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渤海考(발해고)
발해고의 첫 문장을 살펴보자. “渤海立國, 本據[高]句麗之地, 我邦西北之邊, 皆入疆理(발해는 본래 고구려 땅을 점거해 나라를 세웠다. 우리나라 서북쪽의 변방이 모두 그 영토 안에 들어갔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정약용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唐書(당서)』를 인용하고 있다. “발해는 본래 속말갈로써 고구려에 소속되었던 자다.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무후(武后) 때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동쪽으로 도망쳐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쪽을 차지했다. 중상이 죽자 그 아들 대조영이 나라를 세워, 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당서 주(註)에 의하면 만세통천(萬歲通天: 696-697) 년간에 거란(契丹)이 영주(營州)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사리(舍利) 걸걸중상이란 자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으니, 벽을 세운 듯 견고했다.
이에 무후가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봉하고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해 그 죄를 용서했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무후는 옥령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 색구(索仇)에게 명령을 내려 걸사비우를 쳐서 목을 베었다.
이 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어 그 아들 조영이 패잔의 무리를 이끌고 달아났다. 이해고가 바짝 뒤쫓아 천문령(天門嶺)을 지났을 때,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사를 거느리고 항거했다. 이해고가 패해 돌아오자, 거란과 함께했던 돌궐 군대의 길이 끊어져 토벌할 수가 없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치고 땅이 먼 것을 믿어 좋은 사이를 맺었다. 땅이 사방 5,000리요, 가구 수가 10여만 이었다”는 내용이다.
정약용의 논평을 들어보자. “태백산은 우리 나라 백두산(白頭山)이요, 오루하는 지금의 액돈산(額敦山)에서 흘러나온 이하(二河)다. ...발해가 백제땅을 얻었다고 한 『당서』의 기록은 큰 잘못이다”라 하고 있다.
우선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태백산은 백두산이 아니다. 지나 대륙에는 태백산이란 이름의 산이 모두 5곳이며 백두산을 태백산이라 한 적은 없다. 길림성의 장백산(백산)을 일명 태백산이라 하지만 장백산이 백두산은 아니다. 백두산과 백산(장백산)과의 거리는 약 190리이다.
또한 백두산이란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고려 제6대 성종 10년(981)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나타난 백두산은 제16대 “예종 6년(1111)에 산성을 쌓았다. ...선춘령 동남쪽 백두산 동북에 있다고 한다. 혹은 소하강변에 있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요약하면 백두산은 약 1000년경에 문헌에 보이는 산으로 태백산이 아니다. 대조영 기사는 668년 이야기로 백두산의 기록과는 약 330년의 차이가 나고 있다. 정약용이 백두산을 태백산이라고 억지 주장한 것은 우리나라의 옛 영토를 모두 한반도에 비정한 큰 잘못 때문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태백산은 태행산의 오기이거나 곡필이다. 여러 가지 문헌사료들을 교차 확인하면 판단할 수 있다. “발해가 백제 땅을 얻었다고 한 『당서』의 기록이 큰 잘못이다”라고 정약용은 비판하고 있다. 발해가 백제땅을 얻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당서』의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
‘마한고‘와’ ‘한성고’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정약용은 백제가 산서성 남서부와 섬서성 동부에 있던 마한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의 힘에 밀려 산동성에 한성(漢城)을 두고 그 일대를 경영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틀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0윤0
산서성 섬서성 태행산맥은 중공땅 서쪽 입니다. 백제가 산동성근처인줄 알았는데, 태원근처. 시안근처에서 건국 되었네요.
금방 백제가 진평2군을 점령하고.나라를 세웠다고 책보고 유트브를 보았습니다.
수나라 앙제가 고구려를 침공할때에 발해와 갈석산을 사이에있는 고구려 를 공격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수나라때에 이미 발해가 있었나 ? 의문이 듭니다. 발해가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대진국 이라는데. 발해는 고구려 후속 국가로 알고 있는데.
