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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5부1)
글쓴이 : 김태영 날짜 : 2022-12-13 (화) 17:21:43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5부1)


2. 四郡總考(사군총고)

 

“四郡者, 衛滿朝鮮之所分也(4군은 위만조선에서 나뉜 것이다)”라부터 시작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史記朝鮮列傳(사기조선열전)』을 인용하고 있다. “원봉(元封) 2년에 누선장군 양복(楊僕)과 좌장군 순체(荀彘)를 보내 조선을 친지 3년만에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군(郡)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이다. ‘조선고’에서 “압수로써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으니 한반도에 있는 오늘날의 압록강 이남을 조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한무제의 두 장군이 한나라의 도읍지인 섬서성 장안(長安)에서 한반도 압록강 하구인 신의주까지 직선거리로 약 3,532리 그리고 한반도 만포까지는 약 3,994리의 먼거리를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와서 3년동안 전쟁을 하여 조선을 멸했다고 믿고있는 것 같다. 당시 이 같은 논리가 가능했을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강행군하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손자병법』의 기초이다. 필자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약용은 『漢書武帝記(한서무제기)』를 인용하고 있다. “원봉 3년에 조선이 우거왕(右渠王: ?~-108)을 베고 항복하자, 그 땅으로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4군을 삼았다. 『五行志(오행지)』는 두 장군이 조선을 쳐서 세 군을 열었다.”라는 내용이다. 정약용은 “4군을 3군이라 한 것은 진번을 넣지 않은 것이어서 사고(師古)의 말이 꼭 맞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정약용은 또 『武陵書(무릉서)』를 인용하였다. “임둔군의 치소(治所)는 동시현이니,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고, 속현(屬縣)은 열다섯이다. 진번군의 치소는 운현(雲縣)이니,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속현은 열다섯이다. 「綱目(강목)」의 주(註)에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이요, 현도군의 치소는 옥저성(沃沮城)이다’”란 내용이다.

 

함께 꼼꼼히 살피고 넘어가자. 장안에서 6,138리라면 직선거리로 흑룡강성 동부 맨 끝까지 이르는 거리이고 일본 관서(關西) 중부의 송본(宋本)까지의 거리이다. 한반도 압록강 이남을 훨씬 넘는 거리이다. 장안에서 7,640리라면 러시아와 태평양에 달하는 먼 거리이다. 정약용은 사료를 인용하면서 역사학자의 필수사항인 사료비판을 하지 않았다.

 

동양사를 깊이 연구해 보면 지나(支那)인들이 말하는 6천리, 7천리, 1만리 등의 거리는 의미가 없는 과장과 허풍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의 논평이다. “현도에서 낙양까지의 거리가 낙랑보다 1,000리 적다는 것은 요동의 현도를 말한 것이다. 만일 무제 때 현도군 치소가 지금의 함흥이라면 어찌 이보다 더 멀지 않을 것인가? 지혜롭게 살펴야 할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5부∼2)

2. 四郡總考(사군총고)

 

‘사군총고’의 두 번째 문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四郡始分之初, 惟鴨江以東, 入於疆理. 鴨江以西, 遼東之地, 不相混也. 惟眞番一郡, 疑在今江界外徼(4군이 처음 나누어질 때 압록강 동쪽은 국경 안에 들어왔으나, 압록강 서쪽은 요동 땅이니 서로 혼동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번군 하나만은 지금의 강계(江界)의 밖 변방에 있었던 듯하다)”라고 하면서 『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를 인용하고 있다.

