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浿水辨(패수변)
“浿水者, 平壤之大同江也. 桑欽之經本無差謬, 而酈道元枉生疑惑, 使後人別求他水(패수는 평양의 대동강이니 본래 상흠의 『수경』에는 잘못이 없었는데, 역도원이 잘못 의혹을 만들어서 후인으로 하여금 따로 다른 물을 찾게 하였다)”라고 시작하였다.
정약용의 논평을 들어보자. “『수경』의 문례(文例)에 보면, 패수의 이야기가 잘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상흠(桑欽)이 어찌 일찍이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던가? 여기에서 말한 평양의 대동강을 분명히 덕천현(德川縣) 동쪽에서 나와서 남쪽의 증산현(甑山縣)을 지나서 동쪽의 바다로 들어갔으니, 『한서』에 이른바 패수가 서쪽의 증지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갔다는 것이 이것이다”라 하였다.
정약용은 역도원을 신랄하게 나무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상흠이 똑바로 기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상흠도 역도원도 패수가 대동강이라 말한 적도 없고 말했다는 기록 역시 어디에도 없다. 정약용은 여기서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又『史記·朝鮮列傳』所載浿水, 明以今鴨綠江謬指爲浿水, 不當以時代之較先信此疑彼(『사기』에 실린 바에 의하면, 패수는 지금의 압록강인데 패수라고 잘못 가리켰으니, 시대가 앞섰다고 해서 이것을 믿고 저것을 의심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의 논평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연나라가 조선과 패수를 경계를 삼았다고 했으니, 만일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다면 어찌 다시 조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왕검(王儉)은 평양이니, 위만이 대동강을 이미 건너서 평양에 다시 도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지금에 사람들이 이 글을 고집하여 또 거류하(巨流河: 大遼水)를 패수라고 하는 것은 더구나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한나라가 일어나 다시 요동의 고새(故塞)를 수리했으니, 이미 요하를 건넜는데 어찌 다시 요수를 경계를 삼는단 말인가?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큰물이 없다면 패수가 곧 압록강인 것 같다”라고 추측하고 있다. 정약용이 주장한 것처럼 『사기』에는 압록강이 패수라는 말은 일체없다. 사마천은 “패수는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21부∼2)
18. 浿水辨(패수변)
세 번째 문단을 검토해 보겠다. “至班固撰『地志』, 始正『史記』之謬. 大同曰浿水, 鴨淥[綠]曰馬訾水(반고가 『지지』를 지음으로써 비로소 『사기』의 잘못을 바로잡았으니, 대동강은 패수요, 압록강은 마자수(馬訾水)다)”라고 하였다.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약용은 『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를 인용하였다.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增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고, 마자수는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하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내용과 『通典(통전)』의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에 닿았다고 했고, 마자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수이니 그 근원은 동북쪽 말갈 백산(白山)에서 나와서 국내성 남쪽을 거쳐서 또 서쪽의 다른 물과 합하니 이것이 곧 염난수다. 이 두 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기술이다.
『한서』를 지은 반고는 정약용의 주장처럼 대동강이 패수이고 압록강이 마자수란 말을 한적도 없고 해놓았다는 기록도 없다. 정약용은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될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과 반고를 싸잡아서 형편없는 사람으로 폄훼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패수변’을 찬(撰)한 정약용이 틀렸다. 반고가 “대동강은 패수요 압록강은 마자수”라고 바로잡았다면, 그 증거로 1차사료와 문헌자료를 제시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논거(論據)를 제시하지 못하고 오직 억측과 억단만을 나열하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21부∼3)
18. 浿水辨(패수변)
다음 문장이다. “總之, 浿水有四. 其一·其二前所論者是也. 其三遼東之軒芋濼, 亦有浿水之名(패수가 모두 넷이 있는데, 그 첫째와 둘째는 앞서 말한 것이요, 셋째는 요동의 헌우락(軒芋濼)을 역시 패수라고 한다)” 라고 적고 있다. 계속해서 다음문장을 보자. “其四今平山之豬灘水, 亦於東史或冒浿水之名(그 넷째는 지금의 평산 저탄수(猪灘水)가 또한 동사(東史)에 패수(浿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약용은 그의 주장의 논거로 『一統志(일통지)』, 『文獻備考(문헌비고)』, 『盛京志(성경지)』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세 문헌은 사실이 왜곡된 책들이다. 정약용이 언급한 『일통지』는 『明一統志(명일통지)』로 명나라 이현(李賢) 등이 천순 5년인 1462년에 만든 지리서이며 『성경지』는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로 청나라 건륭44년인 178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사실이 왜곡된 책들이다. 또한 『문헌비고』는 조선 영조 시기인 1770년에 홍봉한이 기록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지리지명이 잘못된 책이다. 여기서 정약용이 인용한 책들은 모두 곡필(曲筆)된 책이다.
