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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上>민족사의 진실

글쓴이 : 폴 김 날짜 : 2012-02-24 (금) 09:07:43

역사(歷史)의 3대 요소(要素)를 사람, 장소, 시간이라 한다. 우리 동이배달 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처럼 지나(支那) 대륙의 광활한 영토(領土)를 빼앗기고 한반도(韓半島)로 쫒겨온 민족사(民族史)의 경우에는 그 당시의 영토, 즉 강역(疆域: 국경)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의 단군조선(壇君朝鮮)때 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고려때까지 사서(史書)에 자주 나타난 지명들인 영주(營州)를 경상북도 영주군이라 하고 패수(浿水)는 대동강의 옛 이름이며 살수(薩水)는 청천강, 평양성(平壤城)은 한반도 평안남도 평양이라하는 등 망발(妄發)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고증(考證)이나 연구(硏究) 없이 일제하에서 배운 엉터리 역사(歷史)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신라 시조(始祖)는 김씨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기록에,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 우물) 옆에 있는 숲사이에 말(馬)이 무릎을 꿇고 울고있어 가보니 갑자기 말은 볼 수 없고 다만 커다란 알(卵) 하나만 있었다. 그것을 깨어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데려다 길렀는데 여남은 살이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했으므로 그를 높이 받들고 존경했다. 이때 그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 했는데 처음에 큰알이 표주박과 같았으므로 박으로 성을 삼았다.

거서간(居西干)은 진한에서는 임금을 말한다. 혹은 귀한 사람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신라의 박씨,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왔고 김씨는 황금 궤(상자) 속에 들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며, 혹은 황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너무 기괴(奇怪)하여 믿을 수 없으나 세속이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 한다.”라고 논평하여 김부식(金富軾) 자신도 신라(新羅) 시조 혁거세에 ‘박(朴)’씨를 하사(?) 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로 만들었지만 그의 난생신화(卵生神話: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에 의구심을 가졌다.

 

▲ 김부식 www.ko.wikipedia.org

2008년 KBS 역사 스페셜(Special)에서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太子) 김일제(金日磾: BC 134-BC86)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 소개하면서 근거로 신라 30대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발굴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을 소개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기록에, “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하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姓氏)인 김씨의 시조(始祖)이다.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이시고 흉노 조정(朝廷)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여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 하였으며 그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다.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멀리 피난 하였다.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문무왕(文武王)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7대를 이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김씨(新羅金氏)의 시조(始祖)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BC 2578-BC 2494)이고 중시조(中始祖: 쇠퇴한 가문을 중흥시킨 조상)는 김 일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 시조(始祖)의 왕호(王號)가 거서간(居西干)인데 거서간(居西干)의 뜻은 “서쪽에서 살다온 왕”으로 서쪽에 있던 한(漢)나라에서 난을 피해 요동(遼東)으로 왔다는 본문의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신라의 시조(始祖)는 ‘박’씨가 아니라 ‘김’씨로 보아야 한다.

● 왕망(王莽)은 김일제의 증손자?

“한(漢)나라에 난리(亂離)가 나서 난을 피해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되었다.” 라고한 한(漢)나라 난리는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AD8-AD23) 나라가 망(亡)하고 유수(劉秀: 광무제)가 후한(後漢)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난리를 뜻한 것으로 보여진다. 왕망(王莽: BC45-AD23)이 전한(前漢: BC202-AD8)을 멸망시키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워 15년간 대륙을 지배하지만 지나(支那) 정사(正史)인 25사에 들지도 못할 뿐더러 ‘왕망 열전’ 정도로 사서에 기록되어 황제(皇帝)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15년이란 짧은 기간중 왕망은 많은 개혁정책을 폈는데 특히 그는 수많은 지명(地名)들을 개칭(改稱)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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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곽광 김일제전’의 기록이다. “當母南卽莽母功顯君同産弟也(당모남즉망모공현군동산제야) 당(김당)의 어머니는 남(남대부인)인데 곧 망(왕망)의 어머니이고 공이 현저한 자로 친동생 이다.” 라고 되어있어 김일제(金日磾)의 증손자인 김당(金當)의 어머니가 왕망(王莽)의 어머니로 김당과 왕망이 형제지간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로 왕(王)씨가 아니고 김(金)씨란 말이 되는 것이다. 왕망이 신도후 (新都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신도후의 신(新)자를 따서 신(新)나라를 세웠다고 해석 할 수도 있지만 1,000년 사직(社稷)의 신라(新羅)가 왜 서나벌, 사라, 사로, 계림등의 국호를 버리고 신(新)자를 택하여 신라(新羅)라고 했는지 우리 후손들이 알지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요동(遼東)은 황하 동쪽

