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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김의 한민족 참역사
망국적인 식민사관에 언제까지 휘둘릴 것인가. 우리 민족의 참된 역사, 진실된 역사를 알리기 위해 평생을 싸워온 재야 사학자.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한민족사관정립의식개혁회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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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1부∼1)

글쓴이 : 김태영 날짜 : 2022-12-27 (화) 18:28:45

8. 帶方考(대방고)

 

대방고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帶方者, 樂浪之屬縣, 卽今臨津江入海之處也(대방은 낙랑에 속한 현(縣)이니, 곧 지금의 임진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를 인용하였다. “낙랑군의 속현에 대방현이 있다. 또 함자현의 자주(自註)에 말하기를, 대수(帶水)를 지나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 간다고 했다”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대수는 옛 칠중하(七重河)요 지금의 임진강이다. 임진강이 바다로 들어간 곳은 남쪽이 교하(交河), 북쪽은 풍덕(豐德), 서쪽은 연안(延安), 백천(百川)이다. 이들 지역은 물을 건너 서로 바라보이니, 모두 옛 낙랑의 남부 임둔(臨屯)의 옛 땅이다.

대방의 자취는 마땅히 지금의 풍덕·개성(開城) 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함께 검토해 보자. 정약용이 인용한 『한서지리지』 어디에 “대수는 옛 칠중하요 지금의 임진강”이란 말이 있는가.

 

“함자현은 대수가 서쪽에서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含資, 帶水西至帶方入海)”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있지도 않은 임진강을 들먹이며 정약용은 엄청난 곡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1부∼2)

8. 帶方考(대방고)

 

두 번째 문장을 보자. “武帝四郡之初, 帶方本屬臨屯, 至始元, 合郡, 移屬樂浪(무제가 처음 4군을 두었을 때 대방은 임둔에 소속했었는데, 시원 연간에 군을 합칠 때 낙랑으로 옮겨 소속되었다)”라고 하면서 “함자, 대방, 둔유, 탄열은 모두 본래 임둔의 땅이었다. <낙랑고>에 나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약용이 앞에서 지은 <낙랑고>를 보라는 뜻이다. 그의 <낙랑고>에는 “임둔과 현도의 땅으로 모두 증부된 것이다”라고 하여 정약용 자신의 억설이지 『한서지리지』에는 그런 말이 일체 없다.

 

『한서지리지』에는 25개의 속현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제가 처음 4군을 두었을 때 대방은 임둔에 소속 되었다”는 내용 역시 어디에도 없다. 오직 정약용의 억단이다.

정약용은 계속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 민족역사를 왜곡, 날조, 조작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1부∼3)

8. 帶方考(대방고)

 

세 번째 문장이다. “至成帝鴻嘉三年,帶方南界爲百濟溫祚所據(성제 홍가 3년(BC17)에 대방 남쪽 변방이 백제 온조왕에게 점령당했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 문장이다. “光武之時, 伐樂浪以爲郡縣, 則帶方之縣, 亦自漢廷遣吏(한나라 광무 때에 낙랑을 쳐서 군현을 삼았으니, 대방현에도 역시 한나라 조정에서 관리를 보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 사료의 인용 내용과 대방의 위치와는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인다.

 

여섯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至獻帝建安年間, 公孫康始分樂浪南部, 立帶方郡. 此帶方郡建置之始也(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196-20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비로소 낙랑 남부를 나누어 대방군을 두니, 이것이 대방을 세운 시초였다)”라는 내용이다.

 

정약용은 『魏志(위지)』를 인용하고 있다.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거친 땅을 나누어 대방군을 삼고,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불러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한(韓)을 쳤다. 예(濊)의 백성들이 차츰 나와서 이후로는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란 내용이다.

 

그는 또 『晉書地理志(진서지리지)』, 『通典(통전)』, 『漢書(한서)』 등을 인용하고 있으나 대방의 위치와는 관계가 없는 내용들로 검토 분석을 생략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1부∼4)

8. 帶方考(대방고)

 

대방고를 정리해보자. “대방은 낙랑에 속한 현(縣)이니, 곧 지금의 임진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무제가 처음 4군을 두었을 때 대방은 임둔에 소속했었는데, 시원 연간에 군을 합칠 때 낙랑으로 옮겨 소속되었다.

