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慰禮考(위례고)
위례고는 다음과 같다. “위례성은 백제 시조가 수도로 삼았던 옛 터다. 지금의 한양성 동북쪽에 있다. 온조왕 13년에 한수(漢水) 남쪽으로 옮겼다. 바로 옛 광주읍(廣州邑)인데, 당시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했다.
남위례(南慰禮)가 도시를 이룬 뒤에도 북위례(北慰禮)를 다시 수리했으니, 아마도 당시에 남북의 두 곳을 모두 서울로 삼은 듯하다.
온조왕이 죽은 지 110년 지나 비로소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는데, 이것이 곧 지금의 경성(京城) 북쪽 성이다. 위례는 북쪽에 있고 신성(新城)은 남쪽에 있어, 당시에는 이것을 북성(北城), 남성(南城)이라고 한 듯하다.
북위례의 옛 터는 지금의 경성동북쪽 10리의 삼각산 동쪽 기슭에 있다. 여기에 사는 백성들은 이곳을 한양(漢陽)의 고현(古縣)이라고 잘못 말한다. 정인지(鄭麟趾)의 <지리지(地理志)>에는 직산현(稷山縣)을 위례성이라고 했으니, 여지서(輿地書)를 이어받아 드디어 없어지지 않은 모범을 만들었다.
이로써 길가의 작은 고을에 그럴듯한 서울의 이름을 씌웠다(慰禮城者百濟始祖首都之地. 其故址在今漢陽城東北. 溫祚王十三年, 徙都漢水之南, 卽今之廣州古邑也. 當時謂之河南慰禮城. 南慰禮雖已成都, 北慰禮益復修營. 當時, 蓋以爲南北二京. 溫祚王旣卒之百十年, 百濟始作北漢山城, 卽今之京城北坊也. 慰禮在北, 新城在南, 當時蓋以爲北城·南城. 北慰禮故址蓋在今京城東北十里之地, 三角山之東麓, 居民誤謂之漢陽古縣. 乃鄭麟趾<地理志>, 忽以今稷山縣指之爲慰禮城. 嗣此, 輿地之書遂作不刊之典, 則路傍殘縣, 儼冒京邑之名.)”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보이는 한양성, 광주읍, 북한산성, 삼각산, 직산현 등의 단어로 보아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문헌사료상 근거없는 정약용의 무책임한 주장은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확대 재생산을 촉발시키는 역사 왜곡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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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7부∼2)
14. 慰禮考(위례고)
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정약용의 삼한고와 마한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마한 54개국의 하나였으며 『통전』이 기록한 백제의 도읍지는 고마성(固麻城)으로 유성과 북평 사이로 황하와 인접한 산서성 서부와 섬서성 동북부에 있었음을 <그림 6>에서 밝힌 바 있다.
둘째, 『삼국사기』에 기록된 “惟此河南之地(유차하남지지)”나 “西阻大海(서조대해)”의 해(海)나 하(河)는 지나 대륙에 있는 황하강을 뜻한다. 한반도의 강을 하(河)나 해(海)로 부른 하천은 없었다. 한반도의 한강(漢江)을 한하(漢河)나 한해(漢海)라고 부른 적은 어디에도 없다.
셋째, “진(晉)나라 시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遼西) 진평이군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南史(남사)』, 『通志(통지)』,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 『通典(통전』 등이 모두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서는 산서성 남서부, 섬서성 동북부, 하남성 서북부라는 사실을 필자의 논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넷째, 『통지』에 “요서 진평이군은 지금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의 사이”라고 적고 있으며 『통전』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다섯째, 직산(稷山)이란 지명은 유주이자 요서인 산서성 남서부에 있다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이 뚜렷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마한의 54개국에 속한 백제가 위치했던 곳은 황하와 인접한 지역으로 유주이자 진(秦)나라 때 요서라고 불렀던 산서, 섬서, 하남성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였음을 확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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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이00
稷山은 백제 두번째 도읍지로 漢城 또는 漢師? 이지요. 중국지명대사전 등에 직산은 幽州이자 遼西에 있었다고 나와 있지요? 그 유주와 료서를 중공 일본 한국 역사학계는 하북과 료녕성으로 비정하고 있다는건데 선생님은 산서성 남서부이다는 거지요.
저도 산서성 남서부가 유주이자 요서라고 봅니다.
Paul Kim
역사(歷史)란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사실을 밝히는 학문으로 실사구시 무징불신(實事求是無徵不信)이라 하여 사실에 근거하여 맞는가의 여부를 따지고 증거가 없으면 믿지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역사를 들먹이면서 합당한 논거(論據)를 제시하지 못하고 “∼비정한다”, “∼추정한다”, “∼추측한다”, “∼라고 생각한다”, “∼일 것이다” 등은 개인 소견(所見)으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직산은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온조가 십제(十濟)란 이름으로 도읍한 곳이고 이곳에 잠시 있다가 ‘백가제해인호위백제(百家濟海因號爲百濟) 백가 즉 많은 사람들이 바다(황하)를 건넜다는 데서 백제라고 불렀다’는 의미의 백제(百濟)란 국호로 도읍한 최초의 도성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알려진 섬서성 동부와 하남성 서북부를 일컫는 말이다.
하남위레성을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했으며 역시 요서진평이군이라고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 『百濟의 領土 硏究』(제16집) 서울: 세계출판사, 2022.를 참고하기 바라며 역시 본 논문이 게재되어 있는 www.coreanhistory.com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00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도를 만들어 보십시오.
