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眞番考(진번고)
진번고의 첫 문장이다. “眞番之地, 雖不可詳, 要在今興京之南, 佟家江之左右(진번 땅은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요컨대 지금의 흥경 남쪽 동가강(佟家江)의 양편에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를 인용하고 있다.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이니,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다”라는 내용이다. “장안에서 7,640리”는 앞서 밝힌 내용으로 생략하겠다.
두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秦·漢之時, 眞番與遼東·朝鮮每相連稱, 以其壤地相接也(진·한 때에 진번은 항상 요동·조선과 함께 잇달아 불렸으니, 이는 그 경계가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정약용은 여기에서 『史記朝鮮列傳(사기조선열전)』과 『太史公自序(태사공자서)』를 인용하고 있으나 그가 도출하려는 “진번이 장백산 서쪽”과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으로 검토를 생략하고자 한다.
그는 『鄭克後歷年通考(정극후역년통고)』의 “『한서』에 연나라가 동쪽으로 진번의 이로움을 얻는다고 했으니 진번이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함경도 이북은 틀림없이 변방 오랑케가 살던 땅일 것이다”란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정약용의 논평을 분석해 보자. “흥경(興京) 남쪽 압록강 북쪽은 지금의 애하(靉河) 동쪽 사저강 좌우의 강을 낀 1,000리의 땅인데, 요동도 아니요 조선도 아니라면 진번이 틀림없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진번이 함경도 북쪽에 있다고 하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위 때에 두만하(豆滿河) 이북은 말과 발자취가 통하지 않으니, 이는 대개 장백산의 맥(脈)이 1,000리에 종횡으로 뻗어 막힌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연나라 사람이 먼 곳까지 와서 장사할 수가 있었겠는가? 현도의 서개마(西蓋馬)는 또 진번의 삽현(霅縣)이니, 그것은 장백산 서쪽에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결론 짓고 있다.
정약용은 “∼살던 땅일 것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등 추측을 동원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밝혔지만 서개마는 장백산도 아니고 현도도 장백산 서쪽에 있지 않았다. 요동이란 경도 110도라 나뉘는 황하 동쪽인 산서성을 뜻한다. 필자의 논문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진번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번 땅은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요컨대 지금의 흥경 남쪽 동가강(佟家江)의 양편에 있었다. 진·한 때에 진번은 항상 요동·조선과 함께 잇달아 불렸으니, 이는 그 경계가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眞番之地, 雖不可詳, 要在今興京之南, 佟家江之左右. 秦·漢之時, 眞番與遼東·朝鮮每相連稱, 以其壤地相接也.)라고 모두 43자로 연구를 마쳤다.
정약용이 본문에서 “진번 땅은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처럼 자세히 알 수 없을 때는 함부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경솔하게 말하지 않기(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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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0부∼1)
7. 樂浪考(낙랑고)
“시원(86-81BC) 연간에 군(郡)을 합치고 나서 한나라 조정의 명을 받아 관리가 평양에 와서 다스리거나 현지 지배자를 보내 춘천에서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 뒤에 현지 지배자가 드디어 춘천을 점거하고 스스로 영웅이라고 일컬어 따로 한[하나]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모두 춘천을 맥국(貊國)이라 했으니, 이것은 아마도 낙랑에서 나라를 세운 자가 본래 맥국 사람이어서 드디어 춘천을 맥국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은 『新羅史(신라사)』를 인용하였으나 『신라사』 어디에도 “평양에 와서 다스리거나 현지 지배자를 보내 춘천에서 나누어 다스렸다”는 기록이 없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주장을 하여야 하는 것이 역사논문의 기본이다. 정약용은 소설을 쓰고 있다.
산서성 남부에 위치해야 할 낙랑과 한반도 춘천과는 대략 직선거리로 3,322리의 먼 거리인데 춘천에 낙랑이 있었다고 하는 억단(臆斷)이나,
한(漢)나라 시원 연간은 고구려 제6대 태조궁 무열제(114-19BC)와 같은 때로 국력이 왕성한 시기이다. 어찌 한(漢)나라의 관리가 적국인 고구려의 심장부에 파견되어 고구려 땅을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지나친 허구성 논리의 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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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0부∼2)
7. 樂浪考(낙랑고)
살수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를 살펴보자. “살수는 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이다. 한나라 광무제 건무 13년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취했는데, 한나라 광무제가 ‘낙랑은 우리 할아버지 무제가 연 나라이니 이를 잃을 수 없다.’ 하여 바다 건너 낙랑을 쳐서 옛 땅과 다시 군(郡)이 되었다.
시원 연간에는 동쪽 임둔으로부터 서쪽 요동에 이르기까지 땅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조금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광무제는 살수 남쪽을 한나라에 소속시켰다. 이때에는 고구려가 강성하여 위나성(尉那城)을 점령하고 요(遼)·패(浿) 사이에서 남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천하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면 또한 4군을 모두 회복할 수 없는 까닭에 살수 북쪽 땅을 고구려에 쪼개주고 오직 평양성 하나만 옛 땅을 회복하고, 겨우 살수 남쪽만 한나라에 소속시켰던 것이다.
낙랑국이 비록 중간에 춘천으로 옮겼지만, 본래 평양에서 일어나 평양과 안주가 낙랑의 관할이었다. 낙랑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평양을 취하여 자기 땅을 만들자 광무제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약용의 주장대로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다. 살수는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하천이다. 살수의 위치는 본고의 <그림 4>를 참고하기 바라며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유주와 영주의 위치 연구』를 참조하기 바란다.
]광무제가 “낙랑은 우리 할아버지 무제가 연 나라”라 하였으나 역사를 잘 상고해보면 낙랑 땅은 단군조선의 삼한(三韓)의 하나인 번조선(변한) 땅으로 처음부터 고유한 동이배달한민족의 영토이다. 삼한은 지금의 산서성에 있었다.
]상고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산서성은 치우(蚩尤)와 황제(黃帝) 사이의 10년 전쟁(2707-2697BC)에서 치우천자가 획득한 영토이다. 한무제(156-87BC) 보다 약 2600년 전부터 우리 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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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0부∼3)
7. 樂浪考(낙랑고)
그리고 “낙랑이 중간에 춘천으로 옮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조실록이 1,893권이며 25사가 4,022권이고 『사고전서』에 80,000권의 문헌사료가 수록되어 있다. 필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들 사료를 모두 조사, 검토, 비교, 분석해 보았다.
정약용이 주장한 그런 내용은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단행본으로 우리의 역사를 가장 왜곡한 책이 일명 『東國史略(동국사략)』이라고도 하는 『朝鮮史略(조선사략)』과 지리서인 『朝鮮志(조선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사략』과 『조선지』는 역사왜곡의 극치를 이루던 명나라 때 편찬한 것으로 저자가 없다. 저자를 밝히지 않은 사료는 100% 위서(僞書)로 단정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실]학자라는 사람들은 왜곡 날조된 이런 책들을 비판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유감스럽게도 정약용은 낙랑별고에서도 [허구의] 소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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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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