 

“낙랑의 속현은 스물다섯이요, 요동의 속현은 열여덟이다.”란 내용이다. 인용문에는 정약용의 주장대로 4군이 처음 나누어질 때 압록강 동쪽은 국경 안에 들어왔다는 말이 없다. 낙랑과 관련하여 정약용은 낙랑의 여러 현이 요동에 있다고 믿은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 가운데 낙랑의 여러 현이 요동에 있지 않았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서지리지』에 낙랑과 요동이 각기 다른 군으로서 속현을 거느렸으니, 낙랑의 현은 마땅히 요동과 섞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소제(昭帝) 이후로 낙랑, 현도의 군현 이름이 상당수 요동으로 옮겨졌지만, 이것 역시 빈 땅을 골라 읍과 촌락을 만든 것이지 요동의 옛 현에 낙랑과 현도의 새 이름을 쓰게 한 것이 아니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오늘날의 요녕성을 요동이라 한 것은 명나라 청나라를 거쳐 손문의 [중화]민국 때까지 사이에 날조된 것이다. 필자의 논문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따라서 정약용은 이곳 요녕성으로 비정한 4군은 허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듯하다”, “빈 땅을 골라 읍과 촌락을 만든 것이지” 등 추측과 억측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5부∼3)

2. 四郡總考(사군총고)

 

세 번째 문단을 살펴보자. “四郡之變, 厥爲二府. 疆域旣移, 名稱隨混, 不可以不辨(4군이 변하여 2부(二府)가 되었다. 강역이 옮겨지고 따라서 이름도 혼란하게 되었다.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은 혼란케 된 것을 분별하기 위해 『後漢書東夷傳(후한서 동이전)』의 “소재 시원(始元: 86-81BC) 5년에 임둔, 진번을 없애 낙랑, 현도에 합쳤다.”는 것과 『文獻備考(문헌비고)』 「郡國志(군국지)」 “조선의 옛 땅인 평나(平那), 현도 등의 군으로 평주도독부를 삼고, 임둔, 낙랑 등의 군으로 동부도독부를 삼았다.”는 내용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한나라 원제(元帝) 때 두 이부(二府)가 고구려에 병합되었다”라고 말한 홍만종(洪萬宗)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평나를 진번이라 함은 옳지 못하다. 「군국지」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글이 없고, 또 고구려가 평양을 얻은 것이 조위(曺魏) 때이니 홍만종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인용문을 살펴보자.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군을 논하고 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지명인 ‘평나’가 등장하고 있다. 임둔과 낙랑이 동부도독부가 되었다면 홍만종의 주장대로 진번과 현도가 평주도독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진번의 행방은 묘연하고 갑자기 ‘평나’란 새로운 명칭이 나타났다. 진번과 평나와의 관계를 충분히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그러하지 못했다. 허구의 한4군이지만 만약 한4군이 위치했었더라면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산서성 남부에 설정하고 여러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을 조사, 비교, 검토, 분석했더라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는 홍만종의 주장이 옳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요녕성을 요동으로 비정한 정약용과 홍만종은 모두 틀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한4군의 허구성과 그 위치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www.cp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5부∼4)

2. 四郡總考(사군총고)

 

‘사군총고’를 정리해보자. “4군은 위만조선에서 나뉜 것이다. 4군이 처음 나누어질 때 압록강 동쪽은 국경 안에 들어왔으나, 압록강 서쪽은 요동 땅이니 서로 혼동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번군 하나만은 지금의 강계(江界)의 밖 변방에 있었던 듯하다. 4군이 변하여 2부(二府)가 되었다. 강역이 옮겨지고 따라서 이름도 혼란하게 되었다.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四郡者, 衛滿朝鮮之所分也. 四郡始分之初, 惟鴨江以東, 入於疆理. 鴨江以西, 遼東之地, 不相混也. 惟眞番一郡, 疑在今江界外徼. 四郡之變, 厥爲二府. 疆域旣移, 名稱隨混, 不可以不辨.)”라고 71자로 연구를 마쳤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땅을 한나라의 영토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동양의 어떤 문헌사료에도 기록된 바 없다.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군을 두었다면 그 땅을 분봉받은 제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1차사료나 문헌자료 어디에도 4군에 봉한 제후의 이름들이 없다.

