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卒本考(졸본고)
졸본고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卒本者, 四夫餘之一, 卽高句麗建國之初基也(졸본은 4부여 가운데 하나로, 고구려 건국의 첫 터전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 문장을 보자. “卒本故地在今興京界內, 『魏書』所謂紇升骨城, 是也(졸본의 옛 땅은 지금의 흥경 지방에 있다)”라고 하였다.
정약용의 논평을 들어보자. “옛 졸본 땅은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동쪽에 있고 남쪽으로 두 물을 건넌 곳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원현은 오늘날의 요녕성 개원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무슨 근거로 개원이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인 졸본성이라 주장하는지 명료하게 밝히지 못하였다. 그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魏書高句麗傳(위서 고구려전)』과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인용하고 있지만, 이 두 사서에는 졸본성이 흥경지방이니 개평현이니 하는 그런 말은 전혀 없다. 정약용의 개인 생각인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는 산서성 태원(太原)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요수가 발원하는 요산(遼山)은 산서성에 있다. 둘째, 대요수, 소요수, 마자수, 염난수의 4물이 합하여 이루어진 요수(遼水)인 압록수(鴨綠水)는 산서성에 있다. 셋째, 압록수는 반드시 당시 바다라고 번역한 황하로 들어간다.
넷째, 고죽국이 있던 산서성이 고구려의 영토였다. 다섯째, 고구려의 도읍지는 모두 요동에 있었는데 요동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관중(管仲: 719-645BC)이 지었다는 『管子(관자)』 「地數(지수)」편에 “연(북연)나라 요동에는 구운 소금(煮)이 있다”고 기록하여 천연소금이 생산되는 염지(鹽池)가 산서성 남부에 있기 때문이고 여섯째, 연남생이 현도주도독(玄菟主都督)으로 분봉받은 지역은 병주(幷州), 분주(汾州), 기주(箕州), 남주(嵐州)로 모두 산서성에 있는 지명들이다.
태원에는 졸본성이 있고 평요에는 국내성이 위치하여 서로 가까운 지역이다. 직선거리로 대략 110리 안팎이 되는 거리이다. “유리왕 21년 봄 3월에 교시(郊豕)가 달아나 왕은 설지(薛支)를 시켜 뒤쫓게 했는데, 국내성의 위나암에 이르러 이를 잡았다. ...임금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들의 이익이 무궁할 뿐만 아니라 또한 병란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22년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사 지내려는 돼지가 도망하여 쫓아 잡은 곳에 있는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내용으로 제사를 지내던 졸본성과 국내성은 먼 거리가 아님을 유추할 수 있는 기사이다. 아래 인용문을 함께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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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4부∼2)
11. 卒本考(졸본고)
1921년 중국 하남성 낙양에서 발굴된 연남생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공(公)의 성(姓)은 천(泉)[연]이며 휘(諱)는 남생이고 자(字)는 원덕으로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 ...그의 죽음을 말함에 슬품이 진실로 깊어서 눈물이 그칠 수 없으며 지위를 더하여 추존의 모범을 삼가 기록한다. 사지절도사, 병주, 분주, 기주, 남주 4주의 제군사와 병주자사를 추종하며, 나머지 관직은 전과같이 할 것이다.”라고 하여 천[연]남생(淵男生: 634~679)을 요동 평양성 사람이라 하였다.