수나라때에 발해를 말한것은 ? 중공이 동해를 발해라고? 이미 명명 했었나요? 고구려시대에 발해지명이 있는 것이 신기 합니다.
이00
발해는 지명입니다. 발해 동해 거야택 창해 라고도 불리웠으며 지금의 동평호부터 남으로 미산호 등까지 거대한 호수로 황하 물길이 바뀌면서 형성되고 송나라 시기에 호수의 물이 빠지기 시작하여 습지 또는 육지로 변하였습니다. 대진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당나라가 발해군공 즉 왕으로 호칭하지요.
이00
수나라 시대는 발해가 없었을 테인데. 고구려 뒤에 발해가 건국 되었지요. 낙랑처럼 발해도 갈석산 근처에 있는 땅이름 이라는 것인가요 !새로운 이야기 입니디ㅡ.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20부∼2)
17. 渤海考(발해고)
정약용의 논평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通典(통전)』에 보면 영주의 치소는 유성현(柳城縣)에 있다. 이곳은 은(殷)나라 때 고죽국이었고, 주(周)나 때에는 산융(山戎) 땅이었다. 동모산(東牟山)은 영주 동쪽 2,000리라고 말했으니, 바로 우리 백두산 동북쪽이다. 지금의 액돈산(額敦山)은 혹시 그 변명(變名)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자신의 논지를 피력하고 있다.
영주(營州)는 두 곳에 있었는데 한 곳은 섬서성 동부이고 다른 한 곳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있는 광녕(廣寧)의 동쪽이다. 『통전』에서 언급한 영주는 유성현이 있는 섬서성 동부 일대를 뜻한다.
정약용이 생각하고 있는 영주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다. 고죽국과 산융은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에 있었던 나라였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고죽국의 위치 연구』나 www.coreanhistory.com을 참고하기 바란다.
유성현은 섬서성 람전현 동남에 있었던 지명이다. 정약용은 동모산이 백두산 동쪽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동모산은 하내에 있는 학벽시(鶴壁市) 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소태산(小泰山)으로 당나라 때 모산(牟山)이라 부른 해발 764m의 산이다. 산세가 험하고 웅장하며 학벽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구름 위에 우뚝 솟는다고 한다.
논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모산은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서남 40리에 있다. 탕하(湯河)가 나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탕음현을 찾아보자. “전국시 위(魏)의 탕음읍(蕩陰邑)이다. 한(漢)나라가 탕음현을 두었다. ...당나라가 바꾸어 탕원현(湯源縣)이라 하였다가 후에 다시 탕음이라 하였다. 명·청 모두 하남성 창덕부(彰德府)에 속하게 했다. 지금의 하남성 하북도에 속한다”라고 적고 있다.
모산(동모산)에서 탕하(湯河)가 출원한다 하였으니 탕하를 추적하면 동모산의 위치는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탕하는 하남성 탕음현 서쪽에서 출원(出源)한다. 동쪽으로 흘러 황현(黃縣)에 이르고 서남쪽에서 위하(衛河)로 진입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위하(衛河)의 위치를 알아보자. “위하는 하남성 휘현(輝縣) 서북 계문산(薊門山)에서 발원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요약하면 휘현, 위하는 현대 대륙지도에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명들로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 『동이배달한민족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정약용이 주장하는 백두산 동쪽에 있다는 동모산과 하내의 동모산(모산)은 직선 거리로 약 3,264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섬서성 서안에서 하남성 하내에 있는 학벽시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190리로써 『통전』의 기록인 “동모산은 영주 동쪽 2,000리 거리”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약용의 동모산 위치 역시 틀렸다. 다음 <그림 14>와 <그림 15>에서 동모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20부∼3)
17. 渤海考(발해고)
『당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천문령(天門嶺)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해고가 바짝 뒤쫓아 천문령을 지났을 때,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사를 거느리고 항거했다. 이해고가 패해 돌아가자, 거란과 함께했던 돌궐 군대의 길이 끊어져 토벌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나라 장수 이해고가 대조영을 공격하려면 당나라 도성인 섬서성 서안에서 하남성 낙양을 거쳐 황하를 건너 동모산에 있는 대진(大震)의 도성 즉, 학벽시를 가야 하는데 용병술이 뛰어난 대조영은 이해고를 천문령 협곡으로 유인하였다.
