 탁록(涿鹿)과 산서성 염지인 해현(解縣)이나 해주(解州)가 주된 단어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의 원(原)은 ‘넓고 평탄한 땅’이란 의미이다. 즉, ‘해주(현)의 위쪽 평탄한 땅’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다.

판천(阪泉)은 산서성 탁록의 동북으로 서로 가까운 지역이며 이곳에서 염제신농씨와 조카인 황제헌원씨가 3차례 싸운 곳이다. 신농씨는 이 싸움에서 패하여 남쪽 호남성으로 내려가 살다가 그곳 장사(長沙)에 묻혔다. 물론 호남(湖南)은 오늘날의 한반도 호남이 아니다.
신농씨의 뒤를 이어 구제치우씨와 황제헌원씨가 다시 이곳 산서성 탁록의 상원 벌판에서 10년 동안 78회의 대 전쟁을 하게 되며 결국 이 싸움에서 치우가 헌원에게 패하였다. 패전한 치우의 후예들의 일부는 남쪽 특히 귀주성과 운남성으로 갔고 일부는 황하를 건너 섬서성 북쪽 삭주(朔州: 수덕)로 피하여 살면서 맥족(貊族)이 되었다.
신농씨의 도읍지는 산서성 포주(蒲州) 즉, 포판(蒲坂)이고 치우씨의 도읍지는 산서성 용문(龍門)이다. 포판(蒲坂)은 고죽국(孤竹國)의 도읍지이기도 하다. 치우의 마을 즉, 치우촌(蚩尤村)은 산서성 안읍(安邑)이다. 이곳을 하나라 우(禹)의 도성(都城)이라 기술한 문헌들도 있으나 엄연한 역사왜곡(歷史歪曲)이다. 교차확인하면 모두 뚜렷하게 고증된다. 우(禹)의 도읍지는 하남성 우현(禹縣)으로 오늘날의 개봉(開封) 남서쪽이다.
위에서 언급한 저자의 논문과 저서를 참고하면 되겠지만 다른 독자를 위해 지도 한 장을 제시한다.
이 글을 읽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댓글 환영한다.
질문: 왜 황제헌원씨가 염제신농씨 그리고 구제치우씨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해 보기 바란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