 

성제 홍가 3년(BC17)에 대방 남쪽 변방이 백제 온조왕에게 점령당했다. 한나라 광무 때에 낙랑을 쳐서 군현을 삼았으니, 대방현에도 역시 한나라 조정에서 관리를 보냈다. 한나라 질제(質帝)·환제(桓帝) 사이에 고구려가 남쪽을 침입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였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비로소 낙랑 남부를 나누어 대방군을 두니, 이것이 대방을 세운 시초였다. 그 후 30여 년 지나 위나라 사마의가 공손씨를 멸망시키자, 낙랑과 대방이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위나라 명제(明帝)가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몰래 보내어 바다 건너 두 군(郡)을 평정하니, 조위 때에는 낙랑태수가 다시 왜인(倭人)의 조헌(朝獻)을 받았다. 유흔·궁준의 뒤로는 이름있는 벼슬아치가 없었으므로 현지 지배자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마치 한(漢)나라 낙랑의 경우와 같았는데, 진(晉)나라 때에 이르러 그 징험(徵驗)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14년이 지나 대방이 낙랑과 함께 신라에 복속했다. 그 후 14년이 지나서 고구려가 대방을 침략했다. 그 후 71년이 지나 대방 왕 좌(佐)가 연(燕)나라의 요동을 구원했다. 그 후 40여년 지나 대방군이 연나라 왕 풍홍(馮弘)의 다스림을 받았고, 원위(元魏) 연화(延和: 432-434) 원년에 이르러 위(魏)나라에 멸망 당했다.

 

그 후 40년이 지나 대방태수가 사마(司馬)를 보내 위나라에 조회했고, 백제 왕이 이를 통해 역시 표문을 올렸다. 대방은 모두 넷이다. 그 하나는 위에서 말한 것이요, 두 번째는 요동에 있다는 대방이다.

 

세 번째 대방은 나주(羅州)의 옛 회진현(會津縣)이다. 이곳을 대방주(帶方州)라고 한 것은 이름을 빌려서 쓴 것이다. 네 번째 대방은 지금의 남원부(南原部)다. 일찍이 대방주 자사(刺史) 유인궤가 있던 곳이어서 남원이 대방이 된 것이다.”라고 연구를 마쳤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1부∼5)

8. 帶方考(대방고)

 

정약용이 대방고에서 인용하고 있는 문헌사료들은 대방(帶方)의 위치를 찾는 것과 거의 무관한 내용들로 ‘우리의 강역에 관한 연구’란 그의 논문제목과 크게 궤리된다.

 

대방의 위치를 추적해보자. 대방(帶方)이란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漢書(한서)』 「지리지」의 낙랑군(樂浪郡) 조에 25개의 현 중의 하나가 대방현(帶方縣)이라 하여 나타난다.

 

또한 25개 현 중의 하나인 함자현(含資縣)을 설명한 과정에서 대방현이란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함자현은 대수(帶水)가 서쪽에서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海: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당시의 해(海)라는 의미의 바다란 황하(黃河)를 뜻한다. 그렇다면 대방현은 황화와 인접한 지역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대방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위가 두었다. 대방군조를 보라”고 하였다. 대방군조를 살펴보았다. “한나라가 대방현을 두었다. 후한말에 공손강이 낙랑군 남부를 나누어 대방군 땅이라 하였다. 대수로 인한 이름이다. ...후위가 다시 대방현이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晉書(진서)』에 “대방군은 공손도가 두었다”고 하였다. 공손강과 공손도의 서로 다른 이름이 기술되고 있다. 이들 관계를 먼저 정리해보자.