연남생에게 봉토로 준 지역인 병주(幷州), 분주(汾州), 기주(箕州), 남주(嵐州)는 모두 산서성에 있는 지명들이다. 병주(幷州)는 평요현 서남에 있다고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이 기술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요현인 평요(平謠)는 국내성이 위치한 곳이다. 정복한 나라의 출신자에게 그의 땅을 봉토로 주는 것은 역사적 관행이다. 요동인 산서성에 연남생의 조국 고구려가 있었다. 그래서 연남생은 고구려의 영토인 산서성의 땅을 봉지로 받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 정리하고자 한다. 다음 <그림 7>과 <그림 8>을 제시하겠다. <그림 7>은 정약용이 주장하는 졸본성으로 오늘날의 요녕성 개원을 나타낸 것이고 <그림 8>은 연남생이 봉지로 받았다는 지명들과 필자가 주장한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의 위치를 나타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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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5부∼1)
12. 國內考(국내고)
국내고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國內城者, 句麗三京之一, 卽自卒本始徙之地也(국내성은 고구려 3경의 하나다. 졸본으로부터 옮겨간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도 『三國史記高句麗本紀(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설지가 돼지를 쫓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논평을 들어보자. “그 땅은 지금의 초산부(楚山府) 북쪽 강 건너에 있다. 동북쪽으로 환도성(丸都城)에서 300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나의 <輿地書(여지서)>에 이르러 압록 남쪽의 옛 인주성(麟州城)이 국내성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고 추측하면서 국내성을 한반도 압록강 이남으로 설정하고 있다.
졸본고에서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만약 고구려의 국내성이 한반도 압록강 이남에 있었다면 당나라가 연남생에게 봉토로 준 땅은 한반도였어야 했다. 그러나 연남생이 봉지로 받은 땅은 한반도가 아닌 산서성이었다. 정약용의 주장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억측의 허구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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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5부∼2)
12. 國內考(국내고)
정약용이 두우의 『통전』를 비판하는 문장을 보자. “올나성은 압록강 북쪽 270리에 있으니, 『通典(통전)』과 『唐書(당서)』에 말한 바 압록강이 국내성을 지날 수 있겠는가? 국내성은 압록강 가의 물에 닿은 땅에 분명히 있고, 위나(尉那)와 올나(兀那)가 음이 비록 서로 비슷하나 『통전』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여 『통전』이 틀렸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통전』을 지은 두우(杜佑)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의 문제점은 산서성에 위치한 압록수를 한반도의 압록강으로 인식한 중대한 오류 때문이다.
천연지형물인 강과 산을 인간이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대사를 복원하려면 반드시 강과 산에 근거하여 지리지명을 밝혀야 하는데 정약용은 압록수의 위치부터 틀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결과가 되었다. 역사지리를 밝힐 때는 정약용처럼 ‘∽아닌가 한다’, ‘∽것이 아닐까?’, ‘∽아닌가 싶다’, ‘∽자리일 것이다’, ‘∽땅일 것이다’, ‘∽땅인듯 싶다’ 등과 같이 추측과 억측을 동원하여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설득력이 없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주장과 합당한 문헌사료의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큰 실수를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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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Ha 0000
근거사료를 전혀 제시하지 못 한 정약용은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식민사관에 힘을 보탰죠.
Paul Kim
그렇습니다. 정확한 비평입니다. 감사합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6부∼1)
13. 丸都考(환도고)[安市附안시부]
“丸都者, 句麗之暫都也. 山上王兄弟不睦, 始營此城(.환도는 고구려가 잠시 도읍했던 곳으로, 산상왕 형제가 화목하지 못해서 이 성을 쌓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魏志(위지)』를 인용하고 있다.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발기(拔奇)가 인품이 부족해 나라 사람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발기는 공손강에 나가서 항복하고 비류수(沸流水)로 돌아와서 살았으며, 이이모가 다시 새 나라를 만들었다. 오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라는 내용이다.
『위지』의 잘못된 내용을 정정하고자 한다. 고구려의 제8대 신대 백고열제는 제6대 태조 궁무열제의 막내동생으로 슬하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발기이며 둘째 아들의 이름은 이이모로 제9대 고국천 남무열제이다. 제10대 산상 연우열제는 남무의 동생이고 막내가 계수이다. 이렇게 바로잡는 것은 『삼국사기』에 근거한 것이다.