천문령은 동모산 서남쪽에 있는 지금의 운태산으로 당나라 때는 천문산이라 부르던 태행산맥과 연결된 산이며 휘현(輝縣) 서북 45리에 위치한 하남성과 산서성 경계에 있는 산이다. 천문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주유봉으로 해발 1,304m이고 폭포와 샘과 못이 절경(絶景)이며 산세가 험하고 지나 제일의 협곡인 청룡협곡(靑龍峽谷)이 있다.
대조영이 당나라의 이해고를 격파한 천문령이 있는 이 천문산(天門山)은 사람들이 광녕산(廣寧山)이라고도 부르는 유주의 명산대악으로 『주례직방씨』에서 말하고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 醫無閭山)이다. 본고에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동모산(모산), 태백산(태행산), 천문령(천문산) 등은 황하북부 하남성의 하내(河內)에 있는 지명들이고 영주, 유성은 섬서성에 있는 지명이며 요수는 산서성에 위치한 지명이다. 지도에 동모산과 천문령을 표시하면 다음 <그림 14>와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20부∼4)
17. 渤海考(발해고)
발해고의 다음 문단을 살펴보자. “高[句]麗故地爲西京, 曰鴨淥[綠]府, 領神, 豊, 桓, 正四州. 曰長領府, 領瑕, 河二州(옛 고구려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이것이 압록부(鴨綠府)다. 신주, 풍주, 환주, 정주의 네 주를 거느렸다. 장령부는 하주(瑕州), 하주(河州)의 두 주를 거느렸다.)”
본문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遼史地理志(요사지리지)』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녹주(綠州)는 본래 옛 고구려국이다. 발해는 이를 서경 압록부라 했다. 환주(桓州)는 녹주 서남쪽 200리요, 정주(正州)는 녹주 서북쪽 380리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서』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자. “압록(鴨淥[綠])은 조공의 길이요, 장령은 영주(營州)의 길이다. 과실로는 환도(丸都)의 오얏(李)과 낙유(樂游)의 배(梨)라고 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 두 인용문 속에 나오는 지명들인 압록(수), 환도, 녹주, 압록부, 서경 등은 고구려의 영토에 있었던 지명들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그동안 고구려가 산서성에 위치하였다고 밝힌바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도읍지(都邑地) 들이 있었던 산서성에서 찾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녹주(綠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수나라 개황(581-600) 18년에 간주(簡州)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치소는 영포현(寧浦縣)에 있다”라고 하였다. 정약용의 논평에서 “『당서지리지』에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에 이른다”라고 하였으므로 환도산의 동북쪽을 살펴보았다.
환도산의 위치는 <그림 4>를 참조하기 바란다. 거의 정확하게 환도산 동북쪽에 포현(浦縣)이란 지명이 현대 지도에도 나타나고 있다. 포(浦)란 “물가나 바다가”란 의미를 갖는 글자다. 포현이 위치한 곳에 하천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 포현(浦縣)이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서 언급한 영포현(寧浦縣)이라 확신한다. 대조영의 대진국은 이곳 포현을 ‘서경압록부’라 한 것이다. 서경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의미한다. 이들 지명들을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5>와 같다.

발해고에서 정약용이 주장하는 지리지명들은 모두 1차사료나 문헌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정약용 개인의 희망 사항이나 의견에 불과하므로 더 이상의 비교 검토를 생략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를 참고해주기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