원래 요동(遼東) 요서(遼西)는 경도(동경) 110도를 기준하여 서쪽을 요서라하고 동쪽을 요동이라 했다.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의 경계를 이루고있는 현재의 황하강(黃河江: 당시 요수遼水)을 기준하여 요동과 요서로 불렀다.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지리지’에, 요동군(遼東郡)은 유주(幽州)에 속한 지역으로 양평(壤平), 신창(新昌), 무려(無慮), 망평(望平), 요양(遼陽), 험독(險瀆), 거취(居就), 안시(安市), 무차(武次), 서안평(西安平)등이라 되어있다. 이곳이 바로 단군왕검(壇君王儉)과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 있던 현 산서성을 말한다. 산서성은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중원(中原: 역사 문화의 발원지) 으로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발해), 고려의 핵심 영토였다.

본문에서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요동 (遼東)에 숨어살았다.”는 요동이 바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를 뜻하는 것이다. 한(漢) 나라의 도성(都城)인 서안(西安)에서 산서성으로 몸을 피신한 것이다. 평양성(平壤城)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강(江)을 고구려때는 압록수(鴨綠水)라고 불렀고 다른 이름으로는 마자수, 당취수, 대요수, 그리고 고려(高麗)때는 안민강(安民江)이라고도 불렀으며 현재는 분수(汾水) 혹은 분하(汾河)라고 부르고있다. 당(唐)나라가 요동을 정벌한다는 “요동遼東”은 당시 산서성(山西省)에 있던 평양성 (平壤城)에 도읍(都邑)한 고구려(高句麗)를 뜻한 것이다.

● 단군조선 유민(流民)들이 세운 신라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1,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편을 보면, “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원년 (BC 57) 갑자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 서쪽에서 살다온 왕이란뜻)이였다. 그때 나이는 13세였다.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단군 조선)의 유민(流民)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 알천 양산촌, 둘째 돌산 고허촌, 셋째 취산 진지촌, 넷째 무산 대수촌, 다섯째 금산 가리촌, 여섯째 명활산 고야촌으로 이 여섯 마을은 경도 110도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인 황하로 당시의 요수遼水)를 경계로 하여 산서성 서쪽인 섬서성(陝西省),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신강성(新疆省) 동쪽 일부로 비정(批正)한다.

그 근거로 <산해경>을 인용하면,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偎人愛之(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조선 천독 기인수거 외인애지) “동해(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던 천연호수로 당시에는 동해, 발해, 거야택, 대야택임)안의 북해(산서성 서남 최남단에 있는 운성염지로 당시에는 북해 또는 창해라고 부른 곳이며 2009년 현지 이름으로는 해지解池임)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하여 조선이다.

조선(朝鮮)을 천독(天毒)이라 하며 그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가까이하고 사랑한다.” 여기서 ‘북해 모퉁이’라고 한 것은 이곳 산서성이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영토이자 왕검단군(王儉壇君)의 왕검성( 고구려때의 요동성인 현 산서성 단곡)이 북해(北海)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독(天毒: 하늘의 독을 가지고있는 무서운 사람)은 천축국 (天竺國)이며 도덕(道德)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문서(文書: 많은 역사와 글)를 가지고있으며 금,은(金,銀)과 돈을 가지고 나라 가운데서(단군조선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떠나갔다”라고 <산해경>을 쓴 곽박(郭璞)이 주해(註解)를 한것이다.