발기가 공손도에게 요서 전지역을 넘겨준 기사에 대해서는 대방고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환도고의 두 번째 문장이다. “其地在今滿浦堡北, 鴨綠江隔水之地, 高山之上(그 땅은 지금의 만포보 북쪽 압록강 건너편 높은 산위에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계속해서 정약용의 논평을 들어보자.
정약용은 김부식을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환도는 우리 나라 만포(滿浦) 북쪽에 있는 것이 확실하고 의심할 것이 없는데, 김부식은 엉뚱하게도 안시(安市)를 환도라고 했다”고 질책하는 글귀이다. 지금부터 함께 환도성의 위치와 안시성의 위치를 찾아보자.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고구려의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발원한다고 하였다. 요수를 이루는 물은 4개로 소요수, 대요수, 마자수, 염난수인데 마자수의 물색이 마치 오리의 머리처럼 푸르러 압록수라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양서』, 『남사』, 『신당서』 그리고 『수경주』에 근거한 것이다.
당나라 지리지인 『원화군현도지』에 “고구려 영토 안에 요산이 있어 이 요산으로 인하여 요산현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고, “요산현이 오늘날의 산서성에 있다”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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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6부∼2)
13. 丸都考(환도고)[安市附안시부]
요주(遼州)에 대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이다.
“요주: 수나라 때 설치하였다. 낙평군을 다스렸다. 즉 오늘날의 산서성 석양현이다. 즉시 폐지했다. 당나라 때 다시 설치하였다. 요산으로 옮겨 기주(箕州)라고 고쳐 불렀다. 또 의주(儀州)라고 고쳐 불렀다. 다시 또 고쳐서 낙평군이라 불렀다. 즉시 다시 요주라 불렀다. 송대에는 요주낙평군이라 불렀다. 금나라 시기에는 남요주라 불렀다. 즉시 남(南)자를 없앴다. 원대에도 또한 요주라고 불렀다.”
라고 하였다. 요산이 요주에 있고 요산을 기주, 의주, 석양현, 낙평군, 요양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의 산서성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하면 요수는 지금의 산서성에 있었던 하천이고 압록수라고도 하였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환도성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사방 약 2천리이다.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 곳에서 흘러나온다. 그 나라의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의 꼬리부분에 있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서,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고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
라고 『양서』가 적고 있다. 요산에서 요수가 흘러나오고 도읍지는 환도산이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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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문00
교수님! 고조선의 강역이 전 세계에 날리 퍼져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음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조상들은 미리 알고 안배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씨조선 놈들은 듕국의 신하로 남을려고 개수작을 했군요. 고려역사를 왜곡시킨 아주 드러운 짓을 수백년간 했네요.
Paul Kim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의 고향은 단향(壇鄕)으로 산서성 남부 왕옥산과 패수 그리고 황하 사이에 있었으며 아시아 전체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을 비롯하여 진한, 마한, 변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 고려를 한반도로 끌어들인 사람들이 바로 실학자들입니다. 중공 사람들이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인용하면서 동북공정이라 하여 역사를 통째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도 중공인도 아닌 이씨조선 사람들이 동이배달한민족사를 왜곡시킨 것 입이다. 지금의 제도권 강단사학자들과 동북아역사재단에 일하고 있는 자(者)들 모두 21세기인 지금도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6부∼3)
13. 丸都考(환도고)[安市附안시부]
『南史(남사)』에도 고구려에 요산이 있어 요수가 흘러나오고 도읍지는 환도성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그 선조에 대한 사적은 北史(북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그 산에서 흘러나온다.
한(漢).위(魏) 시대에는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인접하였다. 그 나라의 왕도는 환도산 꼬리부분에 있다. 땅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
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들 사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환도성이 있던 환도산은 산서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환도산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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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6부∼4)
13. 丸都考(환도고)[安市附안시부]
환도성의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구양수가 지은 『신당서』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물(水)은 대요(大遼)와 소요(少遼)가 있다. 대요는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흐른다. 소요는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양수(梁水)가 새외(塞外: 요새 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백산(靺鞨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물빛이 오리머리와 같이 푸르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國內城) 서쪽을 거쳐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성)에 이르러 바다(海: 황하)로 들어간다. 평양성(平壤城)은 압록의 동남에 있어 큰 배로 사람이 건너다니므로 해자(塹濠) 역할을 한다.”