패수의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온다.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부속시켰다”고 했으므로 패수는 한나라 초기인 BC200년경의 기사이다.
그런데 정약용이 인용한 사료들은 1660년에서 1770년경에 지어진 책들이다. 약 1660년 이상의 년대 차이가 난 사료들이다. 역사적 사실을 고증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당시의 1차사료에 의해 고증해야 함이 원칙이다.
따라서 정약용은 왜곡된 사료들을 비판하지도 않았으며 1660년 후에 만들어진 왜곡된 사료로서 패수에 관한 1차사료가 될 수 없다. 패수는 4곳에 있을 수 없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21부∼4)
18. 浿水辨(패수변)
정약용은 패수가 모두 4개 있다는 엄청난 곡필을 하고 있다.
역사에 등장하는 패수는 오직 한 곳에만 있어야 하고 그곳 한 곳에만 있었다. 마치 한반도의 한강(漢江)과 같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한강의 수원(水源)은 3곳이다. “강릉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금장강,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소양강, 그리고 속리산에서 발원하는 달천이 그것이다.” 이들 세 물이 합류하여 한강을 이룬다.
한강은 이 세상에서 한국 서울에만 있는 강이다. 한강이 광주, 경주, 제주에 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한강은 자연 지형물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조선과 경계를 이룬 패수 또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패수는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하천인 것이다.
水經(수경)에서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해(海: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하여 패수가 황하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說文解字(설문해자)에는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해(海: 황하)에 들어간다”라고 하여 역시 패수의 물이 황하로 들어감을 나타내주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14 comments
이00
패수가 네 개 라는 건 혹시 遼東이 新彊省이나 감숙성에서 섬서성 또는 산서성 또는 遼寧省으로 지명이동과 관련이 있을까요?
Paul Kim
황하의 별칭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고려의 강역 연구>(제19집)에서 자세히 밝힙니다.
(10/23/2022)… See more
Corean History - 한국사
DRPAULKIM.BLOGSPOT.COM
Corean History - 한국사
이00
저도 패수가 지금은 거의 직강공사를 한 현재 망하 라고 부르는 하천임을 선생님의 논문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황하로 진입하는 여러 하천 중에서 제수 연수 취수 격수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망하가 왜 유명한 패수가 됐을까요? 세상의 중심인 단군조선의 핵심하천이어서 일까요?
이00
고려의 강역연구 논문이 출간되었나 봅니다. 축하합니다.
Paul Kim
海를 바다라고 해석한 사람이 많은 이유에 대한 답은 필자의저서 <사근경>의 부제에 있습니다. "책은 지식의 보고이고 지식에서 얻은 역사는 지혜의 관문이다"가 대답입니다.
이00
무식해서가 답이라는 거지요?
Paul Kim
무식함도 있지만 책을 읽지않아서 무식함입니다. 생이지지가 아니면 대다수는 무식하지요 때문에 사람은 공부를 해야합니다. 대학을 가고 학위를 받아야 만 무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노자나 사마천은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무식하지 않았어요.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제도권 식민반도사학자들 99.99%는 모두 무식한 자들입니다. 특히 한국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더욱 심하지요. <삼국사기>, <고려사>등의 문헌 원문을 변조한 자… See more
홍00
당시에 지리나 지명 등에 익숙하지 않거나 정확하지 않은 지식으로 기록되었을 것이거나 왜곡되게 기록되었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역사가 얼마나 많이 왜곡되게 기록되고 그 후에 가르쳐왔는지 모릅니다.
Paul Kim
고맙습니다. 논평 참고하세요.
Paul Kim
댓글에 대한 논평으로 존칭은 생략한다.
한반도에 최초로 지리지명을 끌어들인 사람들은 지나인도 일본인도 아닌 이씨조선의 실학자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동양 최초의 지리서는 <상서/우공>이고, <여씨춘추>, <회남자>, <산해경> 등을 비롯하여 각종 <지리서>, <이아>, <통아>, 그리고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고대지명대사전> 등을 교차확인하면 동이배달한민족의 상고사에 나오는 지리지명들을 약 90% 이상 확인이 가능하다.