천축국 (天竺國)은 동,서,남,북, 중앙으로 5천축국이 있었는데 중천축국에서 석가모니가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진한(辰韓: 진조선)이 BC200 년경에 흉노족 모돈(冒頓)에게 망하고 변한(弁韓: 번조선)이 위만에게 BC 194 년경에 망하자 많은 단군조선의 유민(流民)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피난을 가서 신강성(新疆省), 청해성(靑海省), 감숙성(甘肅省), 서장성(西藏省)일대에 5천축국을 세우게된다. 따라서 최초의 신라가 건국될 때 여섯 마을이라고 한 지명 위치는 모두 지나(支那) 대륙의 서쪽 지방 즉, 경도 110도로 갈리는 황하강(黃河江) 서쪽이어야 한다.

● 신라 최초의 도읍지(都邑地)인 금성(金城)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 밖의 어떤 사서(史書)에도 신라가 언제 어느때 정확하게 도읍지(都邑地)를 옮겼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당시의 여러가지 앞뒤 정황(情況)을 고려하여 유추(類推)가 가능 할 뿐이다. 신라(新羅)는 992년 동안 도읍지를 최소한 10번 이상 옮긴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에 의하면, 금성(金城)은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에 있다. 감숙성 난주는 비단길(Silk Road) 을 연 곳으로 혁거세거서간 17년(BC41)에 왕이 6부(여섯 촌)를 순회하면서 농사짓기와 뽕나무 기르기를 권장하고 독려 (督勵)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37)에 서울에 성(城)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금성은 두번째의 금성으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에 있는 금성을 뜻한 것으로 보여진다.

<대당고 김씨부인 묘명>의 기록대로, “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였다.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라고 하는 요동(遼東)이 바로 산서성 (山西省)이기 때문이다. 제2대 남해차차웅 원년(AD4) 가을 7월과 11년(AD14)에 낙랑(樂浪: 하남성 낙양 북부를 포함하여 산서성 남,동부 패수가 흐르는 패수현의 원곡일대) 군사가 금성(金城)을 공격한 기록이 보이며, 20년 (AD23) 가을에 ‘금성(金星)이 태미성(太微星)자리에 들어갔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당시 엄청난 사건(事件)이 일어난 것을 은유적(隱喩的)으로 기록한 것 같은데 필자는 아직 그 진의(眞義)를 알지못하겠다.

이때는 고구려와 신라가 함께 산서성(山西省)안에 이웃해 있을 당시로 신라(금성金星)가 고구려 (태미성太微星)에 흡수되었거나 고구려의 백성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 근거로 신라(新羅)는 고구려(高句麗)와 AD245년까지 서로 전쟁(戰爭)을 한 기록이 보이지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의 기록에, “문무왕 20년(680)에 김해(金海: 김수로 왕의 가락국이 있던 절강성 현 임해)를 소경(小京: 작은 도읍지)으로 삼았다.” 그후 신라의 황금기를 이룬 35대 경덕왕 16년(757)에는 전주, 양주, 웅주, 한주, 삭주 5곳에 소경(小京: 작은 도읍지都邑地)를 두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신라는 최소한 10곳 이상의 도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강소성(江蘇省)으로 도읍을 옮기다

신라 11대 “조비이사금 16년 (AD24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변경을 침입하므로 우로(于老)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AD245년에 비로서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최초의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4대 탈해이사금 8년(AD64)부터 백제(百濟)와 계속되는 영토전쟁을 한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때 신라(新羅)가 도성(都城)을 세번째로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있는 강소성(江蘇省)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진다. 그 근거로 “3대 유리 이사금13년(AD36)가을 8월에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 침략시켰다.”라고 되어 있어 금성(金城)이 산서성(山西城) 임분시에 있었다면 낙랑(樂浪)의 북쪽 공격은 논리가 맞지 않기때문이다. 왜냐하면 신라의 북쪽은 고구려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또한 14년 (AD37)에 고구려가 낙랑을 쳐서 멸망(滅亡)시키니 낙랑 사람 5천명이 와서 신라에 의지했다. 이때 고구려의 도성은 계속 산서성(山西省)에 있을 때이다. 5대 파사이사금 22년(AD101) 봄 2월에 성(城)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하고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가 거처했다. 월성(月城)은 현 강소성(江蘇省) 염성(鹽城)으로 신라의 4번째의 천도(遷都)가 된다. 9대 벌휴이사금 13년(AD196) 4월 궁궐의 남쪽에 있는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金城)의 동문에 벼락이 쳤다.

