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요동은 고구려

<양서(梁書)>에 고구려의 국토 가운데 요산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는 사방 약 2천리이다.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그 나라의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의 꼬리부분에 있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서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고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서성에 요산이 있다 하였음으로 <양서>가 기술하고 있는 요산은 산서성에 위치한 요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사(南史)>에도 고구려에 요산이 있어 요수(遼水)가 흘러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그 선조에 대한 사적은 <북사(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그 산에서 흘러나온다..“
고 하여 <남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요산 역시 산서성에 있었던 요산임을 알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에도 고구려에 요산과 요수란 하천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水)은 대요(大遼)와 소요(少遼)가 있다. 대요는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흐른다. 소요는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량수(梁水)가 새외(塞外: 요새 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백산(靺鞨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물빛이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러 압록수(鴨綠水)라 부른다. 국내성(國內城) 서쪽을 거쳐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바다(海:황하)로 들어간다. 평양성(平壤城)은 압록의 동남에 있어 큰 배로 사람이 건너다니므로 해자(塹濠) 역할을 한다” 라고 고구려에 요산이 있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양서>, <남사>, <신당서>의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고구려의 영토 안에 요산(遼山)이 있어 그 요산에서 요수(遼水)라는 수원(水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당나라 지리지인 <원화군현도지>에서 “요산(遼山) 때문에 요산현”이라 이름 하였다고 했으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요산현은 오늘날의 산서성에 있다 하였고 <송사>의 기록에 고구려는 기주에 속하고 요동에 있었다고 했음으로 기주, 하동, 요동인 산서성에 요산이 위치하였기 때문에 산서성이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기존 사학계에서는 요동을 요녕성에 있는 요하(遼河)의 동쪽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요녕성 요하의 동쪽이 당시 고구려의 도성(都城)이 있던 요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동(遼東)이란 지명이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춘추시기(770-403BC)에 편찬된 <관자>(719-645BC)에 “연(북연)나라 요동에는 구운 소금(煮)이 있다.”고 하여 요동이란 지명이 처음 나타나며,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요동인 산서성에 위치한 요산(遼山)에서 요수가 발원한다고 <양서>, <남사>, <신당서>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요녕성이나 요하 동쪽이 고구려의 요동이라 기록된 1차사료나 문헌자료는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요하 동쪽에서는 소금이 생산되는 곳도 없고 ‘요녕성에 요산(遼山)이 있어 이곳에서 요하(遼河)가 발원한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없다.
둘째, 요녕성의 요하는 요(遼: 916-1125)나라로 인하여 고구려가 망한지 약 270년, 그리고 춘추시기로부터 약 1,700년 후에 생긴 지명으로 요동인 산서성에 있던 요수가 아니며
셋째, 산서성의 요수(遼水)와 요녕성의 요하(遼河)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서로 독립된,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하천이고
넷째, 고구려와 수․당과의 사이에서 나타난 문헌자료상의 요하(遼河)는 요수(遼水)의 물과 황하(黃河)의 물이 서로 섞인 곳의 황하 즉 산서성과 하남성 사이의 황하를 통칭해서 부르던 이름으로 요수의 요(遼)자와 황하의 하(河)자를 조합해서 부르던 이름이다. 그러나 요녕성의 요하는 황하와 아무 관련이 없는 별개의 하천이다.
다섯째, <수경주> 등을 살펴보면 요동인 산서성의 요수와 황하의 물이 서로 섞인 황하를 요해(遼海)라고도 불렸는데, 즉 요수의 요(遼)자와 황하를 바다의 뜻인 해(海)라고도 하여 두 글자를 합성하여 산서성과 하남성 사이의 폭이 넓은 황하를 요해라고 부른 것이다.
여섯째, 산서성에는 요산, 요산현, 요주, 요수 등의 지리지명이 있지만 요녕성에는 이들 지명이 없다.
일곱째, “하나는 멀리 구주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요동이라 한다.”고 왕우랑과 왕문일이 주장하고 있는데 9주의 위치를 잘 관찰해보면 북쪽 맨 끝은 기주(冀州)로 산서성 남부이고 동쪽 맨 끝은 청주(靑州)로 산동성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 구주의 동쪽인 멀리 청주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요동이라 한다면, 산동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반도나 아니면 태평양을 건너 미대륙이 요동이라는 논리로 비약할 수 있겠다. 논문을 쓸 때 1차사료와 문헌자료를 보아야하는 것은 학자의 기본으로, 9주가 설정되어있는 1차사료인 <상서>, <여씨춘추>, <회남자> 등만 주밀하게 관찰했더라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여덟째, 김한규는 “요동은 ...적어도 전통 시대에서는 이른바 ‘동북’ 혹은 ‘만주’ 지역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하여 만주지역 특히 요녕성을 뜻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요동은 ‘요(遼, 遼水)가 있는 동쪽’의 의미로 산서성을 가리키고, 동북은 서주(西周: 1046-771BC)의 도읍지인 호경(鎬京) 즉 오늘날의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한 방위 표시로 호경의 동북부 즉 유주인 산서성을 뜻하며 서안에 도읍을 했던 한, 수, 당 때까지도 산서성을 동북으로 표현하였으며, 산서성에 있던 고죽국이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에 고구려를 요동이라 불렀다. 즉 산서성을 통칭해서 동북, 요동, 고구려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주=동북=요동=요동의 구운 소금=고구려=산서성이란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녕성의 요하(遼河)는 요동인 산서성의 요수(遼水)와 관련이 없는 별개의 하천으로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로 인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며 1차사료와 문헌자료상 고구려의 요동과 연관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요동(遼東)을 요녕성, 요녕반도, 만주지역 등 요하(遼河)의 동쪽으로 추정, 비정, 추측, 억측, 설정해온 관윤화, 김미경, 김종서, 김한규, 남의현, 백홍기, 왕문일, 왕우랑, 위염염, 이광명, 이병두 등의 설은 오류(誤謬)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그림 5>에서 기주이자 하동, 동북, 유주, 고죽국, 고구려, 요동, 요동의 구운 소금, 산서성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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