라고 하여 고구려에는 요산이 있고 요산에서 소요수가 발원하고 대요수, 마자수, 염나수, 그리고 소요수의 물이 합쳐 압록수를 이루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황하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 그림에서 제시하겠지만 안시성은 환도성과 함께 환도산에 있었는데 그 환도산은 오늘날의 화염산(火焰山)으로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산이다.
안시성은 환도산 머리 부분에 있었고 환도성은 환도산의 꼬리 부분에 있었다. 김부식은 같은 산에 안시성과 환도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안시성은 혹 환도성이라 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압록수가 안시성을 지나 황하로 들어가므로 안시성을 기점으로 고구려의 도읍지인 환도성, 평양성, 국내성, 졸본성 등의 위치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 <그림 9>와 같다.
환도고에서 정약용이 주장한 환도산의 위치는 틀렸다. 우선 1차사료와 문헌자료 어디에도 한반도나 요녕성이나 하북성이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명백히 기록한 곳은 없다.
『수서』, 『구당서』, 『신당서』만이 유일하게 고죽국의 수양산인 오늘날의 중조산이 있는 산서성이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는 1만리의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여기서 언급한 산서성은 고구려의 도읍지(都邑地)들이 모두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하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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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Paul Kim
나주(羅州)가 오늘날의 광동성 화주현(化州縣)이라는 사실은 <중국역사지명대사전> p.655.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부터 황하를 '하(河)' 나 '해(海: 바다)'라고 불렀고 양자강을 '강(江)'이라 했으며 대륙에 있는 한수(漢水)를 '한(漢)'이라 하고 산동성에서 발원하여 강소성을 거쳐 흐르는 유명한 하천인 사수(泗水)는 "사(泗)'라고 불러, 강이나 하천을 한 글자로 표현합니다. 때문에 '강동(江東)'이란 양자강의 동쪽을 뜻한 것으로 지금의 강소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곳 강소성에 신라의 계림, 금성, 월성, 불국사, 황룡사 모두가 있었던 곳입니다. 신라가 마지막 망한 곳이 바로 여기 입니다. 필자의 학술논문 <신라의 강역 연구>(제18집)이 출간 되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문00
아~ 경주와 황룡사도 조작된 역사 였군요?
몽고가 경주까지 전쟁하려 이 먼 곳까지 내려 온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헛 살았습니다.
Paul Kim
<삼국사기/신라본기> 권4, 제24대 진흥왕편을 보면 "14년(553) 봄 2월에 담당관청에 명하여 새 궁궐을 월성(月城)의 동쪽에 짓게 했는데 누런 용이 그 땅에서 나타나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이 궁전을 고쳐 절로 삼고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월성은 강소성 강음이므로 황룡사 자리는 강음의 동쪽이며 낭산의 서쪽으로 오늘날의 후승입니다. 한반도 황룡사는 허구의 소설 입니다.
몽고가 침입한 시기는 고려 때이고 한반도에는 고려가 있지않았으니 경주 역시 한반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고려 시기의 경주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는 지금의 복양(濮陽)이란 곳으로 당시 고려의 개경(開京)이며 이 곳을 경주라고도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중, 고,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운 동이배달한민족사는 100% 거짓입니다. 강단사학자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식해서 문헌사료들을 읽을 능력도 없고 공부도 하지않아 이같은 역사 왜곡이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것 이랍니다. 한자는 아는자는 공부를 하지않아 왜곡했고 한자를 모르는 자는 몰라서 왜곡한 것이지요.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