이 금성은 강소성 서북쪽 연수현(連水縣)의 금성(金城)으로 보이며 언제 쌓았는지는 알 길이없다. 그러나 감숙성 난주(蘭州)와 산서성 운성시(運城市)의 왕도(王都)를 동쪽 강소성 (江蘇省)으로 옮기면서 금성(金城)이란 이름도 함께 옮긴 것 으로 보인다. 도읍지(都邑地)를 옮길때는 도성(都城)의 이름도 함께 따라다니는 것을 고대사 (古代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 가야국의 침범

6대 지미이사금 4년(AD115) 봄 2월에 가야(伽倻)가 남쪽변경을 침범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했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 황산하는 황산 (黃山)이 있는 안휘성(安徽城)으로 김수로(金首露) 왕의 가야국(伽耶國: 가락국, 금관가야국)이 있던 절강성(浙江城)과의 경계지역의 하천(河川)이다. 당시 가락국의 도읍지는 절강성 낙청(樂淸)이란 곳이다. 낙청은 경도 121.017도 위도 28.162도의 위치이다. 신라와 가락국이 서로 인접하고 있었기에 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입한 것이다.

이같은 정황으로 보아 신라는 산서성(山西省) 임분시의 금성(金城)에서 2대 남해차차웅 20년(AD23) 경에 강소성 (江蘇省)으로 수도(首都)을 옮긴 것이 분명해진다. 이밖에도 월성(月城)과 명활성(明活城)의 기록이 보인다. 금성(金城)은 신라의 최초의 왕도 (王都)로 한반도(韓半島)에 금성(金城)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금성(金城)이란 쇠붙이와 주물로 만든 성(城)이란 뜻으로 쇠금자(金)를 사용한 것만 보더라도 당시 신라인들이 얼마나 금속을 잘 다루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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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국호(國號)와 다섯곳의 서울(小京)


신라는 개국(開國)초부터 신라(新羅)란 국호를 사용하지않았다. 처음에는 서나벌(徐那伐)이라하고 계림(鷄林), 사라(斯羅), 사로(斯盧)등으로 부르다가 제 22대 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AD503) 겨울 10월에 비로서 신라(新羅)로 국호를 정하고 ‘신라국왕’이라는 존호(尊號)를 사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4대 탈해이사금 9년( AD65) 봄 3월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이 울어서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니 금빛 상자가 있어서 가지고와 열어보니 사내 아이가 있었다. 길렀는데 자라나서 총명하고 지략(知略 )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김(金)씨라 했으며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을 고쳐서 계림 (鷄林)이라하고 국호(國號)를 계림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3대 유리이사금 9년(AD32) 봄에 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이에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이라는 6가지 성(姓)을 내렸다. 제31대 신문왕(678-689) 5년(685)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總管)으로 삼았다. 거열주 (居列州)를 승격시켜 청주(菁州)를 설치하니 비로소 9주(九州)가 갖추어졌다. 신문왕 때에 삼한(三韓) 즉,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통일(統一) 되었다는 기록이다.

제35대 경덕왕 16년(757)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고쳐서 상주(尙州: 요녕성), 삽량주를 고쳐서 양주(良州: 강소성), 청주를 고쳐서 강주(康州: 광동성), 한산주를 고쳐서 한주(漢州: 사천성), 수약주를 고쳐서 삭주(朔州: 산서성), 웅천주를 고쳐서 웅주(熊州: 호북성), 하서주를 고쳐서 명주(溟州: 신강성), 완산주를 고쳐서 전주(全州: 하북성), 무진주를 고쳐서 무주(武州: 감숙성)라 하고, 전주(全州), 양주(良州), 웅주(熊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5곳에 수도(首都: 서울) 를 두었다.

청(淸)나라 건륭 42년(1777)에 한림원에서 발행한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구당서’와 ‘신당서’를 인용하면서 “계림(鷄林)은 현재(1777년 당시의 청나라)의 길림(吉林: 길림성의 길림으로 경도 126.735도 위도 43.897도의 위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신라의 9주(九州)의 강역이 간도땅까지 포함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9주를 다시 요약하면, 당(唐)나라가 있던 섬서성 서안(西安)과 하남성 서부 일부를 제외한 지나(支那) 전대륙(全大陸)이 신라의 영토가 된 것 이다.

<下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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