<25사>에 4,022권 그리고 <사고전서>에 79,337권의 원전문헌이 수록되어 있으나 이들 어느 곳에도 고대사에 나오는 지리지명들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25사>와 <사고전서>에 수록된 문헌들은 지나인들이 기록한 것이며 지리지명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지리지명을 왜곡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이들 문헌들은 일본인(왜인)과 한국인(이씨조선인)이 기록한 것이 아니다.
지리지명을 한반도에 옮겨 정착하게 하도록 단초를 제공한 원흉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아방강역고>를 지은 정약용을 비롯하여 이익, 한백겸, 안정복, 정극후, 유형원, 허목, 남구만, 이세구, 이이영, 신경준, 홍만종, 성해응, 한치윤, 한진서, 홍경모, 이원익, 홍여하, 임상덕 등 무식한 실학자들이다.
이들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를 읽지도 않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천박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비정, 추정, 추측, 억측, 억설, 억단으로 허구의 소설을 쓴 사람들이다. 이같은 허구의 만담을 역사라고 신봉하고 가르치고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제도권 식민반도 강단사학자들의 무식함은 실학자들보다 훨씬 더하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 <史根經> 역사는 모든 학문의 뿌리 또는 www.coreanhistory.com 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21부∼5)
18. 浿水辨(패수변)

水經注(수경주) 「십삼주지」에는 “패수가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패수가 그 남쪽에서 나와 루방을 지난다.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 있는 조선까지 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경주에서도 역시 패수는 동쪽에서 황하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朝鮮)은 패수의 서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전국시대에 위만이 왕으로 왕험성에 도읍했으며 땅이 수 천리였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高句麗)가 다스리는 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경주에서도 수서와 신당서처럼 조선과 고구려의 강토가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패수는 예맥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산이라고 불리던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지금의 왕옥산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패수란 이름 외에 예수(濊水), 연수(沇水), 제수(濟水)라고도 불렸으며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있는 오늘날의 망하(莽河)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 강(江)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압록강이 패수라고 주장한 정약용이 틀렸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패수의 위치 연구』나 www.coreanhistory.com을 참고하기 바란다. 패수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6>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논평한다.
댓글:
垣曲이라면 漢武帝 劉徹이 衛氏朝鮮을 무너뜨리고 王儉城을 壤平城으로 칭했고 漢末 公孫度가 遼東王을 자처하면서 양평성을 遼東城으로 불렀다는 그 요동성인가요? 이 요동성이 고구려의 요동성이지요? 당나라 때는 安東都護府이고요?
답글:
원곡(垣曲)은 원래 영주(瀛州) 또는 하간(河間)이라 부르던 지역이며 한(漢)나라 무제가 원현(垣縣)이라 부른 곳이다. 역시 동원(東垣)이라고도 했다. 송나라 때 원곡현이라 했다. 원곡이전에는 왕검 단군조선의 왕검성이고 변한의 도성이 된 곳이다.
우선 요동과 요서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다음은 요동은 광의의 요동과 협의의 요동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서는 진(秦)나라가 유주의 서쪽 일부를 가리킨 것으로 즉, 수양산이 있는 산서성 남서부 황하가 굴곡하는 지역을 뜻한다. 공손도의 요동 이야기는 발기가 공손도에게 넘겨준 요서지역을 일컫는 말로 원곡이 아니다.
광의(廣義)의 요동은 경도 110도로 갈리는 황하의 동쪽 산서성을 뜻하고 협의(狹義)의 요동은 고구려의 평양성 즉, 산서성 임분(臨汾)을 일컫는다. 따라서 안동도호부의 요동은 평양성을 가리킨다.
양평성(壤平城)은 실존하지 않은 지명으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나타난 단어이다. 양평을 거꾸로하면 평양(平壤)이다. 공손도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차지한 적이 없다.
필자의 여러 논문에 이미 자세히 밝힌 내용이니 논문들을 꼼꼼히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 기회에 흥미있는 사실을 언급하자면 지나인들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Allergic reaction)을 일으킨다. 동이배달한민족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해서일까.
① 요동의 요(遼)자 ② 평양의 양(壤)자 ③ 패수의 패(浿)자 ④ 요수의 요(遼)자 ⑤ 삼한의 삼(三)자 그리고 ⑥ 지역을 가리키는 현(縣)자 등이다. 문헌사료 원문을 스캔(Scanning)한 PDF를 한글로 복원하려 할 때 이들 글자는 절대 복원이 되지않고 엉뚱한 글자로 바뀐다. 21세기인 지금도 지나인들은 역사를 조작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 있는 공자학원 관계자들에게는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서 찾아낸 동이배달한민족사의 지리지명을 절대 가르쳐주면 안된다.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