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유주는 산서성(C)
황하의 남쪽이라는 의미의 하남(河南: 하남성)과 황하의 북쪽의 의미인 하북(河北: 산서성 남부)으로 구분되어 있던 지역이 손문정부인 중화민국 때인 1938년경에 원래의 하북인 ‘산서성남부의 하북’을 직선 거리 약 2,000리가 넘는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하북성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직이성이 하북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자동적으로 ‘산서성남부와 하내인 하북’에 있던 지명들인 노룡(새), 수양산, 유수(난하), 고죽성, 포판, 갈석산, 창려, 해양, 광녕 등이 지금의 하북성으로 함께 옮겨지게 된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中國古代地名大詞典(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하동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동도: 당(唐)정관 초에 설치하였고, 황하 동쪽에 있는 옛 지명이다. 동쪽은 상산에 이르고 서쪽은 황하에 의거하고 남쪽은 수양, 태행에 이르며 북쪽은 돌궐과 국경을 이룬다. 병, 로, 택, 강, 진, 포, 분, 자, 습, 석, 심, 기, 람, 흔, 대, 삭, 울, 운 등 주(州)를 거느리고 있다. 현재의 산서(성) 땅이고, 하중(河中)을 다스렸으며, 오늘날의 산서성 영제현에서 관리하며 송나라 때 하동로(河東路)로 고쳤다.
<일지록>에 하동, 산서(성)는 하나의 땅이고, 당(唐)의 북경(北京)은 관중(關中)에 있었으며, 관중 동쪽은 하(河: 황하)로 하동이라 불렀다. 원(元)의 북경은 계문(薊門)에 있었고, 계문의 산 서쪽을 산서(성)라 불렀다. 각자 수도지역으로 위치가 가깝고 방(方)모양이다. 산서성에서 서남쪽 청평양, 포주, 두 관청 및 해, 곽, 습, 강, 사주(四州) 땅을 관리하고, 옛날 하동에 염법도(鹽法道)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민국시기에 다시 하동도를 설치하고 산서성에 속하였으며, 안읍현의 운성(運城)을 관리하고, 안읍, 임분, 홍동, 부산, 향저, 안택, 곡옥, 익성, 분성, 양릉, 길, 영제, 임진, 우향, 영하, 만천, 의씨, 해, 하, 평륙, 예성, 신강, 원곡, 문희, 강, 직산, 하진, 곽, 분서, 영석, 조성, 습 대저, 포, 영하 35현을 관리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정관(貞觀)은 당태종의 연호로 627-649 사이인 23년간을 일컫는 말로 당태종 때에 하동도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황하 동쪽인 산서성을 하동도라 하였다는 설명이다.
우선 본문의 내용 중 몇몇 지명을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북경은 하북성의 북경이 아니다. 관중은 섬서성을 뜻하고 섬서성에 있던 한 곳을 북경이라 한 것이다. 민국시기란 손문이 세운 ‘중화민국’을 뜻한다. 요약하면 산서성(山西省)을 하동(河東)이라 했으며 동시에 하북(河北)이라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동의 하(河)는 황하를 뜻하고 하북의 하(河)도 황하를 가리킨다. 때문에 하동이나 하북은 반드시 황하의 동쪽과 북쪽으로 황하와 함께 서로 이웃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동은 섬서성의 동쪽이여야 하고 하북은 하남성의 북쪽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한반도나 요녕성이나 현재의 하북성은 하동(河東)이나 하북(河北)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황하(黃河)와 인접해 있지 않고, 황하의 동쪽이 아닌 황하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420리 멀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며, 한반도, 하북성, 요녕성을 하동(河東)이라 했었다는 사서(史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황하로부터 약 420리 멀리 떨어진 오늘날의 하북성은 손문정부 때인 중화민국 193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황하의 동쪽이란 의미의 하동인 산서성을 기주라 하고 유주라 했으며 역시 요서라고도 하였음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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