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봉천통지>는 1929년 지금의 ‘요녕성’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인 ‘봉천성’의 지방지로 1983년에 동북문사총서편집위원회(東北文史叢書編輯委員會) 작자로 되어 있지만, 중공의 사학가 김육불이 지은 <동북통사>를 저변으로 하여 저작된 것으로 김육불 개인 저서나 마찬가지이다.
동양사에서 기주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기주에 관한 <봉천통지>의 기록이 1차사료와 문헌자료의 기록과 일치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최초로 기주를 기록한 1차사료로 여겨지는 <상서>, <여씨춘추>, <회남자>, 그리고 <주례직방씨>에 나타난 9주의 하나인 기주를 <봉천통지>의 기록과 대조, 비교, 검토, 분석, 교차확인 하였다.
또한 <통전>, <괄지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고대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명대사전> 등 여러 종류의 문헌자료들을 함께 검토하였다. 그 결과 문헌사료에 기록된 기주의 위치가 <봉천통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은 기주, 유주, 요서, 연(燕)국, 동북이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인 하내에 위치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봉천통지>는 오늘날의 하북성과 요녕성에 이들 지명과 연(燕)국이 위치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봉천통지>는 1983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고 조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사적 사실을 고증할 때는 <명사>와 <청사>가 <수서>, <구당서>, <신당서>를 뒤엎을 수 없듯이 1983년에 만들어진 <봉천통지>는 춘추전국시대에 쓰여진 <상서>를 비롯하여 <여씨춘추>나 <회남자>의 기록을 뒤집을 수 없는 것이다.
‘기주’의 위치에 대하여 그 원리와 현상을 조리있게 캐고 조사하여 생각해 낸 결론은 <봉천통지>를 지은 김육불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의 내용과 전혀 다른 역사 왜곡의 억단(臆斷)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봉천통지>가 동이배달한민족사의 지리지명과 관련하여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 일부 제도권의 오류를 지적하고 <봉천통지>의 내용은 허구임을 밝힌다.
주제어: 기주, 유주, 동북, 요서, 연, 하동, 고죽국, 수양산(중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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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3부
1. 머리말
한국사뿐만 아니라 동양 고대사(古代史)에 있어 기주(冀州)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며 그 중요성 때문에 그동안 끊임없는 논쟁이 되어왔다. 기주를 어느 지역에 설정하느냐에 따라 고대사의 강토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기주의 위치를 오늘날의 하북성으로 비정하면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비롯한 모든 고대국가들의 영토가 하북의 북쪽과 한반도로 축소되지만 기주의 위치가 산서성 남부라면 고대국가의 강역은 황하강을 경계로 북쪽 전 지역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잘못된 지리지명 추정은 역사왜곡으로 직결된다는 이유이다. 때문에 왜곡 날조되지 않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한 정확한 기주의 위치 확인은 고대사에 등장한 단군조선(壇君朝鮮)을 비롯하여 진한(진조선), 마한(막조선), 변한(번조선), 대부여,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대진(大震), 고려(高麗) 등의 ‘역사적 영토’를 정확하게 인식하는데 있어 반드시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과제이다.
왕검단군은 요·순 시기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며 단군조선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사서로 동한(東漢) 시기 조엽(趙曄)이 지은 <吳越春秋(오월춘추)>와 송나라 때 라필(羅泌)이 쓴 <路史(로사)>가 있는데, 이들이 기술하고 있는 단군조선 땅이 다름 아닌 기주와 연주(兗州) 지역이다.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같은 지역인 기주와 연주가 유주와 영주로 바뀌고 유주의 일부가 다시 요서로 지칭되어 간다. 따라서 4,354년 동안 베일에 싸여 왜곡 날조된 단군조선의 발생지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다름 아닌 기주인 것이다.
필자가 조사해본 바 기주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무려 820종에 달하는 방대한 수량이지만 기주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이들 문헌을 모두 검토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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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4부
우선 <奉天通志(봉천통지)>란 책이 사료적 가치가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봉천통지가 나타나게 된 내역을 알아보도록 하자.
역사상 봉천(奉天)이란 이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봉천현(奉天縣)”으로 “당나라 문명(文明) 원년인 684년에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에 세우면서 시작되어 원나라 지원(至元) 원년인 1264년에 폐지되었다.
봉천현이 폐지되면서 봉천부”가 청나라 순치 14년인 1658년에 요양에서 요양부 성경 즉 지금의 심양시(沈陽市)가 봉천부로 개칭되었고 1913년에 폐지되었다. 청(淸) 광서 33년인 1908년에 봉천성을 개설하고 치소는 봉천부였는데 지금의 요녕 심양시이다. “1929년에 요녕성으로 개명되었다.”
섬서성 봉천현에서 요녕성 심양시의 봉천부로 1908년에는 봉천성으로 그리고 1929년에 요녕성으로 지명이동과 함께 이름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천성은 19세기 초에 나타난 이름으로 김육불(金毓黻)이 <봉천통지>에서 언급한 기주는 춘추전국시대(770-221BC)의 기주를 기록하고 있는 <상서>와는 약 2,400년이 지난 후대에 만들어진 김육불 개인의 견해라는 사실이다.
1차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후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관련된 사료와 문헌자료들을 면밀하게 조사, 검토,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택하였고, 1차사료에 근거하여 기주의 위치를 고증하여 밝히고 김육불의 <봉천통지>가 기술한 기주와 비교하면서 역사적 근거, 논리성, 설득력, 객관성, 그리고 권위 등을 감안하여 문제점을 밝히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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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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