 

공손도(公孫度: ?-204)는 공손탁(公孫度)이라고도 하는데 도(度)를 탁으로 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손강은 공손도(탁)의 아들이다. 공손도라는 인물에 주목하면서 잠깐 고구려의 역사를 함께 상고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댓글> 

Paul Kim

개성(開城)과 개경(開京)은 크게 다릅니다. 개성은 하나의 성(城)이지만 개경은 고려의 도읍지 입니다. 역사를 왜곡할 때는 이런 식으로 글자를 바꾸는 일이 허다합니다. 물론 "모형"을 만들어 역사를 조작한 것입니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도 있어볼려고 생각조차하지 않았습니다. 신라는 대륙 강소성(江蘇省)에서 패망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있다는 계림, 경주, 금성, 불국사, 첨성대, 신라산, 토함산, 왕릉 등은 모두 가짜이지요. 필자의 학술논문 제18집 <신라의 강역 연구>가 출간 되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00 감사합니다.


이00

김태영박사님오늘도너무나도.공감이감니다.지당하신말씁입니다.역사을잘알아보자그리고.토론을공개적으로해나아가는문화를지향해나아값시다감사합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1부∼6)

8. 帶方考(대방고)

 

“고구려 제9대 고국천 남무열제의 장자[동생]인 발기(發岐)가[는] 동생인 연우(延優)가 제10대 산상연우 황제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황궁(환도성)을 포위하고 3일동안 격전을 하였으나 백성들이 발기를 돕지 않았다. 발기는 순나의 백성 3만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전지역을 요동태수(한나라의 요동은 감숙성 난주) 공손도(탁)에게 넘겨주며 구원을 청하였다. 공손도(탁)는 발기의 투항을 받아 기뻐하며 정병 3만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입하여 환도성(丸都城: 산서성 화염산 말꼬리 부분)에 들어가 마을을 불질렀다. ...발기는 후회하고 비류강에서 자살하였다.”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공손도가 요서에 있던 낙랑의 남부를 나누어 대방군이라 한 것은 고구려의 왕자인 발기가 형제간의 불화로 인하여 그 땅을 공손도에게 스스로 넘겨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에 대방군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보인다. “대방현은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했다. 공손도가 대방군을 두었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건안(建安: 196-200) 중에 공손강이 둔유(屯有)을 나누어 염현(鹽縣)이 있는 남쪽 거친 땅에 대방군을 두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염현의 위치를 알아보자. “염지는 산서성 해현 동쪽에 있다. 안읍현 남쪽이다. ...두우의 주(注)에 염(鹽), 염지(鹽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다. 요동이라 하고 유주이면서 요서인 수양산이 위치한 산서성 남부 운성염지의 남쪽이 바로 대방군이었다. 이들 지명은 모두 당시 바다(海)라고 하는 황하와 인접한 지역이다.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 <그림 4>와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1부∼7)

8. 帶方考(대방고)

 

대방고의 결론을 살펴보자. “대방은 모두 넷이다. 그 하나는 위에서 말한 것이요, 두 번째는 요동에 있다는 대방이다.” 본문에서 “위에서 말한 것이란” “평양 남쪽, 임진 북쪽에 있었던 것 같다”라는 대방이다.

 

“세 번째 대방은 나주(羅州)의 옛 회진현(會津縣)이다. 이곳을 대방주라고 한 것은 이름을 빌려서 쓴 것이다.”

 

“네 번째 대방은 남원부(南原部)다. 일찍이 대방주 자사(刺史) 유인궤가 있던 곳이어서 남원이 대방이 된 것이다”라고 하여 정약용은 대방이 네 개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양 남쪽, 요동, 나주, 남원으로 한반도에 3곳 그리고 요동의 대방을 말하고 있다. 필자가 밝힌 대방군과는 완전히 다른 주장이다.

 

한반도에 대방군이 있었다고 주장한 정약용이 틀린 것이다. 대방군은 고유명사로 지명이동이 될 수 없다. 대수(帶水)라는 하천으로 인하여 대방군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까지 소설과 서정시집을 제외하고 약 157,000권의 세상 책들을 읽었으나 인간이 천연지형물인 하천(河川)이나 산(山)을 옮겼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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