 

한4군은 처음부터 허구였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그러한 내역을 전혀 모르고 지나인들의 왜곡, 날조, 조작에 동조한 중대한 실수를 범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6부∼1)

 

3. 樂浪考(낙랑고)

 

“樂浪者, 今平安·黃海二道之地也. 其屬縣之載於<漢·志>者, 臨屯·玄菟之地, 咸增附焉(낙랑은 지금의 평안·황해 두 도 땅인데, 『漢志(한지)』에 실려있는 것은 임둔과 현도의 땅으로 모두 증부(增附)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본문의 논거로 정약용은 『漢書(한서)』 「地理志(지리지)」를 인용하고 있다. “낙랑군은 호수가 6만 2812호요 속현은 스물다섯이니, 조선, 염나, 패수, 함자, 점제, 수성, 증지, 대방, 사망, 해명, 열구, 장잠, 둔유, 소명, 누방, 제해, 혼미, 탄열, 동시, 불이, 잠태, 화려, 사두, 매전, 막부조 등이다”라는 내용이다.

 

그가 인용한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은 지금의 평안, 황해 두 도 땅”이란 말이 없다. 그리고 임둔과 현도의 땅으로 낙랑에 증부되었다는 말도 없다. 무슨 이유에서 본문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료를 인용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낙랑군은 본래 조선현에 있으니, 현(縣)은 지금의 평양이다.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 유역 땅이고, 점제는 지금의 연안(延安), 백천(白川) 땅이며, 수성(遂成)은 수성(遂城)이니 지금의 의주(義州), 창성(昌城) 북쪽이 그 터가 아닌가 한다.

 

증지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증산(甑山)이라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지금의 강서(江西), 용강(龍岡)이 옛날에 증산과 합하여 한 현이 되었다가 패수에 편입된 것이 아닐까?

 

대방과 합자는 대수(帶水) 유역 땅이니, 지금의 교하(交河), 장단(長湍), 마전(麻田) 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생겼다.” 했다가, “조선현이 평양이라”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그리고 낙랑군 가운데 조선현이 있는 것이지 현(縣)속에 군(郡)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는, 아무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억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인용한 『한서』 「지리지」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다. 그는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모든 지명들을 한반도, 강화, 경기, 강원도, 강원도 춘천, 강원도 소양강 등에 설정하는 중대한 실책를 범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6부∼2)

 

3. 樂浪考(낙랑고)



 


‘낙랑군 수성현’에 대하여 그는 “낙랑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된 곳이다.”란 『太康地理志(태강지리지)』와 “갈석산은 한(漢)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지금 알아보니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려(高麗)에 들어왔는데, 남은 터가 아직도 있다.”란 『通典(통전)』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일 『통전』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성은 지금의 의주, 창성 땅으로 마땅히 압록강 지역에의 경계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압록강 서쪽, 지금의 나무로 만든 성채[柵] 동쪽 머리의 땅에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1차사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수성(遂城)이 지금의 의주, 창성 북쪽”이라고 억측을 하고 있다.

 

수성은 오늘날의 산서성 임분현 서남쪽를 뜻한 것으로 정약용이 틀렸다. 수성현의 위치는 다음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갈석산의 위치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6부∼3)

3. 樂浪考(낙랑고)

 

낙랑고의 두 번째 문단이다. “樂浪置郡之初, 皆自中國遣吏. 其後, 或以土酋爲長(처음 낙랑군을 설치할 때는 관리를 모두 중국에서 보냈으나, 나중에는 현지 사람으로 장(長)을 삼기도 했다)”라 적고 있다.

 

본문의 근거로 『後漢書(후한서)』를 인용하였다. “소제 시원(86-81BC) 5년에 임둔과 진번을 없애 낙랑과 현도에 합쳤고, 나중에 국토가 넓고 멀다 해서 영동의 일곱현을 나누어 낙랑군 동부도위를 두었다. 그러다가 건무(25-55AD) 6년에 도위 자리를 없애고 그 영현(領縣)을 드디어 버려 동쪽 땅을 모두 그 거사(渠師)들에게 주어 현후(縣侯)로 삼고 때마다 조공(朝貢)케 했다”란 내용이다.

 

또 『漢書薛宣傳(한서설선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선(宣)으로 낙랑도위승을 삼았다”는 내용이다. 한무제 원봉 3년인 BC108년에 위만조선 우거왕의 5신하들에게 준 봉지는 분봉한지 18년만인 BC91년에 모두 폐지되었는데 어찌하여 11년후인 BC81년에 낙랑군 동부도위를 둘수 있으며 선(宣)이란 사람을 낙랑도의승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전혀 논리성과 설득력이 없는 곡필을 하고 있다.