Paul Kim
필자의 학술논문에 지도들이 나타나 있으니 www.coreanhistory.com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모두 17편의 논문이 게재되어 있어 누구든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Seo00000
처음 접하는 우리나라 역사네요~
Paul Kim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가르친 동이배달한민족사는 모두 왜곡, 조작, 날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왜곡의 시초가 바로 이씨조선 후기의 실학자라고 하는 위인들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정약용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사실을 알지못하지요. 한반도로 지명들을 끌어들인 정약용의 책임이 너무 큽니다. 고맙습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7부∼3)
14. 慰禮考(위례고)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요서 진평이군”지역은 <그림 6>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백제 도읍지들의 한 곳인 고마성(固麻城)이 있었던 지역임을 확증할 수 있다. 요서 진평이군과 요서에 있는 직산의 위치를 지도에 나타내면 <그림 10>과 같다.

필자의 총평이다. 한반도를 유주나 요서라 했다는 기록은 1차사료나 문헌자료 어디에도 없다. 또 한강을 해(海: 바다)나 하(河)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한반도 광주읍을 하남위례성이라 했었다는 문헌사료도 없다. “직산현을 위례성”이라 한 직산은 한반도의 직산이 아니라 산서성에 있는 직산인 것이다. 필자는 백제 최초의 도읍지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온조가 도읍한 최초의 왕도인 ’하남위례성‘은 한반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춘궁리가 아니고 지나대륙 요서인 산서성 남서부에 있는 한사(漢師)이며 이곳에 직산과 직왕산이 있다.” 따라서 정약용이 위례고에서 주장한 백제의 위치는 틀렸다. 오직 정약용의 억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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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000000
좋은 내용 깊이도 물론, 귀한 내용 삼가 못 살펴 죄송합니다.
Paul Kim
감사합니다.
Seo0000
우리역사지만 어렵네요~
Paul Kim
처음에는 다 어렵습니다. 특히 논문은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의 근거를 문헌사료에서 찾아 증거를 제시하면서 고증하기 때문입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으니 익숙해지면 아주 쉬워집니다. 고맙습니다.
Seo0000
선생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8부∼1)
15. 漢城考(한성고)
한성고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漢城者, 百濟蓋婁[鹵]王之所開荒也. 今我京城之漢陽洞卽其故址(한성(漢城)은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처음 개척한 땅이다. 지금의 경성 한양동(漢陽洞)이 곧 옛 터다)”라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문장을 보자. “至近肖古王二十六年乃自漢南徙都漢城(근초고왕 26년에 한강 남쪽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은 백제의 도읍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을 묵과하였다. 함께 조사해보기로 하자.
백제 제16대 진사왕(辰斯王) 8년 10월에 고구려 제19대 광개토 담덕에게 관미성을 함락당하고 도읍지를 옮겼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백제가 천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앞뒤 정황으로 보아 산동성(山東省) 제령(濟寧)으로 도읍을 옮겨 한성(漢城)이란 이름을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첫째,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패망 직전에 있을 때 “신라에 구원병을 구하기 위해 태자인 문주가 아래로 내려갔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신라가 산동성 아래인 강소성(江蘇省)에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제21세 개로왕이 쌓은 제방(堤防)이 하남성에서 산동성 까지로 도성 밖으로 지나가고 셋째, 고구려의 주된 영토는 산서성으로 백제와 비교적 가까이 있어야 하고 넷째, 제9대 책계왕 때 쌓은 사성(蛇城)은 산동성 황하강과 가까운 곳에 축조한 성(城)으로 도읍지인 제령(濟寧) 북부로 서로 가깝고
다섯째, 백제의 세 번째 도읍지로 보여진 제령시(濟寧市)를 소개한 기록에 “수(隋)나라에 항복한 땅”이라 하며 여섯째, 개로왕 18년에 하남성 낙양에 도읍한 북위에 보내는 글 속에 “신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라는 글귀는 당시의 동해(東海)를 의미하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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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8부∼2)
15. 漢城考(한성고)

개로왕이 쌓은 제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불에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정자를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지냈다. 하수(河水: 황하)를 따라 제방을 세워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 까지 이르게 하니 이로써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져 나라의 위태함이 쌓아놓은 달걀보다도 심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개로왕 때 백제는 산동성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하수(황하), 숭산, 사성(비성) 등은 하남성과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다.
황하강을 따라 하남성 숭산에서 산동성 사성(비성)까지는 산이 없는 평야지대다. 황하의 물이 언제 범람할지 모르는 평야지대인 이유로 개로왕은 돌을 구할 수 없어 흙을 쪄서 벽돌을 만들어 성(城)을 쌓고 제방을 만든 것이다.
한반도 서울의 한강을 하(河)나 하수(河水)라고 부른 적도 없고, 한강이 범람하여 한강을 따라 백제의 개로왕이 흙을 구워 성을 쌓고 제방을 만들었다는 문헌사료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한강은 돌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지역으로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 필요도 없다. 정약용의 주장은 문헌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억측임을 알 수 있는 반증(反證)이다. 정리하면 산동성 제령(濟寧)에 백제의 제3차 도읍지 한성(漢城)이 있었으며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1>과 같다.
한성고에서 앞의 두 문장 이외에 정약용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은 백제의 영토를 밝히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분석, 비판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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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