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고려(高麗)의 도읍지는 고구려의 부소갑이고 신라의 송악군이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출생한 곳인 오늘날의 황하 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있는 복양(濮陽)이다.
강화도를 기록하고 있는 원전문헌사료는 약 22종으로 53권에 이른다. <元史(원사)>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고려가 원나라에게 쫓기는 시기에 나타난 지명이기 때문이다. <御批歷代通鑑輯覽(어비역대통감집람)>에는 “강화도성(江華島城)은 조선국(이씨조선) 개주(開州) 동북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고,
<明一統志(명일통지)>에는 “강화도는 나라의 도성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원나라 시기 고려왕의 족속인 승화후(?~1271)가 여기를 지켰다”라고 하며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에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동북 바다”와 “남쪽 바다”와 같이 방향에 문제가 있으나 지금의 한반도 강화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고려 시기의 강화(江華)는 오늘날의 호남성(湖南省) 강화현(江華縣)으로 몽고족(원)에게 쫓겨 남쪽에 위치한 이곳 강화로 피신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유로는 고려의 도성인 개경(開京)이 있는 하내의 복양에서 동쪽 산동성으로 피해 그곳 산동성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한반도 하필이면 섬인 강화도로 피신했다는 것은 논리성으로 보아 설득력이 약하다.
생사(生死)가 갈리는 위기 상황이다. 난리 중에 한가롭게 배를 구하여 배를 타고 다시 서해를 가로질러 강화도로 피신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시간적으로 매우 긴박한 상황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쫓겨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호남성은 백제의 영토였고 660년 백제가 망한 후 신라의 강토에 편입된 지역이며 고려의 남경유수관은 호북성 신주(新州)이다. 호북성 아래인 호남성 강화로 피신하면 남경유수관의 군사로 적(몽고)을 막을 수 있는 전술적인 지역이기도 한다.
복양에서 황하만 건너면 육지를 통해 남쪽에 위치한 호남성의 강화까지 아주 멀리 피할 수 있는 위치이고 이곳 강화는 “한(漢)나라 시기부터 빙승현(馮乘縣)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던 지명이며 당나라가 강화현을 설치했다. 호남성의 “강화(江華)”가 후대의 역사왜곡으로 인하여 한반도 지금의 “강화도(江華島)”로 각색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고려의 강화와 이씨조선의 강화도는 같은 지명이 될 수 없다. 고려는 한반에 위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경유수관에 대한 정보는 필자의 저서 『사근경: 역사는 모든 학문의 뿌리』(2021), pp.580-582를 참고하기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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