 

또한 정약용이 주장한대로 “현지 사람으로 장을 삼다”라고 했으나 인용한 사료에는 현지에서 임명된 사람들의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허구라는 단면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정약용은 본문과 관련하여 『魏志(위지)』를 인용하고 있다. “명제가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몰래 보내어 바다 건너 두 군(郡)을 평정케 했다. 또 정시(正始: 240-248) 6년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군사를 일으켜 동예(東濊)를 무너뜨리고 이를 거느렸다”는 내용이다.

 

정시6년은 246년으로 삼국시기 조조의 위(魏)나라 때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근거없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337년 후의 위나라 기사를 한(漢)의 사건과 뒤죽박죽 섞고 있다. 정약용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대목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6부∼4)

 

3. 樂浪考(낙랑고)

 

정약용의 논평이다. “이때 중국의 파견 관리는 모두 바다를 건너서 왔으니, 대개 요동과 심양 사이의 길이 막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압록강 서쪽은 본래 낙랑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나라 학자들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요동에도 낙랑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그렇다면 낙랑이 셋이 있게 된다.”라고 하여 섬서성 서안이나 하남성 낙양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추측하면서 세 곳의 낙랑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의 바다(海)란 황하(黃河)를 가리키는 것이다. 황하란 단어는 당(唐)나라 중반부터 나타난 것으로 그 이전에는 하(河)나 해(海)나 하수(河水)로 불렀다. 그리고 낙랑은 세 곳이 아니고 산서성 남부 한 곳에 위치하였다.

 

정약용이 여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서안평’, ‘살수’는 모두 오늘날의 산서성에 있던 지명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이나 www.coreanhistory.com을 참고하기 바란다.

 

‘낙랑고’를 종합해보자. “낙랑은 지금의 평안·황해 두 도 땅인데, 『漢志(한지)』에 실려 있는 것은 임둔과 현도의 땅으로 모두 증부(增附)된 것이다. 처음 낙랑군을 설치할 때는 관리를 모두 중국에서 보냈으나, 나중에는 현지 사람으로 장(長)을 삼기도 했다.(樂浪者, 今平安·黃海二道之地也. 其屬縣之載於<漢·志>者, 臨屯·玄菟之地, 咸增附焉. 樂浪置郡之初, 皆自中國遣吏. 其後, 或以土酋爲長.)”라고 하여 52자로 낙랑의 연구를 마쳤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Paul Kim

고구려의 황제가 거주했던 곳은 여러 곳으로 이곳 모두를 도읍지로 간주한다면, 졸본성,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동황성, 그리고 영락궁 등이 됩니다. 이들 대부분의 성(城)은 천연요새지이지만 요동성은 평지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동성에도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사당을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 요동성에서도 황제가 머물렀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多大山深谷한 곳에 자리잡고 산골짜기물로 식수를 한다"는 기록은 환도성에 도읍했을때를 설명한 것입니다. 환도성은 안시성과 함께 산서성 여량산맥의 아랫부분인 화염산에 위치했던 도읍지입니다. 산서성 남서부 황하가 굴곡하는 지점으로 중조산의 일부에 보이는 영락궁은 고구려 광개토호태열제의 황궁이었고 이 부근 중조산에 연개소문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헌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교차확인하면 가능성이 짙어요. 단군조선이나 삼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곳에서 태동하게 된 이유는 황하의 북쪽으로 하천이 범람하지않은 명당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황제헌원의 고향인 하남성 개봉은 황하의 남쪽으로 지금까지 약 10차례 황하가 범람하여 골치을 앓은 지역이지요. 백제의 제2차 도읍지였던 한성(漢城)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인 산동성 제령으로 당시 개로왕이 황하의 범람을 막기위해 숭산에서 비성(사성)까지 제방을 쌓았어요. 제16집 <백제의 영토 연구>란 학술논문이 곧 출판될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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